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맥혈 채혈을 가르쳐준 나의 환자
이 이야기는 내가 인턴이었을 때의 일이다.
처음 배정받은 곳은 병원 내에서도 악명 높기로 소문난 성형외과였다. 일은 끝없이 밀려왔고, 병동은 늘 정신없이 돌아갔다. 그 전쟁통 속에서 갓 의사 면허를 딴 나를 가장 두렵게 만든 건 ‘ABGA’, 바로 동맥혈 채혈이었다.
정맥과 달리 동맥은 깊숙한 곳에 숨어 있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박동만을 이정표 삼아, 보이지 않는 혈관의 깊이와 방향을 짐작해 단번에 바늘을 꽂아야 한다. 말은 간단하지만, 초보 의사에게 그것은 거의 보이지 않는 과녁을 맞히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더 잔인한 건, 실패한 뒤의 과정이다. 한 번 실패하면 바늘을 꽂은 채 같은 자리를 계속 더듬어야 한다. 환자의 고통은 커지고, 젊은 의사는 식은땀을 흘리며 환자의 멀쩡한 손목을 멍투성이로 만들어버리기 일쑤다. 정맥혈은 간호사가, 동맥혈은 의사가 채혈하는 것이 원칙이었기에 못 하겠다고 도망칠 수도, 대신해 줄 사람을 찾을 수도 없었다. 잠도 못 자고 쫓기던 그 시절, 나는 수없이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와중에, 지금도 또렷이 기억나는 한 사람이 있다.
그는 한때 차력사로 활동했던 분이었다. 젊은 시절에는 레슬링 선수였다고도 했다. 기골이 장대하고 목소리는 늘 온화했지만, 공연 도중 일어난 불의의 사고로 경추를 다쳐 사지마비가 된 환자였다.
그가 성형외과 병동에 머문 이유는 깊은 욕창 때문이었다. 수술방을 오르내리며 드레싱을 하고, 썩은 살을 도려내는 '데브리망(변연절제술)'을 수없이 반복해도 상태는 좀처럼 호전되지 않았다. 참으로 억울하고 기구한 사연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늘 웃는 얼굴로 의료진을 맞았다. 인턴은 두세 달마다 바뀌는데, 아마 내가 이 병원에 온 후 그의 첫 인턴이었을 것이다. 그는 유난히 나를 반겼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 역시 그에게 가는 발걸음이 다른 환자들보다 가벼웠다. 그에게서 동맥혈을 뽑을 때는 심리적 부담이 덜했기 때문이다. 그가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에 안도했던, 지금 생각하면 참 부끄러운 이유였다.
어느 날, 여느 때처럼 내가 혈관을 찾지 못해 쩔쩔매며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을 때였다.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 온 지 얼마 안 됐죠?"
내 손끝이 멈칫하자 그가 덧붙였다.
"난 어차피 감각을 못 느껴요. 너무 부담 갖지 말고 편하게 하세요. 정 안 되면 반대쪽 팔에서 해도 되니까."
그 말이 이상할 정도로 가슴에 깊이 박혔다.
사실 병동에서 나는 늘 죄인이었다. 서툰 바늘 놀림에 환자들은 짜증을 냈고, 고통 섞인 비명과 날 선 반응들은 나를 늘 주눅 들게 했다. 아픈 사람들이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런데 정작 위로를 받아야 할 사람은, 평생 침대에 묶여 지내야 하는 그였다. 세상 그 누구보다 억울하고 화가 날 법한 상황에 놓인 환자가, 도리어 식은땀을 흘리는 젊은 의사를 다독이고 있었다.
'이렇게 착한 사람에게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바늘을 쥔 손 너머로 먹먹함이 밀려왔다.
언제부턴가 그는 인턴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숨은 스승'으로 통했다. 성형외과를 도는 많은 인턴이 그의 너른 배려에 기대어 채혈에 대한 공포를 이겨낼 수 있었다. 지금 내가 내과 전문의가 되어 어디서든 자신 있게 동맥혈 채혈을 할 수 있는 것도, 8할은 그분 덕분이라 생각한다.
시간이 흘러 내가 내과 레지던트 2년 차가 되었을 때, 운명처럼 다시 그를 마주했다.
하지만 나는 처음에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침대 위에는 뼈만 남은 앙상한 몸만이 놓여 있었다. 인턴 시절 내가 기억하던, 기골이 장대하고 호남형이던 그 당당한 풍채는 온데간데없었다. 너무나 야위어버린 모습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때는 안부조차 물을 수 없었다. 심정지가 온 위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침대 위로 올라가 흉부 압박을 시작했다.
인턴 시절, 바들바들 떨던 나에게 아무 말 없이 손목을 내어주던 그분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런 기억에 잠길 겨를조차 없었다.
나는 그저 앙상한 갈비뼈가 부러질 것 같은 느낌 속에서 온 체중을 실어 가슴을 누르고, 또 눌렀다. 그것이 그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처치였다. 그렇게 나는 의사로서 그의 마지막을 지켰다.
지금도 그분의 이름 석 자를 또렷이 기억한다. 하지만 혹여 고인에게 누가 될까 싶어 이곳에는 그저
‘장 씨 아저씨’라고만 적어두려 한다.
장 씨 아저씨
가장 떨리고 서툴던 순간에
“괜찮다”라고 말해주던
나의 스승님
부디 그곳에서는 더 이상 아프지 않고,
자유롭고, 편안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