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어느 날, 거울 속 나에게 자아가 생겼다>, 작가의 말
세상과 화해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세상도 세상과 화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비교와 차별이 당연시되고, 사건 사고와 적개심이 난무하며, 증오와 분노가 만연한 현재, 사랑과 용서, 평화와 같은 도덕적인 말들은 위력을 잃은 지 오래입니다. 이론적으로는 무엇이 옳은지 모두가 알고 있으나, 슬프게도 옳다는 건 더 이상 아무런 설득력을 갖지 못합니다. 도색이 벗겨져 방치된 길가의 안전 표지판처럼, 모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지만, 존재를 인지하는 게 전부인, 흉물스러운 지형지물로 전락해 버렸죠.
오만하고 거북한 위선.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사랑과 용서를 변질된 말로 부르고 있는 듯합니다. 무언가를 품어내겠다는 자비로움은 현명함보다는 아둔함에 가까워져 버렸고, 온전히 떠안겠다는 결심은 선함보다는 이상함으로 해석되기 일쑤죠. 이런 못난 감정은 어쩌면 타성에 젖은 일상에서 기인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이미 매일 같이 번다한 압력과 독촉, 권위와 강압에 못 이겨 우리를 내어주고 있으니까요. 애쓰지 않아도 하루가 다르게 마모되는 중인데, 굳이 나서서 희생한다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건 날개를 잃은 천사이거나 모종의 계략으로 본분을 잊은 악마일 것입니다. 일단 이 땅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얘기죠.
그래서 화해가 적절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화해는 사랑보다 현실적이고, 용서보다 실용적입니다. 화해는 거창하지도, 선하지도, 대단치도 않기 때문에, 모든 것이 뒤틀린 지금 같은 시대에 적합한 해결책이라 여겨졌죠. 언젠가 화해를 했던 경험을 떠올려 보세요. 누군가와 화해했다고 해서 상대를 온전히 수용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영구적인 해결책이라기보다는 임시방편인 타협에 가까운 화해는, 그렇게 얄팍하고도 인간적입니다. 숭고한 희생도, 자애로움도 아닌, ‘아주 약간 이해해 보겠다는 다짐’일 뿐이죠. 이해하려는 노력이나 이해했다는 확신이 아닌, ‘한 번 이해해 보려는 시도’. 지금으로서는 그 정도가 딱 적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쁘고 각박한 세상에서 서로에게 그 이상을 요구하는 건 무례일지도 모르니까요.
화해를 위해서는 우선 주인공인 ‘나’를 둘로 갈라야 했습니다. 만화영화에서 발끝에 붙은 그림자를 오려내는 것처럼, 나에게서 나를 떼어내 서로에게 서로를 이해시키는 작업을 감행해야 했죠. 방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먼저 어떤 물건을 소유하고 있는지를 파악해야 하는 것처럼, 화해의 테이블로 나서기 위해서는 일단 나의 감정을 바로 알고 정돈할 필요가 있으니까요. 추하고 치졸하더라도 민낯을 보여야만, 비로소 화해에 한 걸음 다가설 수 있는 법입니다.
마스크 아래 숨겨져 있던 민낯은 한여름 뙤약볕에 눌어붙은 타르처럼, 찐득하고 불쾌했습니다. 글로 풀어내기 역겨울 만큼 더럽고 치사하고 이기적이었죠. 하지만 거머리같이 엉겨 붙은 감정들을 한 가닥씩 떼어내다 보니 모든 게 깔끔해지더군요. 모든 문제는 결국 숫자로 귀결되었습니다. 우리는 과열된 숫자들에 은은하게 화상을 입고 있던 것이었죠. 기호에 불과했던 숫자는 어느 순간부터 우리 안으로 점점 더 깊이 파고들었고, 불같이 뜨거워진 숫자의 열기는 우리를 속수무책으로 타오르게 했습니다. 열기는 광기가 되었고, 광기는 불안을 필두로 한 지하의 감정들을 해방시켰죠. 숫자는 종교를 대신했고, 권력을 대체했습니다. 숫자는 우리를 갈라 세웠고, 숫자로 빚어낸 가장 창조적인 발명품인 화폐는 많은 것들의 원인이 되었죠. 물론, 숫자가 아니었더라도 이 광기는 어떻게든 촉발되었겠지만, 작금의 광기에 숫자가 큰 공헌을 했다는 사실에는 누구도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과열된 숫자 경쟁에 대한 해법으로 고작 ‘화해’라. 사랑과 용서와 같은 이상적인 궤변들과 화해가 다를 것이 무엇이냐, 질문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화해는 생각보다 질기고 힘이 셉니다. 화해는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잃지 않도록 도와 주거든요. 영구적이지 않은 약속이므로 번복도 가능하며, ‘아주 약간 이해해 보려는 다짐’이기 때문에 여타 해법들보다 가성비와 가심비도 좋습니다. (요즘 시대에 가성비와 가심비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아실 겁니다.)
타인과 연결된 감각을 유지할 토대를 마련해 준다는 건 생각보다 중요한 일입니다. 관대와 궁핍을 좌우하는 건, 우습게도 아주 약간의 친절과 잠깐의 관용입니다. 마음은 생각보다 간사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요소들로도 금방 부풀어 오르고 가라앉죠. 여유와 괴팍함은 생각보다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매 순간 소용돌이치는 감정들을 문제없이 제어할 수 있는 이유는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 덕분입니다. 사회의 일원으로서 존재한다는 믿음, 용납될 수 있다는 가능성, 실외가 아닌 실내에 살고 있다는 확신은 성질머리를 잠재우고, 성마른 선택을 하지 못하게 막죠. 화해를 통해 약간이라도 수긍해 보려는 시도는 그래서 중요합니다.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졌다는 감각은 더 큰 가능성의 씨앗이 되어 주거든요. 서로를 추방하지 않겠다는 의지, 일단은 공존해 보겠다는 결단. 별거 아닌 결심들은 의외로 세상을 지탱합니다. 어차피 모든 새싹은 허술하고 엉성한 법이니까요.
매일이 온화하지는 못할지라도, 온건함을 잊지 않는 세상. 스스럼없이 반 발자국씩만 물러나 줄 수 있는 세상. 내가 사는 세상은 적어도 그런 방향을 목표로 하며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
* 소설 <어느 날, 거울 속 나에게 자아가 생겼다> 중 일부를 발췌한 글입니다.
평범했던 아침, 거울 속에 수상한 ‘내’가 등장한다. 겉모습부터 목소리까지 나와 도플갱어처럼 닮았지만, 독립적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별개의 인격체인 ‘그’. 그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눈을 까뒤집고선 뒤로 고꾸라져 버린다. 내가 미처 놀라기도 전에 먼저 선수를 쳐 버린 것.
하지만 어째서? 어떻게 몸을 훔쳐 간 도둑이 주인보다 더 놀랄 수 있는 거지?
정작 기겁해야 하는 건 나인데! 격분하고 경악해야 하는 건 나의 몫인데!
아니, 아닌가? 혹시, 혹시 내가? 아니다. 말도 안 된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있어선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모르겠다. 우리 중 대체 누가 ‘진짜’인 거지? 만약 그가 진짜라면. 내가 그를 하이재킹한 거라면. 그럼, 나는 누구지?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거울을 사이에 두고 분리되어 버린 두 개의 자아.
어긋난 거울을 바로잡기 위한 농밀하고 진솔한 고백의 여정.
현시대와 사회의 단면을 고발하는, 문드러진 한 사람의 심리 분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