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imon de Cyrene Apr 25. 2024

내가 선택한 '태어남'이 아니다

'내가 너를 낳아주고 키워줬는데!'


어렸을 때 부모님께 혼나는 과정에서 이 말을 들을 때면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닌데...' 그리고 살아가면서 고통스럽고 힘들 때면 생각했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지금은 하고 싶은 게 너무 많기 때문에 너무 살고 싶어서 문제일 정도이지만 진심으로 죽고 싶었던 시절에는 내가 선택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죽는 건 또 두려운 나의 마음이 원망스러웠다. 


사람들은 '사는 것은 선(善)이고, 죽는 것은 악(惡)'이라고 생각하는 데 과연 그러한가? 우리 살면서 기쁘고, 행복하며, 즐거운 순간과 그렇지 않은 순간들을 모아보면 어떤 것이 총합이 더 클까?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후자가 더 클 것이다. 당신의 하루를 생각해 보자. 우리는 대부분 아침에 일어나서 회사에 출근하거나 학교에 가서 최소한 5시간 이상, 길면 12시간 이상 그 공간에서 보내다 집에 돌아오는 삶을 산다. 그 과정에서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보단 하기 싫음에도 불구하고 견디고 참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길다.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사는 것이 반드시 더 좋은 것이라고 하긴 힘들다. 


그래서 나는 내가 계속 실패를 할 때 진지하고 이성적으로 죽음을 선택하고 싶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행복하고, 즐겁고, 기쁘기 위해서는 그만큼 힘든 시간을 견디고 버텨야 하는데 효율로만 따지면 그 패턴이 계속되어서 불행한 시간의 총합을 늘려나가는 것보단 그 순간 삶을 끊어내는 게 효율적인 삶 같았다. 내가 그런 선택을 하지 못한 것은, 순전히 가족 때문이었다. 


술도 잘 마시지 못하는 주제에, 맥주 한 캔 마시면 세상이 빙빙 돌아가고 얼굴에 피가 쏠려 어찌할 바를 모르는 체질을 갖고 있으면서 맥주 한 캔을 마시고 원룸에서 굴러다니며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와중에, 자취방에서 걸어서 30분 거리도 안 되는 한강대교에 가서 뛰어내릴지, 부엌에 있는 칼을 선택해야 할지 생각하던 중에 부모님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리더라. 내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면 나는 그것으로 끝나겠지만, 그 뒤에 살아남은 부모님의 삶이 어떨지를 생각하니 도저히 그런 선택은 하지 못하겠더라.


내 가족은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고 나서야 내가 그런 상태였고, 그런 생각을 수년간 하면서 버텼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내가 그런 말을 입 밖에, 가족에게 꺼낼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말을 꺼낸 시점에 나는 너무 살고 싶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생각이 바뀌었냐고? 내가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 있더라. 내가 행복과 즐거움, 그리고 고통을 계산하는 방식은 잘못되어 있었다. 나는 물리적으로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과 고통스럽고 힘든 시간을 수치적으로 계산을 했는데, 사실 우리네 삶은 그렇게 일도양단적으로 잘라서 얘기할 수가 없다. 우리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면서도 행복할 수도 있고 그 과정에 의미가 부여될 수도 있다. 그리고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이 짧더라도 그 순간에 느껴지는 행복감과 즐거움이 그때까지 가는 고통과 힘듦을 모두 상쇄할 정도로 클 수도 있다. 나는 모든 것을 자본주의적으로, 정량적으로만 생각을 했는데 삶이란 게 그런 게 아니더라. 


내가 그렇게 힘든 시간을 보냈던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이는 그때의 생각들 덕분에 나는 지금, 이 순간 누구보다도 살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 그런 생각들을 했었기 때문에 나는 역설적으로 내게 주어진 모든 것, 하나하나가 감사하다. 이제는 연세 드신 부모님의 모습을 보면서 부모님께서 언제까지 내 옆에 있어주실지 모르겠단 생각에 조금이라도 잘해야겠단 생각도 하고, 내가 살아온 약 40년 정도의 시간이 얼마나 빨리 지나왔는지를 돌아보며 순간, 순간에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되는데 내가 그렇게 생각하도록 채찍질하는 건, 내가 죽은 뒤에는 이 모든 경험과 생각들이 증발할 것이라는 생각들이다.


우리가 선택한 삶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또 다르게 생각해 보면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건 우리가 선택한 것이다. 내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건 아니지만, 우리가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있는 건 사실 우리의 선택이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차피 지금 살고 있는 동안에는 굳이 '누가 나를 낳아달랬어!'라고 불평, 불만을 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살기로 선택했다면, 우린 그 안에서 최대한 행복하고 즐겁게, 의미와 가치를 느끼는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면 된다. 어차피 살기로 선택한 것이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를 최대한 행복하고 즐겁게, 의미와 가치를 느끼게 만들어 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을 해봐야 한다. 혹자는 욜로(YOLO-You Only Live Once)를 외쳤는데, 그렇게 매체를 가득 채우던 그 표현은 이제 찾아보기가 힘들다. 왜 그럴까? 그건 아마도 '욜로'의 대상은 대부분이 순간적인 쾌락과 즐거움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데, 그렇게 욜로를 추구하는 삶을 통해 누려지는 행복과 즐거움이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사람들이 경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우리가 돈을 많이 벌면, 사회적으로 성공하면, 우리가 목표로 한 무엇인가를 이루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대부분 사람들이 그러는 것은 대부분 사람들이 자신이 생각하는 기준의 성공과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것을 이룬 사람들을 한 번 살펴보자. 그들은 정말 행복한가? 그들은 충분히 만족하며 완벽한 삶을 살고 있는가? 


운이 좋게도 자신이 목표했던 바를 이룬 사람들은 대부분이 그 순간에 느껴졌던 허무함에 대해 말한다. 최근에 내가 본 넷플릭스의 한 다큐에서는 미슐랭 3 스타를 받는 것을 넘어 세계 최고의 레스토랑으로 선정되었던 식당의 오너가 그 순간 느꼈던 공허함에 대해 말하더라. 그러면서 그는 정상의 자리에 섰을 때야 비로소 본인이 만들었던 음식들의 식재료가 지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가 보였고, 그 영향을 받아 식당을 비건으로 전환시켰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말하는 즐거움도 필요하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은 곳에 가고, 순간순간 신나는 경험들은 분명 우리를 순간적으로 덜 불행하게 만들어 준다. 하지만 그게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건 너무 많은 사람들의 삶이 보여준다. 그렇다면 우리의 지속가능한 즐거움과 행복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그렇게 지속가능한 즐거움과 행복의 시작점은 사실 가족이다. 우리는 어떤 가정환경에서, 어떻게 성장했는지에 따라 즐거움과 행복을 다르게 인식한다. 그리고 어렸을 때 입력된 공식을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재료로 자신 나름의 즐거움과 행복을 찾아 인생이란 여정에 나선다. 어렸을 때의 경험에 따라 우리는 때로는 그 경험을 벗어버리기 위해 발버둥 치고, 때로는 그 경험에 집착하기도 하는데, 우리의 무의식의 영역은 우리가 성인이 되어서도 어렸을 때의 경험의 지배를 받는다. 우리가 그 공식과 경험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꽤나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왕 사는 거, 조금이라도 행복하고 즐겁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 이 시리즈는 우리 모두가 한 번쯤은 그런 고민을 해보면 좋겠고, 우리의 가족으로부터 받은 부정적인 경험은 버리고 그 영역을 다른 경험을 채우는 시작점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당연히 내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내가 그렇게 죽고 싶어 하게 된 것도 사실은 어렸을 때, 우리 가족 안에서 심어진 것들의 결과였더라. 이제 그 영향으로부터는 자유로워진 것 같아서, 그 경험을 나누고 싶다.  

이전 01화 프롤로그_가족의 탄생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