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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mon de Cyrene Jan 21. 2024

사랑과 이타심의 상관관계

연애나 결혼 초기에 상대가 자신의 말을 잘 듣고, 공감을 잘해준다고 해서 그게 상대방의 진짜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게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일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연애나 결혼 초기에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상대방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공감하고 이야기를 잘 들어줄 수 있다. 데이트 폭력의 피해자들이 어리석고 뭘 몰라서 가해자들을 만났을까? 아니다. 데이트 폭력의 가해자들도 연애나 결혼 초기에는 상대방을 자신의 것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상대가 원하는 것을 줬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소유욕은 상대를 자신 마음대로 통제하고 싶게 만들면서 폭력으로 이어졌을 확률이 높다. 


연애나 결혼생활을 오래 한 사람들은 상대가 '변했다'라고 하지만 사실 상대는 변한 것이 아니다. 상대는 그 사람을 만날 때 상대를 소유하고, 그 소유하는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가면을 쓰고 행동했던 것이고 시간이 지나서 그 사람이 보는 상대의 모습이 상대의 진짜 모습이다. 그렇게 상대에게 맞추는 것은 절대로 지속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상대가 아무리 본인에게 잘해주더라도 그게 그 사람의 다른 관계에서와 큰 차이를 보인다면, 그 사람은 일단 경계를 하고 봐야 한다. 이는 그 사람의 눈에서 콩깍지까지 떨어지고 나면 그는 다른 모습을 보여줄 것이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연애에서 이러한 단계는 지나갈 수밖에 없다. 모든 사람들은 어느 정도는 이기적이기 때문에.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인간이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인간은 오직 자신과 평생을 함께 살기 때문이다. 자신은 본인과 항상 함께 있지만 다른 사람의 상황에 처해 보지 않았다 보니 자신과 어느 정도 이상 다른 경험이 축적되어 있는 사람에 대한 이해도는 부족할 수밖에 없고, 그렇다 보니 우리는 누구나 어느 정도는 자기중심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나마, 평균적으로는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조금은 더 포용적일 수 있는 확률이 조금은 더 높은 유일한 이유는 더 오래 산 사람은 조금 더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다양한 부류의 사람을 만나봤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평균의 함정이 있는 것은 우리가 평생 살면서 만나는 사람들의 부류는 우리의 환경의 영향을 받고, 그러다 보면 우리 주위에는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이 많으며, 주위에 그런 사람들이 오랫동안 많으면 자기 확신이 더 강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나이가 많이 들었지만 다양한 경험을 하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보지 않은 사람들은 오히려 젊은 사람들보다 더 자기중심적인 경우도 분명히 있다. 


이렇듯 일정 수준으로는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이 이타심을 배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다른 사람을 위해 하는 것이 오히려 자신에게 더 큰 기쁨과 행복을 준다는 것을 경험하는 방법 밖에 없다. 소유가 강조되는 현대사회에서 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소리인가? 받는 것보다 베푸는 게 더 크고 많은 기쁨과 행복을 가져준다고? 이는 말도 안 되는 소리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런데 그런 경험을 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그게 사실이라는 것을. 


사람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창조론적 관점에서는 인간은 사랑하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고, 진화론적 관점에서는 친절을 베푸는 것이 자신을 보호하는데 유익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습득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둘 중 어느 견해가 옳은 지는 중요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인간은 무엇인가를 소유할 때보다 사실 누군가를 도와주고, 자신이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존재라고 느낄 때 더 행복하고 즐겁단 것이다. 


사실 인간은 태어났을 때부터 그러한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어린아이에게 엄마, 아빠가 다쳤다고 하면 아이들은 쫓아가서 상처부위를 호호 불어주기도 하고, 아이들은 돈을 많이 벌어서 엄마, 아빠에게 집을 사주겠다고 하지 않나? 그랬던 아이들도 현대사회에서는 소유라는 개념을 형성하기 시작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경쟁자로 여기고, 주기보다는 받는 데 초점을 맞추고 의사결정을 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진짜로 순수하게 누군가에게 주는 것 자체로 행복을 느껴본 사람들은 안다.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무엇인가를 선물해 줬을 때, 내가 했던 행동이나 말이 상대에게 큰 위로나 도움이 됐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느껴지는 기쁨과 행복, 안도감이 내가 무엇인가를 받았을 때의 그것보다 크다는 것을. 


그리고 사람들은 남녀관계에서 연애를 하면서 처음에는 상대를 소유하기 위해 상대가 원하는 대로 맞춰주지만 그 과정에서 상대를 행복하고 기쁘게 해 줬을 때 느껴지는 행복, 기쁨과 즐거움을 깨닫고 배우게 된다. 그걸 깨닫고 경험한 사람들은 그 뒤로는 자신의 그 행복, 기쁨과 즐거움 때문에라도 상대방에게 맞춰서 말하거나 선물하고, 대하기 위해 노력하게 되는데 진정한 의미의 사랑은 그때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인간은 행복, 기쁨과 즐거움이라는 무형적인 것을 위해서 형태가 있는 행동이나 선물을 하는 것은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게 되기 때문이다. 다른 관계에서는 절대로 나타나지 않을 모습이 보이는 그 순간이야말로 사랑이 시작됐다고 하는 게 맞지 않을까? 


말은 쉽지만 이 둘을 구분하는 건 굉장히 어렵다. 이는 우리가 주는 것의 행복, 기쁨과 즐거움을 알게 된 후에도 때로는 상대를 내 마음대로 하기 위해서 표면적으로는 이타적으로 보이는 행동들을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기적이고 소유욕으로라도 이타적인 행동을 반복적으로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습관적으로라도 그런 행동을 하다 보면 거기에 익숙해지고, 그러다 보면 이타적인 게 주는 기쁨, 행복과 즐거움을 알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타적인 행동을 하는 게 왜 기쁨, 행복과 즐거움을 주는 지를 고민해 본 적이 있는데, 추측컨대 그건 어쩌면 우리가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존재라는 사실이 우리에게 존재의 의미와 이유를 주기 때문은 아닐까 싶었다. 사회적인 동물은 인간은 혼자서 지내지는 못하고 감정적인 교류도 필요하고 '내 편'인 사람이 필요한데 내가 누군가에게 좋은, 행복한, 의미 있는 일을 했다는 건 나의 존재가 의미가 있다는 뜻이기 때문에 우리는 어쩌면 이타적인 행동을 하고 그에 대한 인정을 받을 때 무엇인가를 받았을 때보다 더 큰 행복,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타적인 행동의 가장 큰 특징이 뭘까? 그건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게 필요하거나 상대에게 원하는 것을 주는 것이다. 스쳐 지나가면서 '이거 예쁘다'거나 '이거 갖고 싶다'라고 했는데 그걸 기억하고 선물해 주는 것에 감동하고, 우리가 사소한 것에 큰 감동을 받기도 하는 것은 상대가 항상 나를 지켜보고 위하고 있는 것이 그 작은 것들에서 느껴지기 때문이다. 


반면에 명품백과 같은 고가의 선물이 오히려 반감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는데, 그건 명품백과 같은 고가의 선물들은 그 사람에게 '맞춤형'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명품백을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묻기도 하지만, 사실 많은 경우 명품백을 받고 좋아하는 건 그걸 선물하는 사람의 마음 때문이 아니라 그 백 자체를 소유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그 마음과 초점이 상대의 마음이 아니라 결국 소유욕에서 비롯된 것이란 뜻이다. '내가 언제 명품백 사달랬어!'라는 말은 명품백 자체가 싫다는 게 아니라 선물을 선택하는 과정에 이타적인 마음이 없었다는 것에 대한 실망감의 표시다. 


그렇다고 해서 명품백을 선물했다고 해서 그 안에 이타심이 전혀 없었다고 할 수도 없다. 누군가에게 명품백은 그저 소유욕의 대상일 수도 있지만, 누군가는 자신이 정말 소중하는 사람에게 좋은 가방을 선물해 주고 싶어서 자신이 돈을 아끼고 또 아껴서 그 백을 샀을 수도 있다. 후자의 경우에는 그 사람의 마음과 결정에 이타심이 없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명품백을 선물해 줌으로써 상대가 자신에게 얼마나 가치와 의미가 있는 사람인지를 표현하려고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이 처음부터 자신의 마음을 알고 이타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실망하거나 그로 인해 상대에게 면박을 줄 필요도 없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그것도 결코 이타적인 모습이 아니지 않나? 만약 상대가 무엇인가를 선물하거나 본인에게 어떤 행동을 했을 때 그 과정에 상대가 자신을 위하는 마음이 있다면, 우리는 그 마음을 알아봐 줄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상대의 마음을 알아봐 줄 이타심이 있다면 우리는 그 마음과 선물, 행동은 고맙게 받으면서도 자신 안에 어떤 불편한 마음이 있는 지를 상대에게 차분하게 설명함으로써 상대가 같은 실수를 다음엔 하지 않을 수 있도록 하지 않을까? 


이처럼 이타심과 사랑의 문제는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만으로 판단하고 평가할 수가 없기 때문에 복잡하고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랑의 문제에 있어서 이타심을 놓으면 안 되는 이유는 그 이타심이 있는 관계가 아니라면 연인이나 부부의 관계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이타심으로 포장된 소유욕만 갖고 있고 서로에 대해 소유욕이 없는 어느 정도의 '순수한' 이타심이 없이 연애나 결혼을 한다면 언젠가는 헤어질 수밖에 없다. 이는 두 사람의 이기심이 언젠가는 수면 위로 떠올라 부딪힐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랑을 위대하게 만드는 건,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이 그 한계를 넘어서서 이타적으로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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