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네기의 인간관계론>에 보면 내가 원하는 걸 얻으려면 그걸 줄 수 있는 상대가 원하는 것을 줘야 한다고 한다.
<그리스인 조르바>에도 '자신을 구하는 유일한 길은 남을 구하려고 애쓰는 것이다.'라고 했다.
무슨 말인가.
순간 떠오른다. 남이 원하는 것, 남을 구하려고 애쓰는 것은 '상대'를 면밀히 들여다보는 게 우선되어야 한다. 상대를 모르는데 어떻게 상대가 원하는 걸 알 수 있겠는가.
이기적인 마음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갖기 위해 네가 원하는 걸 주고야 말겠어,라는 마음이라기보다는 상대의 세계를 관찰하고, 이해하려 하고, 그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있는 내가 되는 과정에서 세상을 입체적으로 볼 수 있는 통찰력이 커지고 결국 내 세계가 커지는 것이다.
생각해 본다.
우리 강아지들이 원하는 건 무엇일까? 그걸 주기 위해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한림쉼터 후원자분들과 봉사자분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분들은 왜 후원하고 봉사를 하는 걸까? 그 마음을 헤아리고 감사의 표현을 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가족의 평화를 얻기 위해 가족의 구성원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걸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은 무엇일까?
어차피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나의 세계에서 나온다. 따라서 생각하고 행동할수록 그의 세계와 나의 세계는 더욱 풍요로워진다.
이게 원리였다. 그리고 사랑이었다.
<강신주의 감성수업>에서도 그런다.
자신이 더욱 충만해진다는 감정이 바로 기쁨이다. 감정과 사랑이라는 감정을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척도는, 사랑에는 외부 원인이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사랑이라는 감정은 특정한 외부 대상을 전제로 하는 기쁨인 것이다.
기쁨은 나의 감정이고 사랑은 상대를 기쁘게 하는 감정이다. 사랑을 하면 함께 기쁠 수 있다. 그래서 함께 풍요로워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