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풍경. 14화
아이를 낳지 않으려는 시대가 되었다. 현재 사회의 상황을 놓고 봤을 때 이는 사실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또 한 편으로는 책임감을 가진 사람들이 그만큼 늘어났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라고도 생각한다. 이는 나만 하더라도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갖고 싶다는 마음은 크지만, 경제적인 부분을 생각하면 현실적으로 그럴 수 있을지를 모르겠기 때문이다.
어르신들과 정치인들 중에는 그러한 결정에 대해서 이기적이라거나 국가와 사회를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근대국가에서는 국가와 사회가 개인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개인이 국가와 사회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국가와 사회가 현실적으로 출산율이 높아질 필요가 있다고 느끼면 그만큼 파격적인 지원을 해주면 된다. 그건 엄연히 말하면 개인에 대한 지원이 아니라 국가적인 필요를 위해 하는 투자에 해당한다. 그리고 나 자신도 건사할 자신이 없는 상황에서 아이를 갖지 않는 게 왜 이기적인가? 책임감이 있는 것이지.
나는 개인적으로 이러한 상황이 매우, 매우 안타깝다. 이는 단순히 '그만큼 우리 사회가 살기 힘들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아이를 갖지 않겠다고 결정하게 되는 과정에서는 사실 [누군가를 사랑할 여유가 없다]는 것이 전제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젊은 사람'들이 이기적이라고 하지만, 사실 어느 누구든지 자신부터 살고 봐야 다른 사람을 챙길 수 있는 게 현실 아닌가? 또 그렇기 때문에 자신보다 다른 사람들을 더 위하고 사랑한 사람들이 위대하다고 평가받는 것이 아닌가?
그런 지적을 하는 사람들은 이타적인 마음으로, 국가와 사회를 위해서 아이를 가졌을까? 아니다. 냉정하게 얘기해서 적지 않은 사람들은 아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아이를 갖고 싶어서, 양가 부모님이 가지라고 강요를 해서 아이를 가졌다. "딸이 태어나면 엎어 놓을 거야"라고 했던 어머니들이 적지 않았다는 것은 아이를 갖는 것이 자발적이고, 의지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란 것을 보여준다.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사실 아이를 더 갖고 싶지 않았는데 아이가 생겨서 어쩔 수 없이 낳은 경우도 있다. 나만 하더라도 부모님께서 매우 심하게 싸우셔서 어머니께서 친정에 가 계셨는데, 내가 생긴 것을 알고 난 후에 어쩔 수 없이(?) 두 분이 갈라서지 못하셨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컸다. 솔직하게 인정하자 우리 부모님 세대도 거룩한 마음에 국가와 사회를 위해서, 아이를 잘 기르고 싶어서 낳고 기른 것은 아니다.
그런데, 본래 의도와 의지는 그렇지 않더라도 아이들이 주는 선물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 어머니만 하더라도 내가 엄청나게 대든 후에 그 갈등을 봉합하는 과정에서 '네가 나한테 아무리 심하게 대하더라도 내가 너를 여전히 사랑하고 아낄 수밖에 없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내게 준 기쁨, 즐거움과 행복이 더 크기 때문'이라고 하시더라. 냉정하게 얘기하면 아직도 부모가 되어본 적이 없는 나는 본인이 갈라서려고 했던 사람과 평생을 함께 살 수밖에 없게 만든 존재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께서 그렇게 느끼셨다는 게 잘 이해되지는 않는다. 그만큼, 아이를 기르는 과정에서 느낄 수 있는 행복은 직접 경험해야만 알 수 있는 것인 듯하다.
그런데 사실 그런 부모의 마음이 가장 원초적이고, 사랑의 본질을 가장 잘 담고 있는 사랑이 아닐까? 물론, 그 사랑은 인간의 소유욕에서 시작된다. [내 아이]라는 생각에서 말이다. 부모들이 자녀를 자신 마음대로, 자신에 계획에 맞춰서 키우려고 하는 것은 자녀에 대한 부모의 마음이 소유욕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또 그 이면에는 아이를 위해서는 자신의 어떤 것이라도 희생하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부모의 마음이 있다. 상대를 나만큼, 아니 나보다도 더 아끼는 마음. 그게 사랑이 아닌가?
사실 아이를 내가 생각하는 틀에 맞춰서 키우려는 마음에는 소유욕과 사랑이 복합적으로 들어가 있다. 이는 그 마음에는 아이를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조건을 갖추게 해 주려는 마음과 동시에 그렇게 사는 것이 행복해지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동시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모가 된 사람도 본인이 경험한 것만큼 밖에 세상을 모르다 보니 그 생각이 항상 옳지는 않고, 또 아이에 따라서는 그게 답이 아닐 때도 있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아이들이 상처를 입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산을 하고 아이를 양육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은, 우리는 그 관계에서 처음으로 나 자신을 자발적으로 온전히 상대를 위해 희생하는 경험을 하기 때문이다. 사실 아이를 가져보지 않은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최우선일 수밖에 없다. 본인이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결국에는 본인의 생존과 삶이 우선인 것에 대해서 누가 뭐라고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된다. 그런데 그것을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넘어서는 것, 나보다 상대를 더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는 경험, 그것이 출산과 육아의 과정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사랑]이다.
그러한 사랑은 아마도 아이가 태중에 있는 10개월 동안 생길 것이다. 10개월이란 기간이 [기다림]을 기준으로 하면 그렇게 짧은 기간은 아니지 않나? 상대를 좋아하는 상태에서 상대가 내 마음을 10개월 후에 받아준다는 것이 보장되어 있어도 그 10개월을 기다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임신하고 출산하는 과정은 그 아이와 어머니가 10개월 간 단 한순간도 떨어져 있지 않도록 강제한다. 그뿐 아니라 어머니들은 아이를 잉태한 상태에서 아이의 건강을 위해 자신이 좋아하던 것들을 절제하고 자제하면서 아이에게 좋다고 하는 것들을 최대한 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의 얼굴에서 나의 모습이 보이면, 그 아이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제대로 된 배우자라면, 본인이 직접 그걸 경험하진 않더라도 자신의 아내가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지나갈 수 있게 최선을 다해 노력해 줄 것이고, 그래서 아이를 잉태하고 출산하는 과정은 사실 부모가 될 두 사람이 모두 상대를 위해 나를 희생하는 법을 배울 수 있는 과정이다.
그러나 [그럴 수 있는 과정]이라는 것이 [반드시 그렇게 되는 과정]은 아니다. 특히 남자들의 경우, 본인이 직접 임신을 한 상태가 아니다 보니 아내의 상황과 마음을 헤아리려 노력하지 않을 때가 많고, 여자들의 경우에도 원하지 않은 임신을 한 경우 아이를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사실 10개월이란 기간은 두 사람이 처음에는 그것을 모르다가도 시간이 지나면서 알아갈 수 있는 기회의 시간이기도 하다. 다만, 그 사람의 성장환경에 따라 아이와 임신기간에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어쨌든 아이를 위해 최선을 다하기 위한 노력을 한다. 그건 대부분의 경우 어떤 거룩한 경우가 아니라 [내 아이]란 소유적인 의식 때문이다. 하지만 그 아이는 크면 클수록 본인 마음대로 되지 않고, 때로는 그 과정에서 내가 아이에게 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면서도 또 아이이기 때문에, 순수하고 순진한 아이이기 때문에 적지 않은 부모들은 아이를 위해 희생을 하거나 지게 되고, 그 과정에서 부모들은 희생하는 법을 배운다. 그리고 그러한 희생은 사실 사랑의 핵심이다. 희생이란 상대를 위해 내 것을 내놓는 것이고, 상대를 위해 내 것을 내놓기 위해서는 상대를 나보다 더 소중하게 여겨야 하니까.
출산, 육아와 양육의 과정은 이처럼 진짜 사랑을, 사랑의 본질을 경험할 수 있는 과정이다. 그 과정이 쉽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인데, 이는 출산, 육아와 양육의 과정에는 자기희생이 반드시 동반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자기희생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이 자신에게 주는 기쁨과 즐거움이 더 크다는 부모님들의 증언(?)은 그들이 그 과정에서 나를 위하고, 나만을 챙기는 것 이상의 즐거움과 기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아이들의 순수함은 부모에게도 영향을 주고, 부모는 자신의 아이를 위해서라도 사회적인 문제에 더 관심을 갖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하기 시작한다. 인간 사회는, 그러한 노력들을 통해서 조금씩, 조금씩 나아질 수 있다.
이기적인 사람에게 아무리 이타적이 되라고 요구를 해도 그 사람이 그렇게 될 확률은 극히 드물 것이다. 그런데 출산, 육아와 양육의 과정은 인간의 그러한 이기심과 소유욕을 어느 정도는 이타심과 사랑으로 바꿔 놓는 과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같은 사람이라면, 아이를 낳아서 길러 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는 상대적으로 이타적이고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알게 될 것이란 것이다. 물론, 그 정도의 차이와 개인의 차이는 있을 수밖에 없고, 전혀 그렇게 되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그렇단 것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현실이 안타깝다. 출산, 육아와 아이를 기르는 과정이 이처럼 개인이 또 다른 차원의 경험과 사랑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건강하게 기르기 힘든 사회적, 개인적 환경들 때문에 그 경험을 포기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현실이, 사회와 국가적인 차원에서도 현실적으로 인구가 줄어드는 것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한 출산에 대한 지원이 제대로, 충분히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앞에서도 썼지만 그러한 지원은 사실 개인에 대한 지원이 아니라 국가의 미래를 위한 투자다. 아이를 더 잘 기를 수 있고, 아이들이 잘 먹고 잘 교육받을 수 있도록 지원을 하고 인프라를 확충하는 것도 사실은 국가를 위한 투자다. 그 과정에서 상처를 덜 받고,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줄 알며, 좋은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들이 늘어나면 그만큼 국가경쟁력에도 도움이 될 것이 아닌가?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아이를 낳는다고 한들, 부모들은 아이에게 '너만 아니었으면 우리 먹고사는데 아무 문제없는데'라던가 '네가 원하는 거 해줄 수가 없다'는 거절을 반복적으로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확률적으로 상처를 더 많이 받고, 그 상처로 인해 또 다른 사회적 문제를 만들 확률이 높을 텐데, 그건 사회적인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비용을 발생시키는 것이 아닌가? 사실 아이를 온전히 사랑해주는 법을 모르는, 아이를 방치하는 부모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스펙이 아니라 그들의 성장과정에서 그들이 겪은 경험들을 추적하면 대부분이 어떤 형태로든 왜곡된 사랑이나 상처를 경험한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은 이를 보여준다.
따라서 제대로 된 지원은 하지 않으면서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말만 반복하는 건 진정으로 국가와 사회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아이를 낳아서 기를 자신이 없어서 출산과 육아를 포기함으로써 가장 큰 손해와 피해를 보는 건 사실 국가가 아니라 출산과 육아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은 사람들이다. 이는 사실 출산과 육아는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사랑'을 배울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아이를 낳아서 기르고 있는 부모들은 기억해야 한다. 자신의 아이들은 자신에게 사랑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준 선물이고, 자신이 아이에게 주는 것보다 아이들이 자신에게 주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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