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로스'적 사랑만으론 살 수 없다

사랑의 풍경. 2화

by Simon de Cyrene

가족이나 친구와의 관계에서도 '사랑'이란 표현이 쓰이기도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사랑'이란 표현은 남녀관계에서 가장 빈번하게 사용된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냐'거나 사랑은 영원하다거나 그렇지 않다는 등의 얘기들은 대부분 남녀관계와 관련된 표현들이다.


하지만 사람에 따라서 사랑은 4가지 혹은 6가지로 분류된다. 가장 많이 쓰이는 사랑의 분류 방법은 플라톤의 분류법으로 육체적 사랑을 의미하는 에로스(eros), 도덕적 사랑인 필리아(philia), 정신적 사랑인 스테르게트론(stergethron), 무조건적 사랑인 아가페(agape)로 사랑을 분류한다. 어떤 학자는 사랑을 여섯 가지로 분류해서 에로스, 루두스, 스토르게, 마니아, 프라그마, 아가페로 분류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흔히 이러한 사랑이 일도양단적으로 구분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다. 사실 '사랑'이라는 것 자체가 형이상학적인 것 아닌가? 사랑의 분류는 손에 잡히는 무엇이라기보다는 우리가 다름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느껴지는 감정, 생각, 심리적인 부분을 관계나 감정의 종류에 따라 분류한 것이다.


아니, 사실 사랑 자체가 그렇지 않나?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했을 때는 어떤 상태나 마음을 의미하나? 이는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이들은 약간의 호감만 생겨도 그것을 사랑이라고 정의하고, 어떤 이들은 상대방과 있을 때 완전한 평화를 누릴 때야 비로소 그것을 사랑이라고 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이 양극단 중간 어딘가에서 상대를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고백한다. 그 정의가 틀렸을까? 아니다. 사랑은 개인에 따라 다르게 정의될 수 있다.


우리가 가족을 사랑한다고 해서 가족으로 인해 힘든 것이 없나? 아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해서 그 관계에 아무 문제가 생기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누군가에게 에로스적인 사랑을 느낀다고 해서 에로스적인 감정이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것도 아니다. 누군가를 그렇게만 사랑하면 두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심장마비에 걸려 죽을 것이다. 어떤 인간도 항상 하이퍼 하게 흥분된 상태로 살 수 없다.


이처럼 형이상학적인 사랑을 객관화시키기 위해 현대사회의 과학은 사랑을 객관화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미국의 헬렌 피셔라는 교수는 그런 기준에서 사랑을 3단계로 구분한다고 한다. 갈망 단계인 1단계에서는 테스토스테론과 에스트로겐이라는 성호르몬이 지배하는 단계로 이는 성적 갈망의 격한 충동이 일어나는 단계라고 한다. 끌림 단계인 2단계에서는 도파민이 인간이 황홀한 느낌을 들게 하고, 아드레날린은 혈압을 높이고 가슴을 뛰게 하며 질투를 하게 만들고, 세로토닌은 평안하고 안정적인 느낌을 준다고 한다. 마지막 단계인 애착 단계에서는 애착관계를 형성하는 옥시토신과 바소프레신이라는 호르몬이 생성되고 영향을 준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도 사실 충분하지 않다. 이는 이 3단계가 단계별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은 '사랑'의 과정에서 그러한 호르몬을 다른 비율과 수준으로 경험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호르몬으로 사랑을 설명할 수는 있어도 개인에 따라 그러한 호르몬을 작용시키는 포인트가 다르기 때문에 호르몬 작용만으로 사랑을 설명할 수는 없다.


사랑은 이처럼 어렵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정의하는 감정, 마음이나 상태는 이처럼 복잡하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러한 단계들을 계속해서 오가고, 경계를 넘나들면서 사랑을 한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에로스'적인 감정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 나는 우리가 '에로스'라고 부르는 상태나 감정이 과연 사랑으로 분류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의구심이 든다. 그러한 감정과 상태는 감정적이라기보다는 욕구나 욕망적인 성격이 더 크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그렇기 때문에 성적 욕구는 통제 또는 조절하기 힘들다고 하지 않나?


물론, 난 개인적으로 그런 주장에도 반대한다. 인간이 식욕, 수면욕과 같은 원초적인 욕구를 통제하고 조절할 수 있다면 인간의 성적 욕구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이 분명히 있고, 운동 등의 방법이 이를 일정 부분 해결해 준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 아닌가?


사랑은 이처럼 복잡하고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에 어떤 정답이 있다고 하기는 매우, 매우 어렵다. 분명한 것이 있다면 남녀 간의 사랑에도 사랑의 '에로스'적인 요소 외에도 다른 사랑적인 요소가 있단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의 관계는 그런 요소들이 전반적으로 깊어질 때, 다양한 호르몬이 다양한 시점과 상황에 생성될 때 그 관계가 깊어진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우정, 가족 간의 사랑도 사랑이고 연인의 관계가 깊어지기 위해서는 그런 관계에서 발현되는 사랑은 연인 간의 관계에서도 구현되어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봤을 때 오래된 부부나 커플이 '우린 우정으로 살지'라는 말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물론, 연인이나 부부의 관계적 특성을 봤을 때 그런 사랑만 있고 에로스적인 요소를 전혀 찾아볼 수 없다면 그 관계에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에로스적인 요소의 비율이 낮다고 해서 그게 이상한 것도, 사랑이 아닌 것도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누군가와의 사랑을 얘기할 때 이런 층위를 염두에 두고, 다면적으로 접근하고, 고민해야 한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함에 있어서도 '끌린다'는 수준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상대와 있을 때 안정감도 드는지, 수용받는 느낌도 들고 적정한 애착관계도 형성되는 지를 고민해 봐야 한다.


에로스적인 사랑은 남녀 간의 사랑을 시작할 때, 혹은 우리의 성적 욕구나 욕망이 일어날 때 그 불을 해결하는 역할을 할 수는 있지만 그 관계를 유지시켜주지는 않는다. 불을 만드는 재료로 비유하자면 에로스는 번개탄이나 기름과 같은 역할을 한다. 번개탄이 없으면 불을 피울 수도 없지만 번개탄만으로는 그 불이 유지되지 않고, 불을 순간적으로 키우기 위해서는 기름을 부을 수 있고, 불을 피우는 과정에서 그러한 단계는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불을 유지시키는 것은 번개탄이나 기름이 아니라 숯이나 나무다.


불을 피우고 유지시키는데 이처럼 다양한 재료들이 필요하듯, 사랑을 시작하고 유지하는 데는 다양한 종류의 사랑이 필요하다. 에로스적인 사랑에만 집착하지 말자. 그게 전부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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