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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숙정 Apr 02. 2021

사백만 원짜리 전세 아는 사람?

60대 아줌마 이사 연대기

1984년도에는 있었다. 내가 살아 봤던 집이니까. 나이 든 사람은 알겠지.

지금 살고 있는 전셋집은 말하기도 싫다. 이런 걸 방이라고 내놓나 싶을 만큼, 아니, 이런 세상에서 꼭 살아야 하나? 생각이 들 정도다. 좁은 땅덩어리에 사는 한국 사람의 부동산 욕심은 필사적이다.

세계지도를 펼쳐 놓고서 보면 토끼똥만 한 나라가 한국이다. 그래도 옆 나라 일본은 늙은호박만 하기라도 한데 말이다. 그러니 땅에 대한 전쟁이 치열하다. 한국 땅은 ‘부동산 전쟁’이 한창이다.

집 문제를 생각하면 정말 한국이 싫다. 가난한 집주인들이 방을 쪼개서 전세를 놓는 행위는 야비하기 짝이 없다.




결혼과 동시에 시작한 전셋집 보증금 400만 원. 성내동에 재개발이 시작되고 상가 건물을 지어 놓아도 잘 나가지 않던 곳에 사람들이 살림할 목적으로 세를 얻어 들어갔다. 2층짜리 건물인데 여덟 가구가 살았던가?

안채는 살림집, 바깥채는 가겟집이었다. 화장실은 공동 사용이고. 내가 살던 집은 방 하나 딸리고 가게는 부엌이자 욕실이자 창고이자 거실이며 현관인 종합 용도 집이었다.

이 집에서 살다가 물난리를 겪었다. 그 당시 북한에서 댐 수문 관리를 잘못해서 그랬다고 어렴풋이 기억난다. 그때 북한이 사과의 뜻으로 보낸 옷감과 쌀을 배급받았다. 옷감은 무늬는 촌스러워도 질이 좋았다. 그러나 쌀은 밥을 지으면 푸스스 훨훨 날아다녔다.


두 번째 집은 영등포구 대방동인데 오래된 동네라 집도 낡았고 첫 번째 집보다 형편없었다. 길가에 난 부엌문이 출입문이고, 화장실은 주인집과 함께 썼다. 안채는 주인이 쓰고, 화장실은 주인집 마루를 통해 마당을 나가서 썼는데 빨래도 주인집 마당에 널어야 했다.

다행히 집주인이 사람이 좋아서 걱정이 없었는데 우리 집 부엌과 면하는 옆집이 재래식 화장실이라 벽 하나 두고 똥통과 붙어 있는 게 걱정이었다. 부엌 창문을 열면 똥오줌 냄새가 폴폴 풍겼다.


계속해서 세 번째 집 얘기를 해 보겠다. 여기는 보증금 600만 원, 방 두 개짜리 집으로 갔다. 애가 둘이니 방이 더 필요했다. 시장 근처에 이번에도 상가 용도 건물이었다. 집주인이 같은 건물 4층에 살고 우리는 가게를 쪼개 살림집으로 개조한 곳에 살았다. 그런대로 숨통은 트일 만한 곳인데 지하도 아니면서 낮에도 불을 켜야 할 만큼 어두웠고 공과금을 상가용으로 내야 해서 생활비가 더 들어갔다.


네 번째 집은 서울 북쪽으로 가서 구파발이다. 여기도 보증금 400만 원. 산꼭대기에 자리 잡은 집인데 여기도 마을이 오래돼 집들이 썩어 있었다. 지하철역을 중심으로 산에 있는 작은 마을을 진관내동, 아랫마을을 진관외동으로 구분했는데 외동은 시장, 성당, 학교가 있는 꽤 번화한 동네였고, 우리가 살던 내동은 이름도 ‘물푸레골’이라고 부르는 그야말로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서 개척해 가는 산동네였다.

우리는 그중에서도 산꼭대기의 중턱에 자리 잡은 집에 살고, 집으로 향하는 길목은 차는 어림도 없고 두 사람이 서면 꽉 찰 만큼 비좁았다. 내가 살러 들어간 시절에는 이삿짐도 리어카나 지게로 사람이 하나하나 날랐다. 화장실은 재래식이라서 일명 ‘똥장군’이 다니면서 집집마다 ‘해우소’를 비워준다.

주인은 안채에, 우리는 옆방에 살았다. 방 두 개 중 하나는 쓸모없고, 부엌은 얇은 플라스틱 슬레이트 지붕을 인 가건물인데 텐트라고 봐도 무방하다.


다섯 번째는 ‘뾰족집’이다. 앞서 산 집에서 세 집 건너 있었는데 지붕이 외국풍으로 생겨서 다들 뾰족집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세입자 두 집만 살고 있어 정말 전셋집으로는 마음 편한 집이었다. 개도 키울 만큼 마당도 넓었다. 여름에는 고무통에 물을 받아 실컷 물놀이도 했다. 방이 구조가 좀 이상해서 그렇지 세 개나 되었다. 욕실이라 하기도 우습지만 집안에 씻을 수 있는 공간도 있었다. 보증금 400만 원 치고는 꽤 괜찮은 집이었다.

그런데 이 집에서 집주인의 야비한 횡포가 벌어졌다.

어느 날, 집주인의 노모가 여기에서 살아야 하는데 우리가 살던 방을 쪼개서 좋은 공간은 노모가 살고 뒤꼍의 쓸모없는 공간을 쓰라는 것이다. 견디다 못해서 부동산에 내놨는데 퇴짜만 맞다가 단골 슈퍼 주인이 소개해준 덕분에 정말 간신히 빠져나왔다. 그 집에 들어와 살았을 세입자에게 아직도 미안한 생각이 든다. 나중에 듣기로는 얼마 못 살고 나갔다고 들었다. 사람이 살기에는 지옥 같은 집이다.

집주인의 노모가 사는 방(우리가 원래 살던 방)은 겨울에 따뜻하고 여름에 시원했다. 그 방도 처음에 이사 올 무렵은 시멘트를 바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았어서 큰애가 성인이 됐는데 지금도 아토피 때문에 몸이 성한 데가 없다.


여섯 번째 집은 산꼭대기에서 평지로 내려와 교회 아래에 살았다. 이번에도 주인의 횡포가 대단했다. 쓰러져가는 집 한 채를 이리 쪼개고 저리 쪼개서 두 가구가 살아야 할 집을 세 가구로 만들어 얇은 합판 하나로 칸막이를 치고는 벽이랍시고 벽지를 바르고 세를 놓았다. 옆집 사람들 소리가 어찌나 잘 들리는지. 그때만 해도 금리가 높아 방 한 개라도 더 만들어서 보증금을 은행에 갖다 넣고 이자로 생계를 꾸리는 하우스푸어가 많았을 것이다. 그 집도 보증금이 400만 원이었을 것이다.


일곱 번째. 이번에는 진관내동에서 진관외동으로 넘어왔다. 그래도 그때는 시골에서 도시로 왔다고 할 정도로 번화한 곳으로 이사한 것이다. 보증금 600만 원짜리였는데 주인집이 그 당시 시의원을 지냈다. 본채(주인집)로 들어가는 마당에 주차장을 넓게 빼놨는데 그 주차장 한 귀퉁이에 아주 날림으로 지은 방 두 칸짜리, 부엌과 욕실이 콧구멍만 한 곳이다. 그래도 그나마 화장실은 수세식이었다.


여덟 번째. 강북에서의 전세살이가 끝나고 도약을 했는데 어디냐? 갑자기 강남으로 진출을 하게 됐다. 사원아파트로 들어간 것인데 장소는 도곡동, 24평짜리, 단지가 작고 중앙난방을 해서 늘 춥고 관리비가 비싼 게 흠이었다.

어느 해 겨울, 윗집인지 아랫집인지 공사를 한 게 난방에 영향을 끼쳐 추워서 견딜 수가 없어서 이사했다.


아홉 번째. 이번에 이사한 집은 양재동이었다. 직장 대출을 받아 빌라 전세로 들어갔는데 보증금이 7천인가, 8천인가 한 집이다. 오래된 빌라 2층이었다. 하수도가 막히고, 방바닥이 내려앉고, 툭하면 여기저기 고장이 잦아서 집주인한테 연락을 하면 전화를 받지 않았다. 어쩌다 통화가 되어도 오리발을 내밀고 자기가 한술 더 떠 궁상을 떨었다. 빚에 쫓겨서 자기네는 더 한심한 집에 월세를 산다나? 그렇게 징징거리더니 나중에 전화도 안 받았다. 불안함에 2년을 시달리다 계약 기간이 끝나자마자 부동산에 전세를 내놓았다. 그런데 집이 하자가 많아 도무지 나가지를 않았다. 주인이 전화를 안 받아 구파발 집만큼이나 어렵게 전세를 빼서 이사했다.


열 번째 집으로 이사를 했는데 이번에는 단독주택 2층이다. 보증금은 9천만 원이었다. 많이 발전한 거지…. 그런데 돈만 발전을 했지, 집은 발전이 없다.

왜냐? 집주인들이 겉보기에만 멀쩡해 보이게 수리해 놓고 속이 곪아 들어간 건 싹 감춘다. 9천만 원이나 하는 전셋집인데도 문제점이 수두룩했다.

①첫날부터 하수도가 꽉 막혀 있었다. 틈이 있었는지 천천히 물은 내려갔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자 그것도 완전히 막혔다. 이런 문제는 보통 전에 살던 세입자가 더럽게 쓰다 나간 게 아니면 집주인한테 불만이 많은 세입자가 일부러 쓰레기를 하수도에 버려서 막히게 했을 확률이 높다.
어쩐지 집을 보러 갔을 때 물을 틀어 보니 수도가 잠겨 있었다. 왜 잠갔냐고 묻자 빈 집이라서 수도를 잠가 놓은 거라고 했다. 하수도의 문제점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다.
집주인한테 얘기했더니 우리가 하수도를 막 써서 막혔다고 알아서 뚫어서 쓰란다. 그래서 내 돈을 들여서 뚫었다.

②보일러가 연식이 오래되어 몇 달이 지나자 고장이 나 버렸다. 고쳐 달라고 하니 반반 부담하잔다.

③세탁기 놓을 자리가 마땅히 않아 욕조를 들어내고 그 자리에 세탁기를 놓고 싶다 했더니 밖에 베란다 비슷한 장소에 놓고 쓰란다. 베란다는 아니고 난간에 더 가깝다. 물이 내려가는 배수구가 알고 보니 빗물받이였다. 그나마도 중간에 끊어져서 세탁물을 버리면 벽을 타고 폭포수처럼 쏟아지게 생겨먹었다. 자기가 거기 놓으라는데 에라, 모르겠다 했다. 세탁기를 자동으로 돌려놓고 외출을 해 버렸다. 그랬더니 다음날에 빗물받이를 고쳐 놨더라.

④심야에 집주인이 사람들을 불러서 시끄럽게 떠들면서 고스톱을 쳐댔다. 밤에 잠도 못 잘 정도였다.

⑤된장, 고추장 장독을 자기네 마당 놔두고 우리집 출입문 앞에 떡 갖다 놓고는 매일 뚜껑을 열고 해바라기를 했다. 야비함 중에 야비함이다. 집주인 나이가 나와 비슷할 텐데 또래라는 게 창피했다.


이사 다녔던 전셋집 얘기를 전부 하자고 들면 끝이 없어 이쯤에서 줄이고 마무리를 하겠다.


남의 집을 전전해 본 사람은 누구나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적은 돈 가지고 셋집 구하러 다니는 게 참 서글프다. 나는 왜 이렇게 돈이 없을까 하며 기대치를 내리고 결국에는 적당히 타협한다. 웬만하면… 이 정도면… 하며 불편함을 감수하고 계약서를 쓰게 된다.

그러다 보니 계약 기간이 끝나자마자 이사하고 또 이사하고. 그렇게 세월이 다 간다. 이삿짐센터에 좋은 일 시켜주면서 세월을 보낸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참 어리석다. 남편이 직장에 다니면 처음부터 대출을 알아보는 방법도 있었는데 빚지고 살면 큰일 날 듯이 미련을 떨었다.




오늘날 수도권의 인구는 폭발할 수준이다. 셋집살이의 설움을 안고 사는 인구가 만만치 않게 많을 것이다. 집주인들의 횡포도 더욱 교묘해지고, 치졸하게 발전하니 끔찍하다.

지금은 그 전세도 귀해지고 너무나도 비싸다. 이건 사람이 집에 사는 건지 집을 모시고 사는 건지 헷갈릴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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