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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mon de Cyrene Jan 21. 2020

소개팅과 자만추

연애의 풍경. 2화

소개팅이 들어왔다. 하필 딱 그 순간 현실의 압박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을 뿐 아니라 갓 운동을 마쳐서 온 몸에 젖산이 하나 가득 쌓여 있는 상황이었다. 한참을 고민하다 '처음 만나는 사람과 알아갈 여유가 지금 없다'라고 답했다. 사실이었다. 최근 몇 달 동안 '나를 이미 어느 정도 아는 사람과 만나서 적당히 연애하고 가정을 꾸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자주라고 하기엔 가끔, 가끔이라고 하기엔 자주 들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에 후회했다. 30대 후반에는 믿을만한 소개팅을 받기가 힘들기에.


소개팅을 엄청나게 싫어하던 시절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소개팅이 필요 없던 시절. 내가 속한 모든 집단에 여자가 압도적으로 많았고, 그렇다 보니 내 마음에 감정의 씨앗이 수도 없이 뿌려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다 보니 상대를 사랑하거나 엄청나게 좋아하지는 않더라도 일정한 수준 이상의 호감이 생기는 이성은 20대 후반까지 항상 있었고, 난 마음에 감정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 최소 1시간에서 때로는 그 이상을 '버텨야 하는' 소개팅을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자연스러운 만남을 추구한다'는 말, '자만추'. 나 역시 그런 사람이었다. 사실 단순히 그 순간의 감정과 쾌락, 자신의 욕구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만남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자연스러운 만남을 선호할 것이다. 이는 그렇게 만나게 되는 관계에서는 서로 감정과 관계를 형성하는 과정이 나의 동선 안에서 해결되기 때문이다. 일상을 살아가면서,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만나지는 사람.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서로가 상대에 대해 어느 정도는 이해와 신뢰가 있고, 두 사람 사이에 직접 뭔가가 오가지 않더라도 '관찰'함으로써 어느 정도는 파악되는 상대. 그런 사람과의 사이에서 감정의 씨앗이 뿌려지고, 관계를 키워나가는 것이 완전히 새로운 사람과 관계를 형성하는 것보다 상대적으로 덜 피곤한 것은 사실이다.


반면에 소개팅으로 사람을 만나고 알아가는 과정은 초기에 적지 않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 하다 못해 만남 초기에는 한 번 만나고 통화하기 위해서라도 '인위적인 노력'을 해야 하지 않나? 그리고 두 사람은 보통 '상대가 자신에 대해 설명하는 말'을 듣고, 그 말을 신뢰하고 믿어야 할 뿐 아니라 상대가 누군가와 자연스럽게 있는 모습을 볼 기회가 처음부터 박탈되기 때문에 상대를 알아가고 파악하는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어느 정도 이상의 감정적 교류를 하고 관계를 만들어 나갈 사람과의 관계에서만 그렇다. 그런 관계를 형성할 생각 없이 일단 누군가를 만나는 것 자체가 목적이거나, 본능적으로 호르몬 작용에 따라 그 순간에 충실하려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런 목적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자만추' 보다는 소개팅이 더 맞을 것이다. 이는 그러한 호르몬 작용은 알고 지내면서 아무 감정도 일으키지 않은 관계보다는 새로운 사람을 만났을 때 일어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또 알고 지내던 사람과 연애를 할 경우, 두 사람의 이별이 두 사람이 속한 집단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도 변수가 된다. 내 주위에는 그런 이유로 주위에 있는 사람과는 절대로 만나지 말라고 조언하는 지인도 있다. 


소개팅과 '자만추'에 대해 이렇게나 고민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 고민들이 큰 의미는 없는 듯하다. 이는 사람들이 '자만추'라고 하지만 두 사람이 동시에 감정이 샘솟는 경우보다는 한쪽이 감정이 먼저, 더 많이 생겨서 지인 간의 관계에서도 '인위적인 노력'이 기울어지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즉, 사람들이 '자만추'라고 하지만 그 '자연스러움' 속에는 사실 인위적인 면이 전혀 없을 수 없단 것이다. 이는 원래 오래 알던 사람과 관계가 발전한다면 얘기가 조금 다르겠지만 그렇게 되는 경우는 매우 드문 반면, 나이가 들고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만나는 사람들을 반복해서 만나게 되기 때문에 사람들이 말하는 '자연스러운 만남'을 위해서는 어차피 '인위적인 자리와 노력'을 기울여야 하기 때문이다. 동호회, 독서모임, 종교활동도 계속 노력해야 나가고 유지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리고 어차피 연애의 시작은 감정이다. 그리고 상대의 모든 것을 알고 연애를 시작하는 사람은 없다. 사실 누군가에게 사람의 감정이 생기는 것은 논리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않고 우리 의식의 영역보다는 무의식의 영역이 미치는 영향이 더 크지 않나? 많은 사람들이 머리로 생각하는 이상형과 실제로 만나는 사람이 다른 것이 이를 보여준다. 그리고 무의식의 영역은 두 사람 간의 관계의 깊이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순간 감정적 전환을 일으키기 때문에 사실 연애가 시작되는 시점은 소개팅과 자연스럽게 만나는 관계가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또 '친구'나 '지인'이었던 A와 '연인' A는 다른 사람이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연애를 시작한 후 두 사람의 관계는 거의 완전히 새롭게 시작된다. 오래 알았던 사람이라고 해서 그 사람을 반드시 더 잘 아는 것도 아니고, 두 사람의 관계가 재정립되면 두 사람은 어차피 서로 모르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소개팅을 통해 만난 사람과의 연애와 '자만추'를 통한 연애가, 그리고 그런 연애를 통해 결혼한 사람들이 꾸린 가정이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을 갖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십 년 연애해서 결혼한 후 1년 이내에 이혼하는 부부도 있고, 얼굴 처음 본 지 2개월 만에 결혼해서 평생을 함께 사는 부부도 있으며, 오래 알았거나 사귀었던 부부라고 해서 갈등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이를 보여준다. 


이와 같은 사실에 비춰봤을 때 두 사람이 처음 만나게 되는 방법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듯하다. 어차피 감정의 씨앗이 뿌려질 관계에선 씨앗이 뿌려질 테니까. 그렇다면 굳이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경로를 하나 닫아놓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연애의 핵심은 시작이 아니라 과정에 있으니까.


물론, 연애를 시작하는 초기에 소요되는 에너지의 수준에는 차이가 있다. 그리고 소개팅을 한다고 해서 감정의 씨앗이 두 사람에게 동시에 뿌려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소개팅을 통해 누군가를 만나게 되는 과정에서는 어느 정도 이상의 에너지가 소모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과정에 일상을 방해하는 수준의 에너지가 드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점에 비춰봤을 때, 본인은 인정하지 않더라도 '자만추'를 추구한다며 소개팅은 아예 닫아놓은 사람들은 사실 연애가 인생의 우선순위에서 그렇게 높지 않을지도 모른다. 결국 모든 것은 에너지를 어디에 사용할 것인지에  대한 우선순위의 문제다.


그럴 수도 있고, 그게 또 잘못된 것은 아니잖나? 연애는 인생의 전부도 아니고, 그래서도 안된다. 그리고 인생의 특정한 시점에 반드시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일이 있을 수도 있고, 일하는데 에너지를 집중시키는 것이 훨씬 즐거운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다름이 곧 틀림은 아니고, 그 사람의 인생은 어차피 본인이 책임지는 것이기에 그에 대해서 제삼자들이 왈가왈부해서는 안된다. 그 사람 인생을 책임져줄게 아니라면. 


분명한 것은 연애가 그 정도로 우선순위에 있지 않고 에너지를 쏟고 싶은 다른 영역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누군가와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더라도 상대에게 집중하거나 충분히 사랑받는다고 느끼만큼의 헌신을 하진 못할 가능성이 높단 것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만나서 관계를 형성하더라도 그저 연애를 위한 연애를 하는 것이 아니라면 연애 초기에는 어느 정도 이상의 에너지를 상대에게 쏟아야 하고, 정말 상대를 소중하게 여긴다면 그렇게 하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소개팅을 거절한 다음날 꽤나 오랜 시간 동안 후회했다. 그리고 그제야 내가 생각하고 인지했던 것보다 연애가 내 우선순위에서 꽤나 높은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글을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브런치에서 다양한 주제의 글을 씁니다. 혹시라도 감사하게도 '구독해야지!'라는 생각이 드셨다면, 2020년에 제가 쓸 계획(링크)을 참조하셔서 결정하시는 것을 권장합니다. 브런치에는 '매거진 구독'이라는 좋은 시스템이 있으니, 관심 있는 매거진만 구독하시는 것이 나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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