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SMLE나 준비해 볼까?

문과생이 기초의학과 친해지기까지

by 키튼

2015년은 메르스(MERS)로 온 나라가 떠들썩했던 해였고, 저는 긴 트레이닝 끝에 내과 전문의 자격을 막 취득한 시기였습니다. 전문의를 땄으니 나라의 부름에 응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죠. 해군 군의관으로 3년 3개월간 복무하게 되었고,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내와 떨어져 지내야 한다는 점이 아쉽긴 했습니다. 하지만 3개월의 훈련소 생활만 지나면 출퇴근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위안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임지가 결정되던 날, 예상치 못한 소식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200명의 내과 군의관 중 단 한 명만 배치된다는 함정 군의관에 제가 발탁된 겁니다. (참고로, 함정 근무 가능성이 높다고 했던 응급의학과 친구는 육지로 배치되었더군요.) 돌이켜보면, 그 일이 왜 그렇게까지 큰 충격이었나 싶기도 합니다.

오해는 마시길 바랍니다. 사실 함정에서의 생활은 힘들기보다는 오히려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당시 방을 함께 썼던 보급관과는 지금도 연락을 주고받으며 안부를 나눌 정도로 좋은 기억을 많이 간직하고 있지요. 돌이켜보면, 그 시절도 나름의 의미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배 안에서의 시간은 참으로 지루했습니다. 아무리 자고 또 자도 배는 정박하지 않고 바다 위를 떠다녔습니다. 인터넷도 없고, 딱히 할 수 있는 것도 없었지요. 그러다 결심했습니다. 뭔가 무모해 보이는 일에 도전해 보자고요. 그렇게 선택한 것이 바로 USMLE였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실현 가능한 목표였겠지만, 당시의 저에게는 정말 무모해 보이는 도전이었습니다.

우선, 국내 최대의 USMLE 준비 커뮤니티인 'USMLE Korea'에 가입하고, USMLE 준비의 바이블이라 불리는 First Aid 한 권을 어렵게 구했습니다. 흔들리는 배 안에서 그 책을 한 장씩 읽기 시작했죠. 처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무작정,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필사를 했습니다.

First Aid는 정말 좋은 책이긴 하지만, 단편적인 수준의 지식들로 구성된 요약서 같은 책이라 나중에는 G**S라는 업체에서 제공하는 한글로 된 USMLE 관련 책을 구했습니다. 그 후, G**S 책과 First Aid를 번갈아 가며 필사를 이어갔습니다.

사실, 이 시험에 꼭 합격해서 한국을 떠나야겠다는 강한 의지보다는, 무념무상의 상태로 그저 배 안의 시간이 빨리 흘러가기만을 바라는 마음이 더 컸던 것 같습니다.




한 가지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조금 뚱딴지같은 소리일 수도 있지만, 저는 고등학교 때 문과였습니다. 제가 입학한 의과대학은 문과에서 교차 지원이 가능한 곳이었는데요. 문과 출신이라는 점을 핸디캡이라고 말하는 건 조금 비겁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제가 다니던 학교에는 문과 출신 선배 중에서도 장학금을 받는 분들이 수두룩했으니까요.

하지만 처음 의과대학의 교과서를 받던 순간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무언가 막힐 때마다 "내가 문과라서..."라는 핑계를 입에 달고 살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제가 굳이 문과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저 같은 사람도 USMLE를 충분히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은 겁니다.

USMLE Step 1은 기초의학 시험입니다. 시험 과목으로는 생화학, 생리학, 해부학 등이 포함되죠. 저에게 생화학과 생리학은 마치 암호문 같았습니다. 한국에서의 생화학, 생리학 시험조차 버겁게 느껴졌으니까요. 임상적인 것과 연결되는 과정을 이해하기는커녕, 시험에 자주 출제된다는 족보 위주로 뜻도 모른 채 암기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USMLE는 암기를 넘어, 제가 가진 생화학 지식을 임상에서 어떻게 풀어낼 수 있는지를 평가하는 시험이었습니다. 한국에서 공부했던 암기 위주의 방식은 통하지 않았습니다. 반드시 '이해'를 해야만 했습니다.

군의관 시절 USMLE를 준비하면서 저는 처음으로 생화학과 생리학을 ‘이해’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암호처럼 느껴졌던 생화학 공식들이 어느 순간 재미있게 다가오기도 하더군요. 당시에는 의과대학을 졸업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나 거의 백지상태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과대학 공부가 끔찍하지 않고 재미있을 수도 있구나"라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되었습니다.

배에서 내릴 때쯤, 제 곁에는 10여 권의 필사 노트가 남아 있었습니다.

손수 필사한 노트들


물론 그 안에 담긴 지식이 모두 제 것이 된 건 아니었습니다. 손으로 쓰는 게 힘들어 나중에는 타자로 쳐서 프린트한 뒤 노트에 붙여 넣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배에서 내린 뒤에도 그만두고 싶지 않더군요. 그 과정에서 무언가를 발견했으니까요. 저를 잡아끄는 무언가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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