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기국수 5편
고기국수의 첫 관문을 통과했는가? 고기국수가 맛있다고 생각된다면 첫 관문을 통과했다고 본다. 축하한다. 이제 다음 관문으로 가보자. 묵직 오브 더 묵직의 고기국수를 먹을 차례다.
고기국수는 기본적으로 묵직하다. 나도 처음 먹었을 땐 면의 양도 양이었지만 국물과 고기 고명 덕분에 무지하게 든든했었다. 그런데 제주 지역민의 추천을 받아 간 곳의 고기국수는 원래의 묵직함에 묵직함을 또 더했다. 고기국수에 유부국수를 더한 맛이 느껴졌달까. 고기국수다 싶었는데 뒤이어 강타하는 또 하나의 국수의 맛.
사실 나는 이제껏 고기국수 한두 그릇 먹어보고 ‘고기국수란 이런 것이야’라고 생각해도 되는 줄 알았다. 그래서 그깟 고기국수, 이러면서 매우 익숙하게 건들건들 식당에 갔었다. 하지만 큰 착각이었다. 이곳의 고기국수는 내가 본 적 이 없는, ‘또 하나의’ 고기국수였다.
물론 뽀얀 국물, 고기 고명, 굵은 면발은 똑같았지만 그 안에 펼쳐져 있던 그 식당만의 개성은 나의 안일함에 경종을 울렸다. 빙산의 일각만 보고 전체를 다 안다고 우쭐대는 꼴이라니. 너, 언제 인간 될래?
어쩌면 말이다. 내가 이렇게 살고 있었을지 모르겠다. ‘먹는언니’로 살아오면서 나도 모르게 갖게 된 맛에 대한 시건방짐은 아니었을까. 그렇게 난 축복 같은 인생을 날건달로 낭비하고 있는 건 아닐까. 세상 모든 게 스승이라지만 고기국수가 인생을 돌아보게 할 줄이야. 그러자 픽 웃음이 터졌다. 왜 그런 실소가 나왔는지 아직도 잘 모르지만 머릿속은 막 쫀쫀대고 마음은 쫄깃쫄깃 그랬다. 난 뭔가 달라지고 싶었던 것 같다.
국수 여행을 하며 알게 된 것은 대체로 동네 식당의 고기국수는 이렇게 묵직~하다는 것이다. 물론 동네 식당이라 해도 묵직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국수의 세계엔 정답이 없으니까. 대체로 그렇다는 이야기다.
언젠가 만난 제주 이주민과의 대화 중 고기국수 이야기가 나왔다. 내가 하도 국수를 먹으러 다니니까 이젠 사람들이 나만 보면 국수 이야기부터 꺼낸다. 심지어는 뭐 먹으러 갈 때도 국수를 먹으러 간다. 아무튼 고기국수 이야기를 하면서 나온 식당이 여기였다.
“거기 가보셨어요?”
“아, 님도 가보셨어요?”
뭔가 통하는 느낌. ‘고기국수 좀 먹어봤네’라는 암묵의 시선.
관광지에서의 고기국수가 입문이라면 동네 식당은 중급이다. 물론 그 뒤로도 여러 레벨이 있다. 내가 먹은 것 중 가장 난이도 높은 레벨의 것은 뒷부분에 소개될 ‘순대고기국수’다. 메뉴 이름부터 포스 넘치지 않는가? 맛의 레벨이 아니다. 입문 레벨에도 맛있는 고기국수는 있다. 뭐랄까. 다양함의 문제라고 할까. 이를테면 이런 거다.
관광지의 국수집은 다양한 지역에서 온 사람들의 입맛을 아우른 대중적인 맛을 제공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동네는 그 동네 사람들의 입맛만 책임지면 된다. 동네 식당이 서울 쌍문동에서 온 사람의 입맛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잖은가. 그러다 보니 동네 국숫집엔 더 많은 고기국수의 변주가 일어났다. 동네 주민의 입맛에 맞든지, 동네 주민이 식당에 맞추든지, 어쨌든 둘이 통하기만 하면 된다.
제주 지역민에겐 자기가 좋아하는 고기국수집 하나쯤은 있다는 말은 확실히 맞다. 한 동네 안에도 여러 고기국수집이 있으니 통하는 곳으로 가면 된다. 그래서 동네 식당은 개성이 또렷하다. 맛뿐만 아니라 서비스까지 몽땅 포함된다.
이곳 덕분에 고기국수의 다양함에 눈을 떴고 최대한 많은 고기국수를 먹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비록 정리는 되어있지 않지만 고기국수도 평양냉면처럼 다양한 라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직도 먹어 봐야 할 고기국수가 너무나 많아서 나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내놓을 단계는 아니지만 제주로 이사까지 왔으니 그 작업도 해보면 좋을 것 같다.
어쨌든 이 사건은 내게 큰 교훈을 주었다.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것은 그 나름의 세계가 존재하니 우습게 보지 말자는 것이다.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세계는 계속해서 넓어진다. 세계가 있다는 건 깊이도 있다는 이야기다.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세계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간다. 그게 역사다. 그러니 빙산은 바다 밑이 더 거대하다는 사실, 잊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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