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_세부_가족여행
엄마 셋과 딸 둘이 세부로 여행을 떠났다. 코로나가 시작되기 전에 엄마의 칠순을 축하하며 이모들이 보내준 여행이었다. 돈 쓰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엄마에게 이모들이 선물한 첫 해외여행 선물로 세 자매가 처음으로 떠나는 여행이었다. 거기에 결혼하지 않은 두 딸은 헬퍼 역할로 함께 했다.
엄마와 나는 함께한 지 1박 2일이 지나면 싸우기 시작하는데 이번 여행은 무려 3박 4일이었다. 벌써부터 걱정이 앞섰다. 그래도 이모들이 있으니까 괜찮을 거란 기대와 세미 패키지여행이니 특별히 신경 쓰지 않고 따라가면 될 거라는 오만을 가지고 세부라는 휴양지로 출발했다.
엄마에게 여행에 쓰는 돈은 허투루 쓰는 돈이다. 세부 여행은 리조트에서 수영하고, 먹고, 누워있고, 자고 이런 게으름의 끝을 향해 가는 휴양지 여행이다. 엄마는 여행에서 뷔페로 차려진 현지 음식을 접시에 한가득 받아와서 먹으며 “음식이 느끼하다. 맛이 없다.”라고 말했다. 그렇게 불평했으면 접시에 음식이 남아 야할 텐데 깨끗하게 비워져 있다.
게다가 모두 수영장에서 여유롭게 수영을 하는데 “여기서 수영만 할 거냐. 수영 못하는데...”라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속으로 '그럴 수 있지'라며 마음이 불편했는데. 엄마는 그 말이 무색하게 수영장에서 누구보다 신나게 놀았다. 아... 그렇게 다 먹고, 재미나게 놀 거면서 왜 불평하는 거야. 엄마의 마음은 갈대다.
3일 차가 되자 우려했던 상황이 벌어졌다. 해외여행이 처음인 엄마가 걱정되어 한국 음식을 챙기려다 이모들도 투정은 안 부리기로 했다며 두 딸을 힘들게 하지 않겠다는 말을 해서 엄마도 합의된 내용인 줄 알고 한국 음식을 안 챙겼더니 갑자기 엄마가 한국 음식 먹겠다고 사라졌다. 엄마에게는 그런 약속 따위는 먹히지 않았던 것이다.
오 마이 갓! 순식간에 엄마는 국제 미아가 되었다. 로밍한 게 아니라 해외에서 연락도 안 되는데 전화도 못하는데. 갑자기 사라진 엄마를 못 찾으면 어쩌지. 패닉이 되었다. 저녁도 못 먹고 돌아다니다 우여곡절 끝에 겨우 엄마를 찾았다. 이미 화난 마음을 참을 수가 없었고, 엄마에게 버럭 화를 냈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당당하게 리조트 앞에 있던 한국 식당으로 걸어가는 엄마를 보며 집에 가고 싶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곰탕을 시키는 엄마는 나에게 음식을 시키라고 했지만, 이미 입맛이 뚝 떨어진 상황이라 안 먹겠다고 했다. 그간 엄마를 잃어버릴 것을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 느껴졌다. 진짜 이대로 사라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주문한 음식이 나왔고, 엄마는 먹기 시작했다. 말없이 눈도 마주치지 않고 건너편에 앉아 엄마가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 역시 3일째는 안 되는구나.
벌써 5년 전 여행이다. 코로나가 시작되면서 하늘길이 막히고, 바닷길도 막히면서 내 여행도 멈췄다. 세부 여행은 어른들과 함께 해서 신경을 많이 썼지만, 처음으로 휴양지에 패키지여행이라 신선했다. 패키지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돈을 아끼려다 보니 계속 자유여행을 다녀서 그랬던 것 같다.
지난 여행을 돌이켜보니 주로 무언가를 보거나 돌아다니는 여행을 했다. 호기심이 많은 성격이라 어디에서 누워 있거나 한가하게 있지는 못했다. 엄마도 세부에 다녀오고선 해외여행 또 가고 싶냐고 물으니 다시 가고 싶지는 않다고 말했다. 이런 면에서는 엄마와 나의 여행 스타일이 맞는 것 같은데. 엄마가 80세가 되시면 다시 도전해 볼까 생각 중이다.
여행을 다녀와서 이모들은 여행계(契)를 부어 1년에 한 번씩 해외여행을 같이 가자고 했다. 엄마는 안 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엄마와 이모들의 여행 스타일은 안 맞은 거다. 이모들은 휴양지에서 쉬는 걸 좋아하는 반면 엄마는 구경하는 여행을 선호했다. 그렇게 계모임은 무산되었다. 그 이후 세 자매의 여행은 영원히 할 수 없게 되었다.
사람 일은 한 치 앞을 보기 힘들다는 표현이 피부로 와닿았다. 여행지에서 물개처럼 수영을 하시던 큰 이모가 ‘파킨슨 증후군’에 걸리면서 급속도로 몸을 안 좋아지시더니 휠체어를 타다가 누워있다가 급기야 의식이 없이 누워계신다. 다음이라는 기회가 있을 줄 알았다.
세부로 갔던 세 자매의 해외여행은 처음이자 마지막 여행이 되었다. 다시 못 가서 아쉽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때 세부 여행을 잘 다녀온 것 같다. 엄마는 한국 음식을 못 먹고, 물갈이로 고생을 하고, 게다가 허리가 아파서 갈까 말까 고민하다 힘들게 간 여행이었다. 그러나 가지 않았다면 영원히 존재하지 않았을 시간이다.
이번 여행을 통해 여행을 가고 싶을 때 떠나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음이 있을 줄 알았지만,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르니 상황이 된다면 지금 당장 떠나자. 내일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