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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mon de Cyrene Aug 20. 2022

경제영역에 대한 국가 개입에 대한 생각

돈의 원리. 2화

앞의 글에서는 자본주의와 자유주의는 '개인'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이념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오롯이 '개인'에만 초점을 맞춘 자유주의가 얼마나 다른 사람들을 착취하고 파괴할 수 있는 역사적으로 입증되었다. 과거 영국에서 어린아이들이 작다는 이유로 굴뚝 안에 들어가 청소를 하게 하고, 아이들의 손이 작아 바느질을 더 잘할 수 있다는 이유로 90년대까지 개발도상국의 아이들이 축구공을 만들게 한 브랜드와 2007년까지도 어린이를 고용해 생산비를 낮춘 글로벌 의류 브랜드 등의 사례는 인간이 돈에 대한 욕망 앞에서 얼마나 무서워질 수 있는 지를 보여줬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런 악순환은 반복되면 모두를 공멸의 길로 내몰 수밖에 없다. 이는 그렇게 노동을 착취하게 되면 사회의 극빈층은 그만큼 소비할 수 있는 능력이 떨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극빈층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매우 기본적인 의류와 극소량의 음식만 사 먹을 수 있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기본적인 의류와 음식 외에 다른 재화는 살 수 있는 사람이 없어질 것이기 때문에 그 재화를 생산하던 사람들도 하나, 둘씩 파산하기 시작할 것이다.


생각해보자. 먹을 게 정말 없는 극빈층이 과일을 사 먹을까? 아이스크림이나 과자를 사 먹을까? 소고기를 사 먹을 수 있을까? 연어처럼 수입되는 생선들을 사 먹을까? 아니다. 그들은 가장 저렴하면서 생활에 반드시 필요한 음식만 사 먹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극빈층이 구매할 수 없는 재화들을 판매하던 사람들은 폐업을 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고, 그들도 결국은 극빈층으로 전락하게 될 수밖에 없다. 


외부의 개입 없이 이 패턴이 반복되면 될수록 돈을 많이 가진 사람들이 더 많은 돈을 벌 수밖에 없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 구조의 특징상 돈을 가진 사람들이 투자를 하고, 대량 생산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그 사회 또는 국가에는 실질적인 독점구조가 형성될 것이고, 그렇게 독점구조가 형성되면 회사원들의 임금도 낮아질 수밖에 없다. 갈 수 있는 직장이 많지 않아 지면 그만큼 돈을 조금 줘도 사람들은 취업하려 할 테니 그렇다면 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임금을 최대한 낮춰야 하기 때문에.


그런데 이 양극화가 극대화되면 될수록, 극빈층의 수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 사회는 혼탁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 첫 번째 이유는 극빈층 사이에서 생존하기 위한 전쟁이 벌어지면서 각종 범죄가 증가할 확률이 높아지고, 두 번째 이유는 그러한 극빈층들을 결집할 수 있는 구심점이 생기면 그들은 자본을 독점하고 있는 자들에 대항하는 혁명을 시도할 확률이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잃을 게 없는 사람들은 언제든지 과격해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여기에 더해서 양극화가 극대화되면 될수록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새롭게 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없게 되기 때문에 무기력해지고, 생산적인 삶을 살 의지를 잃게 된다. 


조선 말기에 일어난 여러 현상들은 그런 패턴을 잘 보여준다. 조선 말기에는 관료들이 부정부패가 엄청나게 심했다고 한다. 뇌물을 받아서 봐주는 수준이 아니라 관료들이 부자들을 일단 감옥에 가둔 후에 돈을 내놓으라고 할 정도였다고 하니 조선 말기의 관료들은 관료인지 강도인지 모르겠다. 조선 말기에 대한 외국인들의 기록 중에 '조선인들은 게으르고, 일하지 않고 늘 술에 취해 있다'는 식의 기록들이 있는 것은 열심히 일해도 돌아오는 것 없이 착취당하는 사회에서 삶의 끈을 놓아버린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의 부작용에 반발하여 일어난 사회주의 운동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사실 비슷한 이유 때문이다. 내가 열심히 일을 하더라도 그렇지 않은 사람들만큼 밖에 가져갈 수밖에 없으니 사람들이 아예 일을 덜 하거나 안 하기 시작했고, 그렇다 보니 사회주의 국가들은 몰락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 극단적인 자유주의와 사회주의가 실패한 이론으로 남은 것도 그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욕구와 욕망을 통해서 규모와 질적인 성장을 가져가는 자유주의를 기초로 하되 그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수준으로 정부가 개입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극단적인 자유주의의 폐해가 어디에 있었나? 가장 큰 폐해는 극빈층의 구매력이 극단적으로 떨어진다는 데 있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돌도록 하기 위해서는 극빈층도 어느 정도 이상의 생활은 할 수 있는 경제력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을 착취하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노동자들이 어느 정도 이상의 부는 축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여기에 더해서 자본가들이 시장을 마음대로 움직이게 하지 못하기 위해서 독점을 허용하지 않아야 한다.


국가가 사회보장제도와 사회보험, 최저임금제를 운영하고 시장의 독점을 허용하지 않는 것은 이러한 기능을 하기 위함이다. 모든 것을 개인과 시장에만 맡기면 그게 장기적으로는 '국가'라는 공동체에 피해가 되기 때문에.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사람들이 '퍼주기'라고 말하는 사회보장제도는 경제생활이 힘든 사람들을 '지원'하는 역할도 하지만 사회적으로는 시장에 어느 정도 생기를 불어넣는 역할도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숨을 쉴 수 있게 되면 경제활동을 하겠다는 의지를 가질 수 있게 되기 때문에 '기본적인 생활'은 할 수 있도록 보장해 주는 것은 '일할 의지'를 유지해 주는 기능도 할 수 있다.


물론, 국가에서 보장해주는 내용과 범위가 과도해지면 사람들은 오히려 일할 의지를 상실하게 될 수도 있다. 그 사실은 많은 사회주의권 국가들이 이미 입증한 바가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지점에서 사회주의권 국가에서 문제가 '퍼주기'였는지, 아니면 '열심히 해도 다 마찬가지야'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구조였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만약 전자가 문제였다면 사회보장제도를 항상 최소한으로 유지해야 하지만 만약 후자가 문제였다면 그런 현상은 양극화가 심해져 아무리 노력해도 돈을 벌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후자가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생각해보자. 많이 퍼준다고 해서 사람들이 근근이 먹고살 수 있는 수준에 만족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건 인간의 욕구와 욕망을 과소평가한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기본적으로 많이 벌고 잘 먹고, 잘 살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있다. 기회가 있다고 생각하는 한 사람들은 더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열심히 일할 것이다. 그렇다면 핵심은 '기회'에 있고, 그런 기회는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알아야 잡을 수 있다. 


돈을 잘 벌기 위해서는 무엇을 알아야 할까? 돈을 잘 벌기 위해서는 우선 사회구조를 이해하고 그 안에서 어떤 일을 하면 어느 정도의 돈을 벌 수 있는 지를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가서 사람과 사회를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는데 이는 내가 돈을 번다는 것은 결국 누군가의 돈을 빼서 내 주머니에 옮겨 넣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지갑을 열까?'에 대한 고민은 사람에 대한 이해에서 시작된다. 


사람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인문학이고, 사회구조에 대한 이해를 돕는 게 사회과학이다. 교육에서 인문. 사회과학이 중요한 것은 이 때문이고, '공교육'을 국가에서 보장해 줘야 하는 것은 학생들이 그런 이해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동등하게 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를 포함한 대부분 학생들이 자신이 싫어하는 과목, 나의 경우에는 특히 수학을 왜 배워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런 과목들은 사실 '내용'보다도 문제를 풀면서 하게 되는 '사고 과정' 자체가 사고하는 훈련이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교육'이 중요한 것은 이미 어느 정도 구조화된 사회에 아이들이 배출되었을 때 경제활동을 하고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초'가 형성되어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에는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공교육 제도가 실질적으로 입시학원으로 전락한 현실은 안타깝지만 공교육 제도는 최대한 기회를 평등하게 주기 위해서라도 유지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공교육 제도 역시 국가가 경제영역에 간접적으로 개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체제 안에서 개인이 살아남는 문제는 이처럼 복잡한 요인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국가가 '어느 정도 개입해도 되는지'는 간단하게 판단할 문제가 아니고 사람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 그 관점에 따라 사람들의 생각은 '다를' 수 있고, 또 그렇기 때문에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그게 반드시 '틀린' 것은 아니다. 다양한 관점이 있는 건 좋은 것이고, 타협점은 치열한 논의를 통해 찾아가야 할 성격의 것이지 '도 아니면 모'식으로 결정할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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