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를 닮은 책방, 아카이브 나인
책이 대구에 입고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무려 두 군데의 서점에서. 그래서 대구로 갔다. 몹시도 단순한 이유에서 시작된 여행이었다.
여름의 초입이었다. 대구의 공기는 슬슬 들끓고 있었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그날의 대구는 산뜻하게 더웠다. 겨울과 봄 동안 잊고 있던 온도를 마주하자 비로소 대구에 도착했다는 게 실감이 났다.
난 대구에 가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대구라는 지역에서 철저한 외지인이라는 소리다. 나 같은 사람이 대구에 가면 가야 할 곳들과 해야 할 일들이 주로 정해져 있다. 타지에서 온 관광객이 하루 이틀 안에 가는 곳이야 뻔하지 않은가. 유명 관광지, 사진 스팟, 시장, 맛집 등. 빠르면 하루, 길면 이틀 안에 휘뚜루 마뚜루 보고 다시 올라가야 하는 빡빡한 일정의 경험들일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나는 그런 휘뚜루 마뚜루 일정에 매여 있지 않았다. ‘내 책’이라는 중대한 목표가 있었던 나는, 대구에 휴가차 온 다른 사람들과는 향하는 곳이 달랐다. 시장이나 관광지 대신, 대구의 좁다란 골목길, 사람들이 거주하는 주택가 근처를 거닐었다. 아마 책이 아니었더라면 평생 걷지 않았을 길, 보지 않았을 풍경들이었다.
호냐 불호냐를 묻는다면 난 당연히 호다. 개인적으로 여행을 가도 관광지보다는 주택가 산책을 더 좋아하고, 사진 찍는 것보다 동네 공원에서 사람 구경, 개 구경하며 빈둥대는 걸 선호하는 나로서는. 지역 주민들 틈 사이를 자연스레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좋은 핑계를 얻은 기분이었다.
오늘의 서점 ‘아카이브 나인(Archive.nine)’은, 대구시 달서구 진천동, 월배역 1번 출구에서 5분도 안 되는 시간을 걸으면 도착할 수 있는 곳이다. 서점과 디자인 문구샵을 겸하는 이곳은 2023년 4월에 문을 연, 신생 중에서도 신생 서점이다. 신생 서점은 매력적이다. 자신을 탐구하고 알아가는 성장기의 모든 존재들이 빛나는 것처럼, 이제 막 시작한 서점도 그렇다. (물론 당연히 새 단장을 했기 때문에 빛나는 것도 있다. 하지만 새롭다고 전부 빛나는 건 아니다. 특히나 새로운 서점은 특유의 남다른 빛이 있다. 패기 어린 눈빛이라고 하면 좀 이해가 되려나.)
먼지 한 점 없는 깔끔한 디자인의 초록 간판을 지나 지하로 내려가면, 격자무늬 창문과 원목으로 만들어진 문이 손님을 반긴다. 동화 같은 모양새의 하얗고 따스한 입구는 현대에 지어진 오두막, 세련된 프로방스의 느낌이었다.
몽글몽글한 감성을 지닌 나무 문을 열고 들어가면 깨끗하고 하얀 벽, 원목으로 짜인 가구들이 손님을 반긴다. 과장 조금 보태자면, 누군가의 방에 들어선 느낌이었다. 문구들이 많아서였는지, 원목 가구들과 격자 창문이 아늑함을 안겨 주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포근하고 아기자기한 서점의 분위기는 상업 공간이라는 느낌보다는 누군가가 막 입주한 가정집 같았다.
아카이브 나인은 독립서점이다. 기성 출판사에서 제작한 책이 아닌, 독립 서적들은 자신의 색깔을 뽐내고 있었다. 아카이브 나인에서 그들의 개성은 유독 강한 빛을 발했다. 독립출간 책들이 본래 개성 넘치긴 하지만, 아카이브 나인에서는 그들이 유독 더 강렬하고 감각적으로 다가왔다. 서점의 유난히 하얗고 밝은 조명과 책방의 심플한 인테리어, 책과 책 사이의 넉넉한 공간 덕에 각각의 책이 가진 진솔한 모습이 좀 선명하게 드러나는 느낌이었다.
판매를 위해 진열된 책들의 가장 아래 공간에는, 책방지기님의 개인 취향을 꾹꾹 눌러 담은 ‘책방지기의 두 칸’이 있었다. (사실 이건 실제 이름은 아니고, 내가 붙인 이름이다. 책장의 두 칸만 똑 떼서 책방지기님의 구역으로 만드신 게 귀여워서 ‘두 칸’이라는 이름을 붙여 봤다.) 자칭 ‘편식’이 심하시다는 책방지기님의 책들의 제목은 달콤하고 말랑했다. 디저트로 따지면 폭신한 수플레 팬케이크 같은 느낌. 아카이브 나인만의 ‘세련된 프로방스’ 느낌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 수 있던 순간이었다. 공간은 언제나 그를 만드는 사람을 따라가는 법이다.
그 옆에는 책방지기님의 취향을 엿볼 수 있는 또 다른 곳이 있었다. 이름하야 ‘잡지’ 구역. (이 역시도 실제 이름은 아니다.) 레트로 느낌이 가득한 동그란 의자들 사이에 늘어놓은 잡지 곁에는 ‘어디에서 쉽게 구하기 힘들다’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사실 디자인 잡지들에 대해서 잘 아는 바가 없어서 눈앞의 잡지들이 얼마나 희귀한지 가치를 알지는 못했다. 그래서인지 내게는 그 잡지들보다 희귀한 잡지를 책방 중앙에 가져다 놓은 누군가(=책방지기님)의 마음이 보였다. 희귀한 잡지이고, 그 가치를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의 손때가 묻을 곳에 선뜻 내놓기가 망설여졌을 텐데, 그런 신경은 쓰지 않고 방문객들을 위해 책방 가운데에 늘어놓은 것이 참 인상적이었다.
책방의 나머지 절반은 디자인 문구점이었다. 아카이브 나인에는 책만큼이나 문구들이 가득했다. 디자인 문구 작가로도 일하신 적 있다는 책방지기님은, 경력을 한껏 살려 다양한 문구들로 공간을 꾸며 놓으셨다.
디자인 문구샵이라고 하면 나는 가장 먼저 코엑스 등의 거대 복합 쇼핑몰 등에 있는 디자인 문구/소품 편집샵이 떠오른다. (참고로 나는 디자인 관련해서는 상당히 문외한이다.) 그곳들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감상은, 좀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예쁘지만 실용성은 잘 모르겠는’ 물건들이 모인 공간 같았다는 것. 슬쩍 건드려 보고, 감탄하고, 깔깔대며 대화하기 좋은 물건들이 많지만, ‘굳이 돈을 지불해 소유한다거나, 집에까지 가져가고 싶은 마음이 잘 들지는 않는’ 물건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건 편견일 수 있다. 그냥 ‘디자인 문구’라는 게 뭔지 잘 모르는 사람의 어영부영한 생각을 적은 것이니 감안해 주길 바란다.)
하지만 아카이브 나인은 그런 공간과는 조금 달랐다. 예쁜 것으로 이미 가치를 다 한 물건들도 분명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물건들도 곳곳에 진열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디자인’ 문구샵에서 파는 스티커, 포스트잇, 집게, 도장 등 꾸미기 용도의 물건들을 파는 게 아닌, ‘연필, 펜, 지우개, 가위, 풀, 테이프, 스테이플러, 연필깎이’ 등, 동네 문구점에서나 볼 수 있는 ‘진짜 문구’들을 팔고 있었다. ‘디자인’과 ‘문구’라는 두 가지 명칭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 ‘디자인 문구’들이 난 꽤 놀라웠다. 주택가 근처의 디자인 문구샵이 이렇게 다양한 모습으로 알차기란 쉽지 않은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몇 혹자는 ‘디자인 문구샵에서 진짜 문구를 팔고 있어서 충격이었다’는 말에 어이가 없는 웃음을 터트릴 거다. ‘디자인 문구에 대한 편견이 가득한 인간이구먼’이라며 혀를 찰 수도 있다. 혹은 문구 유행도 모르는, 트렌드에 둔감한 사람이라고. 촌스럽다고 비웃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이다. 정말 사실이니 비웃는다고 해도 딱히 반박할 말은 없다. 누가 뭐라고 할 때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다. 사실 나를 가장 먼저 비웃었던 건 나다. 서점에서 문구들을 구경하며 나는 내가 얼마나 문구 트렌드에 문외한이었는지를 피부로 깨달았다.
아카이브 나인에는 내가 생전 처음 보는 문구 브랜드들이 있었다. 책방의 한쪽 벽에는 원목 책장과 책상으로 만들어진 필기구 진열대가 있었는데, 그곳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연필, 펜, 지우개, 가위, 풀 등은 언뜻 봐도 깔끔하고 고급스러웠다. 투명한 유리 비커와 나무 그릇에 종류별로, 색깔별로 나누어 담겨 있어 더 고급스러워 보였던 것도 있다. 정갈하게 진열된 문구들 앞에는 각각의 브랜드 이름이 붙어 있었는데, 그들의 이름은 모두 하나같이 생소했다.
생소한 궁금증은 빠르게 풀어야 한다며, 난 문구 브랜드를 하나씩 검색창에 입력해 보았다. ‘팔로미노(연필, 미국 및 일본), 리라그루브(연필깎이, 독일), 펜코(집게, 일본)’ 등. 브랜드 이름을 하나씩 공부하면서 알게 된 건, 그들이 모두 문구를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곳이라는 사실이었다. 심지어 유명 포털 사이트에 이름만 검색해도 정보가 우후죽순으로 쏟아질 정도로 역사가 오래된 곳들이었다. 난 또 그렇게 세상은 넓고, 전문 분야는 넘쳐 난다는 사실을 깨우쳤다. 이렇게 또 한 번 책방을 통해 짧은 세상 지식을 넓혀 갔다. 책방은 정말 여러모로 지식을 넓히는 보고다.
필기류 진열대만큼이나 눈을 사로잡는 곳이 하나 더 있었다. 마스킹테이프를 정리해 둔 나무 진열장. 오와 열을 맞추어 늘어서 있는 마스킹 테이프들의 모습은 가히 대단했다. 동네 서점/디자인 문구샵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형태의 모습은 분명 아니었다. 그곳에는 ‘사이엔’과 ‘신지가토’의 마스킹 테이프들 있었는데, 난 그 브랜드들의 본고장인 일본에서도 그렇게 진열된 문구점을 거의 보지 못했다. 확실히 아카이브 나인은 자신만의 색깔을 가진 서점이었다. (아, 혹시 궁금한 사람이 있을까 덧붙이는데, 다행히 사이엔과 신지가토 브랜드는 이미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곳의 브랜드들 중 조금은 알고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도 약간 안도했다.)
이 밖에도 눈을 즐겁게 해 주는 디자인 문구들도 많았다. 스티커, 포스트잇, 파우치, 파일, 계산기, 시계 등. 누군가의 서재나 공부방을 꾸밀 때 유용한 물건들이 이곳저곳을 채우고 있었다. 카드와 포장지, 선물 상자와 같은, 누군가에게 건네는 마음을 부끄럽지 않게 만들어 주는 포장 소품들도 있었다. 아카이브 나인은 책이나 문구, 소품들을 사고서 바로 포장해 가기에도 알맞은 곳이었다.
‘경험을 통한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공간도 있었다. 이름하여 ‘커스텀 제작 공간’. 그곳에서는 아크릴 키링과 펜을 만들어 볼 수 있었다. 난 펜과 키링 중 키링을 만들었다. 펜이 더 실용적이긴 했지만, 펜은 예전에 모나미 스토어에서 만들어 본 적이 있어서 안 해 본 쪽을 택했다. 아크릴 조각들을 이것저것 조합하며 개인 맞춤형 디자인 키링을 만드는 시간은 나름 뜻깊었다. 어쩌면 나를 위한 게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한 키링을 만들고 있어서 그랬는지도 몰랐다. (그날 만들었던 키링은 누군가의 선물이었다.) 받는 이의 취향을 생각하며 이것저것 조합하다 보니 키링 안에서 받는 이의 얼굴이 보였다. 커스텀 디자인이 매력적인 이유다.
정신없이 공간을 구경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흘러 있었다. 마지막으로 내 책에 명함과 함께 안부 인사를 건넸다. 짧은 인사였지만, 난 그 손짓에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너 임마, 어? 잘 살아라, 임마. 같은.) 그리고 서점 한쪽 벽에 방명록 메모를 작성해 붙였다. 메모에는 ‘눈이 즐겁다’고 적었는데, 진심이었다. 정갈하고 잘 정리된 서점과 문구류, 그리고 조용하고 아늑한 분위기. 그곳은 눈이 즐거운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감성과 감각을 한 꼬집 넣어 만든 공간입니다.’ 아카이브 나인은 스스로를 그렇게 소개했다. 하지만 서점을 직접 다녀온 내 생각은 좀 다르다. 그곳의 ‘한 꼬집’은 흔히들 하는 손가락 깔짝임과는 거리가 멀었다. 책방지기님은 꽤 손이 큰 분이었다. 아카이브 나인의 모든 곳에는 감성과 감각이 ‘한 꼬집씩’ 흩뿌려져 있었다. 아마 다 긁어 모으면 마대 자루 하나는 넉넉하게 채우고도 남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하게 화려했다는 얘기는 아니다. 오히려 모든 곳에 딱 ‘한 꼬집’이어서 좋았다. 덕분에 책방은 가장 적당한 모습으로 매력적이었으니.
감각적인 세련됨과 아기자기한 귀여움이 공존하는 공간. 차분하고 고요했지만, 눈만큼은 끝없이 소란스러웠던 곳. 아카이브 나인은 화려한 꾸밈 없이도 짙은 매력으로 다가온, 그런 서점이었다.
- 그리고 좀 긴 P.S
: 책방을 나서며 나는 어김없이 책 한 권을 집어 들어 계산대에 내려놓았다. 책방지기님은 고작 한 권의 책과 하나의 키링을 구매한 손님을 위해 모든 물건을 꼼꼼하고 살뜰하게 포장해 주셨다. 선물 포장을 부탁드린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고른 책은 계산대를 거쳐, 선물이 되어 다시 내게로 되돌아왔다. ‘책을 구매하면 선물이 되어 돌아오는 곳이라니. 참 정 많은 책방이구나.’ 끊임없이 봉투 안으로 들어가는 ‘덤’들을 보며, 책방지기님께서 건네주신 비타민 음료를 받으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막연한 타지인의 오해였다. 그날 첫 번째 책방에서 마주했던 인심과 정은 대구에서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대구, 그곳은 참 놀라운 곳이었다. (대구의 넉넉한 인심에 대한 일화는 다음 글에서도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