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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mon de Cyrene May 05. 2024

대기번호 1번, 내 자리는 없었다

로스쿨 매우 초창기에 로스쿨에 갔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지금의 기준으로는 오히려 나이가 있는 편일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로스쿨에 갈 당시만 해도 아직 20대 후반인 나는 중간 정도의 적정하거나 오히려 어린 편에 속했다. 하지만 나는 치열한 로스쿨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고, 3학년 여름에 채용을 전제로 한 인턴을 경험하며 '내가 과연 이런 삶을 살기 위해 그 회사를 그만뒀나?'라는 회의감이 들었다. 결국은 언젠가 영업을 뛰거나 회사원이 되어야 하는 삶. 그게 변호사 자격증의 끝에 있음을 알게 된 뒤 생각이 많아졌다. 이럴 거면 내가 왜 그 높은 연봉을 주는 회사를 그만뒀지... 싶은 생각이 가득한 상태로 로스쿨 3학년 2학기를 보냈다. 


애초에 로스쿨 공부는 내게 맞지 않았다. 학부 때도 시험을 위한 공부가 내게 맞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외무고시 쪽은 쳐다도 보지 않았다. 암기하고, 경쟁해서 등수 안에 드는 것보단 내가 하고 싶은 것, 좋아하는 것을 하는 편이었다. 그리고 항상, 인생 어느 시점에든 내가 하고 싶고 좋아하는 것이 명확한 편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결정들이 꼬리를 물고 물어 나를 일반대학원으로 이끌었다. 학부시절, 아집 강하고 너무 보잘것없어 보이던 대학원생 형, 누나들을 보며 한숨을 쉴 때만 해도 나도 몰랐다. 내가 그런 모습으로 30대를 보낼 것이란 사실을 말이다. 


애초에 변호사로 먹고 살 생각은 없었다. 그러면 왜 계속 합격하지 못하고 몸에 맞지 않는 옷인 변호사시험 준비를 계속했냐고? 교수님들의 조언 때문이었다. 앞으로는 학교로 가려고 해도 반드시 라이선스가 있다는 조언을 나는 흘려듣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대학원에 다니고,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파트타임 일과 조교일을 하면서 일반대학원에 다녔고, 매년 9월 정도가 되어서야 변호사시험 준비에 일정 수준 이상 시간을 쓰면서 계속 불합격이란 결과를 받아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대학원 수업은 너무 재미있었다. 경쟁하기 위해 암기해서 치열하게 내가 아는 것을 최대한, 주어진 틀에 써내야 했던 로스쿨 생활과 달리 일반대학원 수업에선 자유롭게 상상하고 주장하는 게 가능했다. 그 과정에서 내가 얼마나 모르는 게 많은지만 깨닫게 되었고, 교수님들께는 시시때때로 깨졌지만 지금 돌이켜 봐도 그때 나는 정말 가장 재미있고 즐겁게 공부를 했다. 공부를 하는 게 행복했던 건 그 때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법학, 그것도 내가 전공하는 법은 내게 너무 잘 맞았고, 내가 공부하고, 고민해서 나의 생각을 정리해서 세상에 내놓는 것이 너무 행복했다. 


그래서 마지막 변호사시험에 불합격이란 결과를 받자마자 박사학위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빨리 박사학위를 받아야 일단 뭐라도 해서 먹고살 수 있을 테니까. 내 로스쿨 동기들은 애초에 억대 연봉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회사 동기들도 억대 연봉을 받으며 결혼하고, (비록 대출은 껴 있지만) 집도 사고, 차는 애초에 오래전에 샀는데 나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인 것도 비참했다. 그래서 덜 비참해지고 싶어서, 세상에 발을 빨리 내딛고 싶어서 열심히, 정말 열심히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 


지도교수님께선 항상 그러셨다. 논문은 결국 본인이 혼자 쓰는 것이라고. 그렇다. 그렇게 내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 그 과정에서 겪은 상황과 마음 따위는 한 켠으로 미뤄놓자. 이 시리즈는 박사과정의 애환과 아픔, 고통에 대한 게 아니니까. 그냥 그런 게 있었고, 우여곡절 끝에 나는 '박사'가 되었다. 사실 지금도 그 표현이 이상하다. 우린 학부를 졸업해도 스스로를 '학사'라고 부르지 않고, 석사학위를 받은 사람들도 '석사'라고 하지 않는데 왜 박사들만 '박사'라고 부르는지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여하튼 나는 4학기, 총 8번의 심사를 거친 끝에 발음하기도 힘든 '법학박사'가 되었다. 


박사학위 논문을 쓰는 동안 단 한 번도 '뭘 해서 먹고살지?'에 대한 고민을 한 적이 없었다. 그저 내 학위논문을 정말 잘, 내가 쓰고 싶은 주제로 잘 쓰고 싶단 생각이 나를 지배했고, 빨리 학위를 받아야 한단 생각만 있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어떻게 그랬나 싶을 정도로. 잘 나가는 대기업에서 첫 사회생활도 했고, 학위논문 심사를 받는 과정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심사를 받은 마지막 학기의 폴더에는 '마지막'이라고 이름을 해놓고 박사를 수료로 끝내고 다른 일을 할 각오까지 했으면서 어떻게, 왜 나는 그 뒤를 생각해보지 않았을까?


그건 아마도 내가 박사학위를 받고 살아가는 전형적인 삶들을 그렇게 동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교수님과 국책연구원이나 정부 연구용역 과제를 하면서 나는 국책연구원으로 사는 삶이 회사원의 삶과 크게 다를 게 없다는 것을 알았고, 교수님 조교를 오래 하면서 대학원이 실질적으로 말라버린 인문계 학과의 교수로 사는 게 그렇게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 안에서의 정치를 직간접적으로 보고, 평생 공부만 하신 분들이 모인 집단이 얼마나 완벽할 수 없는 지를 보면서 박사과정을 지냈다 보니 그 안에 발을 들일 엄두가 나지 않더라. 


그런데 나는 그냥, 덜컥, 박사가 되어 버렸다. 박사과정을 수료로 끝내면 계속 남을 생각도 했던 친한 동생이 운영하는 디지털 마케팅 회사에서도 나온 상태였다. 뭔가 학위를 갖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 


그때, 정말 인생의 가장 어두운 시절에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 들더라. 그때는 너무 고통스럽고 힘이 들어서 술이 당기고, 극단적인 생각도 들었는데 버스를 타고 귀가하는 길에 갑자기 온몸과 마음이 차가워지면서 '인생 아무것도 없네'란 생각이 드는 것이 아닌가. 정말 위험한 상태라는 것을 깨닫고, 그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친한 형에게 전화를 걸고, 수 십 분을 통화하고 나서야 나는 괜찮아졌다. 


고민이 많았다. 연구소도 가고 싶지 않고, 학교는 자리도 쉽게 안 나지만 내가 갈 수 있는 실적이 안 됐기 때문에. 그렇게 한 학기가 지나 여름이 됐고, 나는 '일단 지원이나 해보자'는 생각에 곳곳에서 뜨는 강사 자리에 열심히 지원했다. 그 누구의 도움이나 조언도 없이, 맨 땅에 헤딩하듯이 여기저기 닥치는 대로, 내 전공으로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곳에 지원을 했고 내가 얻은 결과는 대기번호 1번 두 개. 


대학입시였다면 무조건 추가합격이 됐겠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대학강사 자리는 그렇지 않다는 걸. 강사법이 시행되고는 있었지만 강사자리는 대부분 인연과 소개로 들어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대기번호 1번은 곧 불합격임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사이클을 한 번 돌고 나니 다시는 강사로 어딘가에 지원하고 싶지가 않더라. 지도교수님도 그런 걸 챙기고, 알아보고, 밀어주는 스타일도 아니시니 더더욱.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그 뒤에 내가 일하던 마케팅 대행사 대표인 동생이 혹시 아예 정규직으로 들어올 수 있는지 물어봤고, 그전 해에 우연히 기획에만 참여했던 드라마가 공중파에 편성이 됐다. 일단 먹고살아야 했기에 나는 그 일들을 모두 잡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역시 나는 '내 일'을 해야만 하는 사람임을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고, 주위에 프리랜서로 일할 일감들을 섭외해 놓고 회사를 나왔다. 그리고 나는 일단 프리랜서로 살기로 했다. 


그런데 그 모든 프로젝트들이 한 방에 날아가는 국가적인 사건이 터졌다. 코로나 바이러스. 내가 잡아놨던 일들은 몇 주 안에 모두 취소됐고, 나는 월 200이 되지 않는 돈으로 살아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때도 나는 강사를 해야겠다거나 하고 싶단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 지난 1년이 놀랍다. 인생 정말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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