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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mon de Cyrene May 27. 2020

대화가 상실된 사회

대화의 원리. 17화

이 시리즈에서 계속 강조하는 것은 대화란 '말하기'와 '듣기'를 포함하는 개념이란 것이다. 사실 그런 기준에 비춰봤을 때 우리나라에서는 대화가 이뤄지는 경우나 관계는 거의 없다. 이는 사람들은 자신의 말은 쏟아낼지라도 듣지는 않기 때문이다. ‘대화의 원리' 시리즈에서는 주로 우리나라에서 이뤄지는 대화와 그 과정에서 형성되는 관계에 대한 비판을 했다. 비판은 필요하다. 하지만 대안 없는 비판은 너무 무책임하지 않나? 남은 시리즈에서는 내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관찰하고, 지켜보고, 고민하면서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원칙 혹은 원리들에 대해 설명하려 한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라는 책으로 유명해진 홍세화 씨는 최근에 넨 에세이집, [결: 거칢에 대하여]에서 남의 말을 듣지 않는 우리나라 사람들을 [완성단계에 이른 사람들]이라 부른다. 그런 사람들이 진짜 완성되어서 그렇게 부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완성되었다고 믿고 더 이상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에 대치되는 개념으로 [회의하는 자아]를 제시한다. 자신이 정말 옳은지를 계속 돌아보고 묻는 사람들이 회의하는 자아를 가진 사람들인데, 홍세화 씨는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항상 옳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줄 알지만 완성단계에 이른 사람들은 자신이 항상 옳다고 여기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말한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주장이 현상을 설명하는 측면에서는 맞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렇게 된 이유를 설명해주지는 못한다는 한계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현상을 바꾸려면 원인을 파악하고 그 부분을 설명해야 하기에 우리는 사람들이 왜 스스로를 완성단계에 이르렀다고 여기는 지를 고민해야 하고, 어떻게 하면 회의하는 자아를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을 제시해야 한다.


나는 우리나라의 과도한 경쟁과 줄 세우기가 우리나라 사람들이 스스로 완성되었다고 여기게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끊임없는 채찍질, 그 속에서 만들어진 '나만 잘되면 돼' 식의 이기주의, 그리고 너무나 가난한 시대를 살던 중에 갑작스럽게 물질적 풍요로움을 경험하게 되자 만들어진 물질만능주의적 세계관. 그 안에서는 내가 틀리면 패배자가 되기에 사람들은 스스로를 계속 완성된 사람인 것처럼 포장하게 될 수밖에 없다.


그걸 바꾸기 위해서는 경쟁하는 것을 능사로 여기는 물질만능주의적인 가치관에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 그리고 인간은 완벽한 존재일 수 없으며 실수를 해도 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한다. 크게 실패했거나 낙망했을 때 그 사람에게 사실 가장 필요한 말은 힘내라거나 무조건 잘 될 것이란 말이 아니지 않나? 그런 상황에서 힘내라는 말은 일어설 힘도 없는데 힘을 쥐어짜라는 말로 해석되고, 그렇게 무너진 사람은 무조건 막연하게 잘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은 그게 사실이 아니란 것을 알기에 그런 말은 위로가 되지 않는다.


그럴 때 가장 필요한 말은 '괜찮아'라는 말 한마디다. 실수할 수 있다고, 넘어질 수 있다고, 실패할 수 있다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고 말해주는 것이 그런 상황에 처한 사람에게는 엄청나게 큰 힘이 된다.


그리고 정말로 실패해도, 실수해도 괜찮다는 생각을 할 때야 비로소 사람들은 자신이 지금 갖고 있는 생각과 가치관에 질문을 던지고 회의할 수 있다. 또 그렇게 회의할 수 있을 때야 비로소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생각에 귀를 기울이고 고민을 시작할 수 있다.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을 수 있고, 인간은 누구나 그럴 수 있으며, 더 중요한 것은 진실 혹은 진리를 깨닫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무조건 틀리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내가 잘못 알았네'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사회적으로 '너는 실패한 거야'라던지, '거 봐, 너는 그렇게 멍청하다니까'라는 식으로 낙인찍는 분위기가 있다면, 사람들은 남의 말을 들으려 노력하지 않을 것이다.


대화의 시작은 '말하기'가 아니라 '듣기'다. 이는 무엇인가에 대한 대화를 할 대상이 있어야 대화를 할 수 있는데 그 대화는 누군가가 말한 것을 듣는 것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대화를 잘 들어보면 모든 대화는 글이나 영상에서 다룬 내용이나 다른 사람이 다른 시점에 한 말에서 시작된다. 사람들은 그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말하고 자신이 아는 지식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대화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모든 대화는 그 시발점이 되는 메시지를 어떻게 '듣고' 해석 및 이해를 하는지, 그에 대한 다름 사람의 생각은 어떤지를 듣는데서 시작된다. 그리고 모든 대화는 먼저 듣고 그에 대한 반응으로 말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듣기가 대화의 시작이고 핵심인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 우리가 대화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 대화가 아니라 일방적인 통보와 말하기인 경우가 많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나라에는 대화는 상실되고 말하기만 남은 상태라고 해도 엄청난 과장은 아닐지 모른다.  


우리는 대화를 하고 있나? 말하기를 하고 있나? 대화를 잘하는 법은 그 질문을 던지는데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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