밤에만 열리는 심야국수집

고기국수 4편

by 홍난영

저녁 6시 30분에 갔는데 바람맞았다. 분명 저녁 6시에 오픈한다고 했는데 정보가 오래됐거나 틀렸던 모양이다. 혹은 사정이 있어 그랬는지도. 어쨌든 문이 닫혀있으니 전화를 걸어봤자다. 어쩔 수 없이 철수하기로 했다.


이번엔 느지막이 7시에 전화를 했다. 받으면 그때 출발할 생각이었다. '여보세요'라는 목소리 너머로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가 웅성웅성 들려왔다. 아, 문을 여셨군요. 출발합니다.


제주는 참 재미있는 곳이다. 대부분은 저녁식사 시간을 기준으로 식당 문을 닫지만 고기국수집만큼은 오히려 저녁에 문을 여는 곳이 있다. 서울에도 심야식당은 많지만 왠지 앞에 ‘제주’가 붙으면 신비로워진다. 제주 심야국수집이라면 비록 동네국수집일지라도 뭐든 재미가 있어진다.


메뉴판에 메뉴들이 한자로도 적혀있는 걸 보니 중국사람들도 많이 오는 모양인데 그 또한 궁금해진다. 중국인들도 나처럼 심야에 고기국수 먹는 재미로 단체로 오기도 하는 건가. 새벽 4시에 문을 닫는다는데 새벽 3시쯤 오면 어떤 풍경이 펼쳐질까, 모든 게 궁금하다. 어느 날 문득, 새벽에 깨어 도저히 잠이 오지 않을 때 장장 30km가 넘는 길을 달려 가볼까? 과연 그런 날이 올까?


이곳의 고기국수는 담백했다. 그렇다고 고기국수 특유의 배지근한 맛이 없는 건 아니다. 그래도 간이 심심해서 김치를 먹었는데 이게 웬일인가. 김치가 너무 맛있는 거다. 이거 혹시…… 고기국수가 메인이 아니라 김치가 메인인 거 아냐? 김치를 먹기 위해 고기국수를 먹는 그런 상황. 그럴 수도 있다. 국수의 세계는 워낙 버라이어티 하니까. 국물이 덤덤하기 때문에 그릇을 들고 마셔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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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함께 간 H의 비빔고기국수. 비빔양념장을 직접 만드시는 듯했다. 김치의 고춧가루 맛과 비슷한 맛이 올라왔다. 매운맛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하나도 맵지 않았지만 매운 것을 못 먹는 H는 기분 좋을 정도의 매운맛이라며 기뻐했다.


“고기에 양념장을 묻혀먹으니까 너~무 맛있다. 너도 먹어볼래? 아유, 막걸리가 땅기네.”


아 정말, 차만 없었으면 늦게까지 막걸리를 마시고 싶어 지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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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로 이사를 와서 흔히 하지 않던 일을 종종 하기 시작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짓도 가끔 한다. 고백하건대 나는 엄마의 혼에 많이 길들여진 사람이다. 엄마는 자기가 그려둔 세계에 어긋나는 일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틀에서 벗어나기라도 하면 혼을 내셨다. 그 덕에 나는 성인이 되어서도 ‘혼날까 봐’에 매여 있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에도 ‘혼날까 봐’ 유령은 한동안 나를 지배했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왜 안 돼? 새벽에 30km가 넘는 곳에 가서 국수 한 그릇 달랑 먹고 오면 왜 안 돼? 아직 시도는 해보지 못했지만 그러다 동이 틀 때 집에 가도 되지 않을까? 막말로 막걸리를 마시다 근처에서 한숨 자고 집에 오면 왜 안 돼?


‘혼날까 봐’ 유령은 사라졌다. 그리고 나는 비로소 어른이 되었다. 나를 옭아매는 유령이 있다면 그 유령의 서식지를 벗어나면 된다. 용기는 이럴 때 필요한 거다. 여행은 용기의 시작이다.


내가 감당할 수 있으면 안 될 것은 없다. 그게 어른이 되는 거다. 나이를 먹는다고 어른이 되는 게 아니다.
나는 너무 늦게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 ‘혼날까 봐’의 유령이 없는 이곳 제주에서 말이다.


“잘 가 유령! 이젠 오지 마!”



- 덧붙임


이곳은 여전히 심야에만 문을 열고 있습니다. 저녁 6시 30분부터 새벽 3시 30분까지 영업을 하네요. 굳이 가게 이름은 적지 않겠습니다. 힌트라면 한림항 근처에 있는 작은 동네 국수집이라는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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