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2년 반 전에 브런치에서 연애와 결혼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할 때 매거진의 이름은 '사랑학개론'이었다. 연애와 결혼이 아닌, 사랑에 대해 쓰고 싶었다. 건방지게도 내 나름대로 사랑에 대한 고민을 충분히 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2년 반 정도를 연애, 결혼과 사랑과 접점이 있는 글들을 쓰고 돌아보니 이제야 어쩌면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티끌만큼 알기 시작했다는 느낌이 있다.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한 내 생각은, 사랑에 대한 나의 정의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 나 자신을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는 수준으로 상대를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 그리고 그 사랑은 나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존중하고 아끼는데서 시작한다는 생각에도 변함은 없다.
하지만 사랑에 대한 이러한 정의는 여전히 추상적이고 막연하다. 그리고 이러한 정의만으로는 내가 상대를 사랑하는지 여부를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아니, 불가능하다. 그런 면에서 사랑에 대한 이러한 정의는 이론적으로 정확할지는 몰라도 실용적이지는 않다는 한계를 갖는다.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이 고민이 계속되었다. 사랑의 궁극적인 모습은 그러하겠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을 사랑할 줄도 모르고, 자신을 사랑하더라도 상대를 자신만큼 아끼는 것은 더더욱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니까. 그렇다면 상대에 대한 나의 마음이 사랑인지 여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인간 안에서는 감정, 욕구, 욕망, 욕정이 뒤섞여서 일어나고, 그걸 객관적으로 구분해서 분류하기가 어렵다는 점을 감안하면 다른 사람은 물론이고 나의 감정 또는 내면의 상태가 사랑인지 여부는 명확하게 분류하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다만 한 가지 기준을 제시할 수 있다면, 그건 아마 '자기희생'일 것이다. 이는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 생각이다. 사실 사람은 대부분 상황에 있어서 자신이 1순위일 수밖에 없다. 누군가를 위해 내 목숨을 내놓는 사람들이, 그렇게 희생하는 것이 위대하게 여겨지는 것은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기중심적이라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어느 정도는 인정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사랑을 하게 되면, 사람은 자신이 형성해 놓은 벽을 무너뜨리기 시작한다.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았을 모습을 보이고, 다른 사람에게 주지 않았을 것을 줄 뿐 아니라 자신의 것을 희생하면서도 상대를 위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내가 갖고 있는 범주나 곁을 내주기 시작할 때가, 조금씩 사랑이 시작되는 시점이 아닐까?
문제는 상대가 자신의 벽을 무너뜨리는 것이 '상대를 위해서'인지 아니면 '상대를 내가 소유하고 싶어서인지'를 구분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사람들은 때때로 후자를 전자로 착각해서 연인이 되고 결혼을 하기도 하고, 전자를 후자로 생각하고 상대의 마음을 받지도 않는다. 심지어 자신의 벽을 무너뜨리는 사람도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모르는데 상대가 그걸 어떻게 구분할 수 있겠나?
그걸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이 한 가지 있다면, 그가 자신의 벽을 무너뜨리고 다가오는 방식이 '자신이 생각하기에 좋은 것'인지, 아니면 '상대가 필요하고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다가오는 것인지에 있을 것이다. 같은 선물을 주더라도 상대가 무엇을 좋아했었고, 어떠어떠한 것을 근거로 이런 걸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주는 것과 '이게 좋은 거니까'라는 생각에 주는 것은 분명 다르다. 그리고 상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람이 그렇게 고른 선물이 자신의 취향이 아니라서 짜증이 나기보다는 그 고민한 시간과 마음이 고마울 것이다.
그게 진정한 사랑의 시작이 아닐까? 기준이 '나' 또는 '사회'나 '세상'에서 상대로 옮겨가는 것. 기준 자체가 바뀌는 것이야말로 내 안의 가장 큰 것이 무너지고 바뀌는 것을 의미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