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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달 모나 Monah thedal Oct 06. 2024

노스텔지어라는 낭만은 우리에게 없어요

소설 <어느 날, 거울 속 나에게 자아가 생겼다>, 12화

“동창회가 원래 그런 곳이잖아. 기대도 안 했으면서.”     


거울 너머의 그가 말한다.      


“알면서 갔지만, 실제로 눈앞에서 보니 충격이었죠.”

“한때는 어렸던 아이들이 갑자기 너무 어른이 되어서?”

“아니요.”

“그럼?”

“하나도 바뀐 게 없어서요.”     


그가 침묵으로 답한다. 암묵적인 수긍이다.     


“노스텔지어라는 낭만은 우리에게 없어요. 학창 시절부터 없었던 게 어떻게 하루아침에 생길 수 있겠어요? 투견장에서 자라난 개들은 같은 개를 적으로 인식하죠. 어릴 때부터 이겨야 한다는 집념밖에 배운 것이 없어 그래요. 우리는 두 발로 막 걷기 시작하던 시절부터 투견으로 자라났어요. 무엇이든지 상대보다 빼어나야 하고, 무엇이든 남보다 더 잘해야 했죠. 그건 생존이 걸린 문제였어요. 우리를 돌보고 가르치던 이들은 사회를 철저한 적자생존의 야생으로 묘사했고, 그곳에서 자비란 없었어요. 이기면 사람이 될 수 있지만, 지면 인간으로도 분류될 수 없는 상태로 평생을 살아가야 했죠. 그래서 어릴 때부터 우리는 서로를 헐뜯도록 교육받았어요. 살기 위해서는 물어뜯어야 했죠. 물어뜯지 않으면 내가 물리게 될 테니까요.”     


어린이들이 겪었던 삭막한 현실, 십수 년간의 기억은 언제나 날 몸서리치게 한다.     


“어린 시절 학습된 본능은 타고난 본능만큼이나 무섭게 삶에 침습해 들어와요. 한 번 든 물은 쉽게 빠지지 않죠. 오래전부터 뿌리박힌 가치관은 관성처럼 지금의 우리를 밀고 당겨요. 서로를 밟고 일어서려 했던 습관은 아직도 모든 곳에서 유효하고, 장르와 종목을 가리지 않고 펼쳐져 있어요. 우리는 아직도 기를 쓰고 서로를 견제해요. 어떻게든 돋보여야 하니까요. 돋보이는 건 승리하는 것이고, 승리하는 건 생존하는 것이에요. 그리고 생존은 삶의 모든 것이죠. 우리가 교육받은 인생이란 그런 것이에요.”     


손톱 옆의 마른 상처를 애꿎게 만지작거린다. 응고된 피의 우둘투둘한 표면이 느껴진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든 이기려고 해요. 이기려고만 한다고요. 모든 말의 마디와 마디에서 상대보다 내가 조금이라도 나은 이유를 찾으려고 하죠. 그게 얼마나 의미 없는 일인지를 알면서도, 습관을 버리지 못하는 거예요.”     


거울 너머의 그가 조용히 입을 연다.     


“사람 사이의 모든 만남을 전투로 해석하는군, 당신은.”     


공기의 흐름이 어느새 미묘하게 바뀌어 있다. 어쩐 일인지 그는 나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나요? 어딜 가든 그런 대화뿐이에요. 우리는 서로를 정말로 만나는 법을 잊어버렸죠. 겉으로 증명할 수 있는 가치들로만 서로를 재단할 뿐. 숫자로 치환할 수 없는 가치는 가치로 인식조차 하지 못해요. 이대로 가다가 우리의 명함에는 이름 대신, 각자를 가장 뽐낼 수 있는 그럴듯한 숫자만 적게 될지도 몰라요. 서로에게 중요한 건 오로지 숫자. 숫자뿐이니까요.”     


그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는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까, 가로젓고 있을까. 그의 생각을 도무지 읽어낼 수가 없다. 그는 나고, 나는 그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서로에게서 완벽히 분리되어 버린 듯하다.     


“파편화된 사회에서 우리는 전에 없이 빈곤해져 버렸어요. 그 어느 때보다 부유한 시대라고 하지만, 그 누구도 자신을 부자로 정의하지 않죠. 다들 자신이 얼마나 가졌는지를 자랑하기 바쁘지만, 그건 얼마나 가지지 못했는지를 감추기 위한 수작에 불과해요. 우리는 가난해요. 그 어느 때보다도 가난하다고요.”     


고요하다. 마른 침묵이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럽다. 대체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걸까. 손을 들어 유리 벽을 두드린다.      


“아직 여기 있어.”     


건조한 답이 돌아온다. 기계적인 답변에 눈살을 찌푸리며 항변한다.     


“정말 이러기예요?”

“무슨 뜻이야?”


“자꾸 아닌 척, 모르는 척, 그럴 거냐고요. 당신도 나처럼 생각하잖아요.”

“맞아.”


“그런데 왜 그렇게 멀뚱히 앉아만 있어요?”

“동조라도 해 주길 바랐나? 함께 개탄하며, 사회를 뒤집을 방법이라도 공모하자고?”


“동조는 바라지도 않아요. 동의라도 해 달라는 거예요.”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뭐라고? 당황해서 아무런 말도 나오질 않는다. 스스로에게 이렇게까지 어이없긴 또 처음이다.     

 

“그야 당연히..”

“내가 너니까?”


“그래요. 나는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동의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별로 그러고 싶지 않은데.”

“왜죠?”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되묻는다.     

 

“당신이 그들과 뭐가 그렇게 다른데?”     




* 소설 <어느 날, 거울 속 나에게 자아가 생겼다> 중 일부를 발췌한 글입니다.




소설 어느 날, 거울 속 나에게 자아가 생겼다 >


평범했던 아침, 거울 속에 수상한 ‘내’가 등장한다. 겉모습부터 목소리까지 나와 도플갱어처럼 닮았지만, 독립적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별개의 인격체인 ‘그’. 그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눈을 까뒤집고선 뒤로 고꾸라져 버린다. 내가 미처 놀라기도 전에 먼저 선수를 쳐 버린 것.     


하지만 어째서? 어떻게 몸을 훔쳐 간 도둑이 주인보다 더 놀랄 수 있는 거지? 

정작 기겁해야 하는 건 나인데! 격분하고 경악해야 하는 건 나의 몫인데!      


아니, 아닌가? 혹시, 혹시 내가? 아니다. 말도 안 된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있어선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모르겠다. 우리 중 대체 누가 ‘진짜’인 거지? 만약 그가 진짜라면. 내가 그를 하이재킹한 거라면. 그럼, 나는 누구지?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거울을 사이에 두고 분리되어 버린 두 개의 자아.

어긋난 거울을 바로잡기 위한 농밀하고 진솔한 고백의 여정.

현시대와 사회의 단면을 고발하는, 문드러진 한 사람의 심리 분투기




그달 모나 Monah thed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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