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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mon de Cyrene Jan 03. 2018

연애와 결혼의 사회적 기능

연애와 결혼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개인적인 이야기

약 3개월 정도, 태어나서 가장 연애에 대한 관심이 없는 시기를 보냈다. 논문 작업이 너무 급했고, 여러 가지 이유로 이번에는 마무리를 했으면 하는 마음에 연애는커녕 사람을 만날 시간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연애에 관심이 없는 것을 넘어서 들어왔던 소개팅도 하기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정신이 없게 되더라. 그리고 내 전공을 좋아하는 편이기에 그 과정이 고통스럽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나는 기대와는 조금 다른 결과를 받아 들게 되었고, 시속 170km로 달리던 일상에 급브레이크가 밟혔다. 그랬더니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무리했던 후폭풍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그리고 그때서야 깨달았다. 내가 연애도, 사람을 만나고 싶단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도 내 안에 그런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내 상황에 온 힘을 다해서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란 사실을 말이다.


연애와 사랑이 필요 없다는 사람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은 연애를 하지 않아도 괜찮다며, 일이랑 결혼한 사람이라고 주장하고, 그 사람들은 실제로 그렇게 느끼면서 사는지도 모른다. 일을 할 때, 목적을 달성했을 때 느끼게 되는 성취감이 있는 것은 분명하니까. 하지만 그렇게 일에, 자신이 목적을 향해 달려가는 과정에서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신체가, 마음이, 정신이 망가져 가는 듯하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그렇게 일에 매몰된 삶은 사람을 망가뜨리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연애는, 사랑은, 결혼은 선택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사실 내면 깊은 곳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장벽이라고 생각하는 요소들로 인해 그저 그렇게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자기합리화를 무의식 중에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어떤 사람들은 아마도 다른 사람 앞에서는 그렇게 당당한 모습을 드러내지만 혼자 사는 집에 들어가거나, 집에 가서 자신의 공간인 방문을 닫았을 때 밀려오는 고독감과 홀로 감당해야 하는 인생의 무게에 짓눌려 잠을 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소주 한 잔, 맥주 한 캔만을 친구 삼아가며 말이다.


현대사회의 연애, 사랑, 결혼

연애는, 사랑은 사실 같이 기뻐하고, 같이 힘들어해주고, 서로 의지할 수 있는 관계를 형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게 연애의, 사랑의, 가정의 본질일 것이다. 그리고 이는 기뻐할 각자의 일이 있고, 같이 힘들어해줘야 할 각자의 일이 있다는 것이 전제되는 것이며, 나만 받는 게 아니라 내가 상대에 대해서 주기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각자의 삶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도 그 삶을 공유하는 것이 연애의, 사랑의, 가정을 꾸리는 것의 본질일 텐데 참 많은 것들이 그러한 관계의 본질적인 면을 가리는 게 아닐까? 내가 상대에게 받지 못한 것만 생각하고, 무엇을 주고 있는지를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투고, 헤어지게 되는 것은 아닐까?


현대사회의 모습을 들여다보면, 기술과 산업의 발달로 인해 이제는 사회적으로 필요 없는, 해서는 안 되는 구분을 여전히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건 아마도 사람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속도보다 기술이 발전하는 속도가 빨랐기 때문일 것이다. 불과 200년 전만 하더라도 생산을 하는 수단에는 대부분 물리적인 힘이 필요로 했기에 신체적으로 힘이 더 강한 남자들이 주로 생계를 해결하기 위한 일을 맡았고, 여자들은 섬세함이 더 필요한 집안일들을 챙겼겠지만 사실 이젠 그런 구분이 이뤄질 필요가 없는 사회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천 년간 인간사회에서 형성되어 온 문화의 잔재가 유지되고 있는 듯하단 것이다.


현대사회에서는 몸이 아니라 머리와 센스로 생계를 위해 필요한 돈을 버는 직군이 더 많아졌다. 그렇다면 돈을 버는 것이 꼭 남자여야 할 필요도 없으며, 가정일을 해야 하는 것이 꼭 여자여야 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상당수 사람들은 가정을 꾸리는 결혼은 물론이고, 결혼이라는 지점까지 가는 연애에 있어서도 그런 기준을 가지고 상대를 판단하고 그에 따라 서열을 매기면서 사람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원시시대와 달리 이제는 여자들도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환경이다보니 '일부' 남자들은 여자들도 사회생활을 해서 돈 벌기를 기대하면서도 200년 전 남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집안일은 하지 않으려 하고, 그에 따라 집안일은 모두 여성들의 몫으로 강요되고, 그로 인해 어쩌면 남편보다 더 경제력이 있을지도 모르는 여성들의 경력이 단절되기도 한다. 반면에 '일부' 여자들은 경제력을 가진 남자를 만나서 원시시대에서와 마찬가지로 생존을 위한 경제활동은 남자가 홀로 할 것을 요구하면서도 본인은 남편과 함께 꾸린 가정에서 어떠한 역할도 하지 않고 그 돈을 쓸 생각만 하는 것도 사실이다. 모순도 이런 모순들이 어디 있나? 시대가 바뀌었고, 그에 따라 환경도 변했다면 남자와 여자의 역할이 모두 조정될 필요가 있는 게 아닐까? 그에 대한 유연한 사고가 필요한 시대가 된 건 아닐까?


환경이 바뀌면...

세대가, 시대가 바뀌었다고 하지만 사람들은 무의식 중에 여전히 200년 전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기준으로 배우자를, 연인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 200년 전까지만 해도 인간은 <자연> 속에서 육체적으로 생계를 해결하기 위한 일을 하는 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큰 과제였다. 과거에 굳이 '연애'라는 과정 없이 집안끼리 결혼을 시킨 것도 그 사회에서는 그와 같은 '생존' 그 자체가 가장 중요한 목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당시에 남자들은 밖에서 먹고살 것을 잡아오는 기능적인 기준으로, 여자들은 아이를 낳고 가정을 유지하는 기능적인 기준으로 평가되고, 판단되며 선택되었을지도 모른다. 남아선호 사상이 있었던 것도 남자가 많아야 사냥하거나 농사지을 수 있는 사람이 많아짐으로써 먹고 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질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수백, 수천 년 전의 이야기를 그리면서 남녀 간의 감정적 사랑의 이야기를 많이 다루지만 사실 그건 많은 경우에 여유 있는 집안들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문제였을 것이고,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 대부분에게 그런 감정적인 요소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많지 않았을 것이다. '생존'이 가장 큰 목적이었을 테니까. 현대사회에서 프리랜서들이 느끼는 불안정성과 불안감 혹은 그 이상의 불안정성과 불안감이 그 시대를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있었을 테니까...


그런데 현대사회에서 그런 문제들 중 상당수는 사실 기계가 해결을 하고, 자연 속에서 생계의 문제를 해결하던 것이 <사회>로 옮겨왔다. 그에 따라 인간이 생계와 생존을 위해서 해결할 필요는 심리적, 정서적 측면에서 대부분 발생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거에 <자연>에서 추구되었던 사랑과 가족관은 <사회>적인 면으로 옮겨와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게 연애와 사랑의 진화는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상대와 관계를 형성함에 있어서도 서로가 같이 기뻐하는 코드, 힘들어하는 코드가 비슷한 사람을 최우선적으로 찾아야 하는 건 아닐까? 현대사회에서 <생존> 하기 위해서는 심리적, 정서적 피로감을 같이 해결할 파트너가 필요하기에.


물론 현대사회에서도 먹고사는 문제는 중요하다. 하지만 국가의 역할이 과거보다 훨씬 커졌고, 단순히 '생존'의 문제만 놓고 봤을 때는 개인의 생존 가능성은 200년 전보다 훨씬 높아진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자본주의로 인해 부자인 사람들은 무제한으로 부를 축적할 수 있게 됨으로써 커지는 빈부격차로 인해 생기는 사람들의 상대적 박탈감 (자본주의 사회 이전에는 식량을 쌓아두더라도 시간의 제한이 있었을 것이고, 그에 따라 축적한 식량을 어느 순간에는 풀어야 했을 것이고 그에 따라 빈부격차가 현대사회만큼 심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존 로크는 실제로 그래서 화폐제도를 전면적으로 도입하는 형태로 사회체계가 발전하는 것은 너무 많은 사회적 부조리를 만들어 낼 것이라며 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돈을 버는 과정에서 사람과의 관계에서 스트레스 등을 해결해야 할 필요가 점점 더 커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그런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은 결국 '정서적 교감'을 할 수 있는 사람의 존재일 것이다.


정서적 교감이 필요한 사회

그런데 이러한 '정서적 교감'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다른 환경에서 자란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특징을 가지기 때문에. 사람들이 "비슷한" 경제력, 학력, 집안 분위기를 가진 사람을 찾는 것은 "교감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은 사람"을 찾는다는 맥락에서는'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러한 정서적 교감을 하는 방법은 서로 맞춰갈 수도 있는 것이지만 사람은 누구나 나이가 들수록 자신의 스타일이 강해지기 때문에 '맞춰가는 것' 자체가 어려워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사실 그와 같은 정서적 교감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것도 어려운데,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그보다 다른 요소들을 먼저 충족시키기 위해서 연애를, 결혼을 할 상대를 스캐닝한다.


어떤 사람들은 '난 그런 필요가 없는데'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쩌면 그 생각을 느낌을 받는 것은, 내가 지난 3개월 동안 그랬듯이 그 사람이 자신의 환경에서 무엇인가에 몰두하고 있음으로 인해서 자신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운동선수들이 경기에 너무 몰입해 있으면 뼈가 부러지거나 피가 나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경기에 계속 임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운동선수들이 그와 같은 상태로 경기를 마친 후에 자신이 입은 부상에 수반되는 고통을 느낄 뿐 아니라 그런 상처가 난 상태에서 운동을 해서 상태가 악화됨으로 인해 가중된 고통까지 느끼듯이, 자신이 하고 있는 것에 몰입해 있는 상태가 해소되고 나면 그 과정에서 마취된 것처럼 느끼지 못했던 정서적, 심리적 필요가 그 사람을 휘어감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람은 누구나 비슷한 면을 갖고 있으니까...


솔직히 같은 조건이라면 조금 더 잘생긴 사람, 이쁜 사람과 사는 것이 순간, 순간의 엔돌핀을 돌게 해주는 역할을 할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더 화려한 삶, 비싼 음식을 누릴 수 있는 것이 그 순간의 만족감과 행복감을 선물해 줄 수 있는 것도 분명하다. 그래서 같은 조건이라면 그와 같은 것들을 연애와 결혼에 있어서 추구하는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스킨십도 마찬가지. 하지만 그와 같은 요소들이 의미가 있는 것은 현대사회에서 살아가면서 발생되는 개인의 필요가 연인과 가정에서 충족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서로가 그러한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나이가 들수록 어려워진다.


그렇다면 연애를 하고, 가정을 꾸리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는 분명 해지는 듯하다. 그에 더해서 다른 것들을 더 추구하겠다면 그건 개인의 선택이지만 그러한 조건을 우선순위에 위에 놓는 것은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될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고, 다른 것들을 어느 정도 수준으로 추구하느냐에 따라 본인이 만날 수 있는 사람의 풀이 확연하게 좁아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걸 감당하겠다는 사람에게 굳이 제3자가 뭐라고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건 본인의 선택이고 그에 따른 책임도 본인이 질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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