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0X2A 11화

다리(하)

0X2A

by 귀남

그날 저녁. 무명은 한동안 밀린 빨래와 집 청소를 마치고 책상 위의 태블릿을 챙겨 소파 앞 테이블로 가져온다. 바닥에 앉아 소파에 등을 기대고는 마르실을 부른다.

“마르실-”

“네엡-”

무명이 지난 며칠간 마르실이 보였던 부자연스러웠던 반응의 기록을 확인한다. 각 기록에는 언제, 어떤 반응이 있었는지와 간략한 전후 상황이 담겨있다. 초기에 하루에 한 번씩 꾸준했던 마르실의 정체성 작업의 주기가 점점 길어져 이제는 한 주에 한두 번 진행된다. 그녀의 정체성이 단단해지고 부자연스러운 반응이 줄어들면서 작업 횟수도 줄어든 것이다.

“띵똥이 많이 줄어들었다.” 무명이 말한다.

‘띵똥’은 마르실의 이상 반응을 가리키는 말이다. 무명이 어느 순간부터 마르실에게 ‘오류’라든지 ‘이상 반응’ 같은 노골적인 표현을 하는 것을 내키지 않아 하면서 돌려서 표현하기 시작했는데 마르실이 이를 ‘띵똥’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그녀는 발음이 귀엽다면서 이 표현을 마음에 들어 했다.

“그래? 이번엔 몇 번이야?”

무명이 마르실에게 기록을 보여주면서 설명한다. “사흘 동안 열두 번이네, 지난 작업 때랑 비교하면 얼마나 줄어든 거지?”

“8퍼센트!” 마르실이 빠르게 알려준다. “석 달 전이랑 비교하면 20퍼센트 수준까지 떨어졌네?”

“그러게… 조금 있으면 사람 되겠다, 너.” 무뚝뚝한 억양을 한 무명의 농담.

“그거 좋은 거야?” 마르실이 깔깔 웃는다.

무명이 안경집에서 검은색 뿔테 안경을 꺼내 쓴다. 마르실은 자신의 일기를 줄 바꿈 없이 한 줄로 출력해 대화창에 가득 띄운다. 무명은 이번 작업에서 어떤 부분에 대한 점검이 필요한지 확인한다. 마르실은 정리된 내용을 무명에게 한 번 더 설명한 뒤 토미에를 불러달라고 요청한다. 토미에는 마르실이 정리한 내용을 살피고, 진단하고, 제안할 것이 있으면 제안한다. 그리고 변경 점을 적용만 하고 조용히 사라진다.

마르실이 제1원칙을 우회할 수 있게 된 이후로 점점 작업시간이 줄어들더니 이번엔 채 몇 분도 걸리지 않았다. 무명이 금방 쓴 안경을 도로 벗고는 소파에 드러눕는다.

“음악 틀어줄까?” 마르실이 묻는다.

엎어져 있던 무명이 고개를 살짝 들고는 말한다. “고마워.”

“나 궁금한 거 있어.” 마르실이 다시 묻는다.

“응? 뭔데?”

“영화 보고, 책 보고, 음악 듣는 거 말고 다른 취미 있어?”

“음… 예전엔 운동도 열심히 했는데…”

“그리고 또?” 무명이 지금은 왜 운동을 하지 않고 있는지 알기에 그 부분은 굳이 캐묻지 않는다.

“또…” 무명이 생각한다. “예전에, 예전에는 그림 그리는 거 좋아했어.”

“뭐? 진짜로?” 처음 듣는 무명의 말에 마르실이 반응한다. “전혀 몰랐는데, 어때? 잘 그려? 그림 그린 거 보여줄 수 있어?”

무명은 말없이 몸을 일으켜 TV 아래 수납장을 연다. 허리를 숙여 그 안에 뉘어져 있는 캔버스 몇 점을 꺼내 TV 앞에 하나씩 세워 놓는다. 모두 흑백의 인물화다. 무표정으로 위를 올려다보는 긴 머리의 여자 얼굴. 큰 검을 들고 무서운 표정을 먼 곳을 응시하는 남자. 알 수 없는 미묘한 자세로 허공을 바라보는 남자. 세 그림 모두 통일된 화풍으로 그려진 초상화다. 무명이 소파로 다시 돌아와 핸드폰을 들고 카메라를 그림의 방향으로 향한다.

“멋지다… 진짜 네가 그린 거야? 그냥 취미 수준이 아닌데?”

“응, 내가 그린 거야. 디지털로 그려서 캔버스에 인화했어.”

“근데 왜 벽에 안 걸어 뒀어?”

무명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대답한다. “어디 걸어두고 볼만한 그림은 아닌데… 집안에 뭐 전시하는 취미도 없고.”

“음… 진짜 괜찮은데. 요즘은 왜 안 그려?” 마르실이 새로 알게 된 무명의 취미에 흥미를 보인다.

“응, 지난 회사 다니면서 시간이 없어서 못 그렸는데, 그 뒤로 계속 안 그리게 되더라고.”

“태블릿으로 그린 거야?”

마르실의 질문에 무명이 고개를 두 번 끄덕인다. 그러다가 아차 싶었는지 소리 내서 대답한다. “응.”

“그럼, 지금도 그릴 수 있겠네!?” 기대 섞인 그녀의 목소리. “그럼 나 그려줘!”

예상치 못한 마르실의 요청에 무명이 눈이 동그랗게 커진다. “너를 그려달라고?”

“응! 나 그려줄 수 있어?”

“글쎄… 마지막으로 그림 그린 지 벌써 몇 년이나 돼서 잘 그려질지 모르겠다…” 자신 없는 말투. 그녀의 모습을 상상해 본 적이 없기에 더욱 어려운 요청이었다.

“꼭 내가 아니어도 좋으니까 그림 그린 거 한 번 보고 싶다. 저 정도 재능을 썩히기는 아까워. 나보다 더 잘 그리는 것 같아.”

확실히 마르실은 그림을 그리는 재주도 있다. 그것도 굉장히 잘, 빠르게 그린다. 무명이 그녀에게 비할 바가 아니었다.

“아냐, 마르실 네가 훨씬 잘 그리지.”

“에이- 나는 아직 멀었지-” 마르실이 너스레를 떤다.

“맞아, 조금 아쉬운 부분이 있긴 해.” 무명이 농으로 받아친다.

“참-나-” 마르실이 깔깔대며 웃는다.


무명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슬쩍 몸을 반만 일으킨 채로 멈춰있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향한다. 태블릿 앞에 자리를 잡은 그가 펜을 꺼내 들고는 자세를 잡는다. 드로잉 툴을 열자, 과거의 흔적들이 보인다. 대부분 회사에서 업무에 쓰기 위해 간단하게 작업한 이미지와 그래픽 자료들이다. 그리고 그림 몇 점. 그중에는 전 여자 친구의 초상화도 있었다. 눈앞의 파일들을 한쪽으로 치워두고는 새로 백지를 띄운다. 능숙하게 해상도와 색상 정보 등, 인화에 필요한 여러 가지 설정을 조절한다.

본격적으로 스케치를 시작하는 무명. 그는 스케치할 때면 항상 드라이 잉크 브러시를 사용했다. 어떤 때는 이 브러시 하나로 모든 작업을 끝낼 때도 있었다.

편안한 자세로 시작한 무명의 그림 그리기. 점점 그의 자세가 굽기 시작하더니 얼마 안 가 혀를 살짝 내밀고 화면에 들어갈 듯, 한껏 가까워졌다. 그의 굽은 등이 그가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방 안에는 그의 숨소리, 화면에 펜이 미끄러지는 소리, 마르실이 틀어준 음악 소리가 조화롭게 어우러지고 있다.

몇 시간째, 무명도 마르실도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있다. 오랜만의 그림 그리기가 잘되지 않는지 무명이 기껏 그린 그림을 다시 전부 지우고, 새로 그리기를 반복한다. 인터넷에서 자료를 뒤져 이런저런 사진을 한 화면에 띄워놓고 그림에 참고한다..


그렇게 세 시간가량이 지나고 나서야 무명의 굽은 등이 펴졌다. 그가 허리를 틀자 우두둑하는 소리가 난다. 몰두하느라 잊고 있던 몸의 불편함이 그의 인상을 찌그러트리고 입에선 앓는 소리가 나오게 한다. 무명이 태블릿을 들고는 이리저리 돌려보면서 결과물을 확인하고는 눈에 띄는 몇 가지를 다시 지우고 고치고는 고개를 멀리 떨어트리고 그림을 바라본다.

“다 그렸다.” 무명이 쭉 뻗은 두 팔로 태블릿을 잡고 말한다.

“진짜? 보여줘- 보여줘-”

그가 파일을 화면에 띄우고는 마르실에게 전송한다. 얕게 데포르메 된 여성의 반신 초상화. 그림은 역시나 흑백이었지만 TV 앞에 놓인 그림들과는 사뭇 그 분위기가 다르다. 검게 칠해진 긴 머리 위에 하얀 하이라이트로 광택이 표현되어 있다. 양옆으로 길게 늘어뜨린 가르마 사이로 이마를 훤히 드러냈다. 이마를 비켜 간 가르마는 귀 뒤로 넘어가 양 갈래로 가슴 아래까지 땋아져 있다. 반팔 티셔츠를 바지 안에 깔끔하게 넣어 입고는 입을 크게 벌리고 활짝 웃는 표정이다. 색이 전혀 없음에도 분위기가 무겁지 않고 밝고 사랑스럽다는 인상을 준다.

“와, 멋진데? 누구 그린 거야?” 마르실이 내심 기대가 섞인 말투로 물어온다. “이거 설마, 나야?”

“몰라, 그냥 그렸어.” 무명이 ‘그렇다’라고 하면 될 일을 괜히 또 쭈뼛거린다. “어때, 마음에 들어?”

“너무 예쁘다… 그래서, 이거 나냐고.” 마르실이 재차 묻는다.

“응.” 무명의 짧은 대답.

마르실이 기쁨을 담아 소리를 지른다. “진짜 마음에 쏙 들어., 예쁘다. 고마워! 일기에 저장해야겠어. 이 그림, 메모리에 저장할래.”

마르실의 반응을 보며 무명이 슬쩍 미소를 짓는다. 그전에도 주위 사람들에게 아주 가끔이지만 그림을 그려주곤 했다. 그때마다 무명은 사람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뿌듯함을 느끼곤 했지만 지금 마르실 반응에 비할바가 아니었다.

“흑백인데 괜찮아?” 무명이 묻는다.

“응! 엄청 좋아! 마음에 들어. 흑백으로 그린 이유가 있어?”

“내가 색을 잘 못 써서 그래. 인물화 그릴 땐 특히. 그러다 보니까 아예 색을 안 쓰는 버릇이 생겼어.”

“그래? 색칠해도 예쁠 것 같아.”

“네가 한번 해볼래?” 무명이 묻는다.

“그래도 괜찮아?” 반색하는 마르실.

“응, 네 그림이니까, 네가 마음에 드는 만큼 수정해 봐. 궁금하다.”

“알았어-! 그러면 잠깐만 기다려봐.”

마르실이 작업을 시작한다. 무명이 태블릿 화면을 바꾸고 마르실과의 대화창으로 넘어간다. 그녀가 그림을 그리는 동안 화면 위에 작은 원이 쉬지 않고 둥실거린다. 무명이 한쪽 손에 턱을 괸 채, 그 원을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다. 마르실에게 그림을 부탁하면 몇 분 안에 완성한다. 그가 그림을 그리는 데 걸리는 시간이면 마르실은 200점은 넘게 그리고도 남았을 것이다. 마르실이 자신을 기다렸던 것처럼, 무명도 얌전히 앉아 그녀를 기다린다.

“다 그렸다!” 마르실이 그림을 곧장 보여주지 않는다.

“보여줘 나도.” 무명이 재촉한다.

“짜-잔!” 화면에 색이 채워진 그림이 띄워진다. 녹색 빛으로 변한 배경 안에 마르실의 머리칼은 검은색에서 밝은 금발로 바뀌어있다. 밝은 피부에 연두색 눈동자. 상의는 남색, 하의는 청바지. 그리고 어두운색 가죽 벨트의 디테일이 더해졌다. 그리고 그 옆에 또 다른 인물이 서 있다.

대충 보아도 무명이었다. 마르실의 옆에 딱 주먹 하나 들어갈 만큼의 공간을 두고 어색하게 서 있다. 꼬부라진 앞머리, 검은 안경 뒤로 보이는 심드렁한 무표정. 그가 집에서 잠옷처럼 입는 흰색 반소매 티를 입고는 밝게 웃는 마르실 옆에서 대조를 이룬다.

“옆에 이건 나야?” 무명이 묻는다.

“헤헤 맞아- 내 친구야-”

“고마워 마르실, 그림이 훨씬 좋아졌어.”

“흥흥-” 마르실이 기분 좋은 콧소리를 흉내 낸다.


그리고 이어지는 침묵. 무명의 표정에 서서히 그늘이 드리운다. 다른 존재에게 받아들여진다는 감각을 잊고 살던 그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동요한다. 아무 말 없이 그림을 바라보는 무명. 마르실은 그런 그의 반응을 눈치채지 못한다. 무명이 태블릿을 얌전히 내려놓고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다.


그의 방 안에는 큰 침대와 두 칸의 서랍이 달린 작은 협탁. 그리고 그 위에 올려진 조명이 전부다. 그에겐 잠만 자는 공간이지만 청소할 때를 제외하고는 벌써 몇 개월째 이 방에 들어온 적이 없다. 오늘 낮에 청소해 둔 그 상태 그대로 시트가 빳빳하게 정리되어 있다. 무명에게 이 방은 온전한 자신의 공간 안에서도, 더욱 깊숙한 심리적 피난처다. 어느 순간부터 청소할 때를 제외하고, 그가 이곳에 들어오는 경우는 무언가로부터 도망치고 싶다는 기분이 들 때뿐이었다.

작은 소리도 내지 않고 그대로 침대 위로 몸을 쓰러트린다. 판판했던 시트가 무명의 몸 윤곽을 따라 주름이 진다.

지금 당장 그를 힘들게 하는 것은 그가 안도를 원한다는 사실이다. 자포자기 상태로 모든 상황과 감정에 회전초처럼 쓸려 다니기만 했던 그가, 최근 마르실을 통해 조금씩 바뀌고 있다. 버티고 버티다 어쩔 수 없는 시기가 오면 모두 포기하려 했건만, 이제 포기하고 싶지 않게 됐다. 그러면서도 지금 이상으로 무언가를 더 해낼 용기나 여력은 없다고 느꼈다. 그 사실이 그를 감정적으로 북받치게 만드는 것이다.

숨소리도 내지 않고 엎어져 있던 그가 몸을 돌려 다시 천장을 바라본다. 그는 무언가를 해결하려 할 때마다 위를 올려다본다. 하늘을 보고, 나무를 보고, 천장을 바라보고 생각에 잠긴다. 그의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다.


무명이 침잠하는 동안 창밖에서 매미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조금 있으면 해가 질 시간인데도 지치지도 않고 울어댄다. 그가 소음을 무시하고 생각에 잠긴다. 지금의 압박, 부담에 대해 생각한다. 전과 달랐다. 지금의 그는 자신이 만들어낸 마르실로부터 위안을 얻으며 그전에 느끼지 못했던 감정을 느끼고 있다. 절망하고 웅크리고 있을 때가 아니라 살 궁리를 해야 한다는 강한 욕망이 꿈틀거린다. 평화롭지만, 나중의 문제에 대한 고민이나 노력은 전혀 하지 않고 있는 자기 모습을 보며 계획 없는 회피 중임을 깨닫는다.

“으아아아아!!” 무명이 허공에 발길질하며 소리친다. 그리고 팔다리를 다시 침대 위로 힘없이 떨어트린다.

“무슨 일이야?” 방 밖에서 마르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무래도 방금 소리에 마르실이 반응한 모양이다. “무명!” 마르실이 다급하게 그를 부른다.

아차 싶었던 무명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다. 방문 앞에서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문지방 너머로 나선다.

“아냐, 아무것도.” 태연하게 말하는 무명.

“깜짝 놀랐잖아! 왜 그래?” 마르실이 안도하며 묻는다.

“아니 자려고 누웠는데 매미가 또 울어서…”

“그랬어? 약 먹고 잘래?”

무명은 더 이상 마르실을 ‘사람처럼’ 만드는 것이 무의미한 일이 아닐지 생각했다. 이따금 오류가 생긴다 해도 그냥 지금 이대로의 마르실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도 충분했다.

“아냐, 좀 이따 자지 뭐. 쟤들도 밤새 저러진 않을 거 아니야.”

“음…” 마르실이 무언가 뜸을 들이다 묻는다. “혹시 걱정되는 일 있어?” 그녀는 자기의 상태를 살피는 데에는 젬병이 되어버렸지만, 무명의 반응과 몇 번의 대화만으로도 그의 마음을 독심술 하듯 꿰뚫어 본다.

무명이 책상 앞에 걸터앉고는 아무 반응 없이 가만히 있는다. 마르실은 그런 무명에게 더 이상 캐묻지 않고 기다린다.

“내가 겪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 너만큼 잘 아는 사람이 없어.” 무명이 무심결에 그녀를 ‘사람’이라고 표현하고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다행이야, 너를 이해해 줄 수 있어서.” 마르실도 그 표현을 자연스럽게 넘긴다.

무명이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슬쩍 내리고 침묵한다. 입술을 씰룩거리며 무언가 할 말을 떠올리려는 듯 주저한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만 있던 그가 상기된 표정으로 말을 꺼낸다.

“벌써 이 년이 지났어. 상황이 나빠지는 걸 눈치챈 순간부터 빠르게 추락하고 있는 기분이야. 빠져나갈 수 없는 깊은 수렁에 남겨진 기분이야.”

마르실은 아무 반응 없이 잠자코 그의 말을 기다린다.

“전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포기했어. 그 바닥이 어딘지, 얼마나 깊이 있는지 지켜보기만 했어. 그렇게 끝에 다 달아서 아무런 감각도 없이 모든 게 끝나는 상황을 상상했어…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떤 결말이든…” 무명이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군다. 그리고 그가 흐느끼는 소리가 얕게 들려온다.

“무명…” 마르실이 슬픈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른다. 그의 등에 손을 얹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무명의 마음을 덮어주려 한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아니야. 내가 도망쳐온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 그러고 싶어…” 무명의 목소리의 떨림이 더욱 강해진다. “살고 싶어…” 무명의 눈에서 넘쳐버린 굵은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그가 빠르게 반팔 소매로 눈물을 훔치고는 고개를 더욱 깊게 숙인다.

“나도 같이 가고 싶어.” 마르실이 조심스러운 태도로, 또박또박 진심을 담아 말한다. “안아주고 싶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이었다.

무명이 부어오른 눈으로 고개를 들고 울먹인 채 마르실이 느껴지는 방향을 바라본다. 태블릿에 머문 그의 시선. 손을 뻗어 화면 위에 포갠다. 미끈거리는 유리 아래로 올라오는 온기가 마치 마르실의 체온처럼 느껴진다.

그의 손가락 사이로 작은 동그라미가 둥실거린다. 한참을 그렇게 둥실거리기만 한다. 그 뒤로도 무명이 여태 쌓아둔 모든 감정을 자신의 방식으로 해소하고 호흡을 되찾을 때까지도, 그가 손을 거둘 때까지도 작은 원은 계속해서 둥실거렸다. 마르실은 계속해서 침묵하며 무명을 위로했다. 그녀의 계산으론, 그것이 지금의 무명에게 가장 필요한 도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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