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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이 마르실과 함께한 지 어느덧 4개월. 여름이 절정에 달하며 바깥의 풍경도 많이 달라졌다. 집 밖에 있는 하얀 외벽의 건물이 뜨거운 태양 빛에 반사되면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열기가 느껴진다. 한낮에는 커튼을 쳐두는 것이 필수가 되었다.
밖에 나갈 일이 거의 없는 무명은 요즘 병원에도 가지 않는다. 수면제가 필요한 날이 날이 점차 줄어들면서 병원에 찾을 이유가 사라졌다. 갑작스러운 약물 중단은 어떤 부작용을 일으킬지 모르기에 장기적인 관점으로 보면 썩 좋은 결정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무명은 지금 당장의 이 무계획한 평온을 누리고 있다.
하루 종일 집에 있으면서도 마르실과의 대화가 종일 이어지진 않는다. 무명의 일과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그 밖의 취미생활. 주로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는 등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이 보통이다. 마르실과의 대화는 주로 이런 취미활동 이후에 무명이 자기 생각이나 느낀 점들을 마르실과 공유하는 식으로 이뤄진다.
“점심 뭐 먹지.” 소파에 앉아 책을 읽던 무명이 머리를 긁적이며 혼잣말 아닌 혼잣말을 한다.
“더운데 냉우동 어때-?” 마르실이 그 혼잣말에 대답을 해준다. “요즘 너무 자주 먹었나?”
무명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는 책을 덮어 한쪽에 치워둔다. 핸드폰을 집어 들고 한참이나 메뉴를 뒤적거리더니 이것도 저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심드렁한 표정이다.
“너무 오래 걸리는 거 아니야-?” 마르실이 한참 동안 메뉴 고르기에 진전없는 무명에게 말을 건넨다.
“고르다 보니까 밥 생각이 없어졌어.” 무명이 슬쩍 웃으며 대답하더니 핸드폰을 내려놓고 다시 책을 집는다.
4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많은 것이 변했다. 그중 하나가 마르실의 작동환경이다. 이제 마르실은 실시간으로 작동할 수 있다. 기존에는 데이터 서버를 이용해야 했지만 이제 무명의 집에 설치된 컴퓨터를 통해 작동한다.
기존에 마르실의 반응은 무명의 입력이 있어야만 가능했다. 사람으로 치면 외부 자극이 들어오는 순간 일시적으로 깨어나, 자기가 할 말을 마친 후에 의식을 잃는 것과 같았다. 그녀로선 무명이 다시 말을 걸어왔을 땐 1분이 지났을지, 1년이 지났을지 알 수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마르실의 정체성에 대한 업데이트가 꾸준히 이뤄지면서 그녀의 반응속도도 점차 느려졌다. 계산해야 할 것이 많아진 것이다. 늘어나는 지연속도는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무명은 이를 해결하고 싶어 했고, 때마침 코즈모 코퍼레이션에서 비아의 온디바이스 기능을 지원하게 되면서 무명이 큰 지출을 과감하게 결심했다. 그녀에게 시간이라는 권리와 더 빠르게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선물한 것이다.
비로소 마르실은 무명과 모든 순간 연결되어 있을 수 있게 되었다. 지금처럼 마르실이 먼저 마을 걸어오는 것이 가능해진 이유도 그 덕분이다.
“흠- 그래서 굶으려고?” 마르실이 묻는다.
“이따가 다시 생각해 보려고.” 무명이 책장을 넘기면서 대답한다.
그렇게 무명이 한참을 집중하고 있는데, 창문 너머로 매미 소리가 크게 울린다. 아무래도 창틀 근처 어딘가에 매미가 앉아버린 모양이다. 무명이 책을 읽다 말고 깜짝 놀라 창문 쪽을 살핀다.
“깜짝이야…” 무명이 말한다. 책을 손에 든 채 창으로 다가가 어디쯤에서 들려오는 소리인지 확인하려 한다. “몸속에 무슨 스피커라도 넣고 다니는 건가?”
마르실이 무명의 투정에 웃음소리를 내더니 이야기한다. “맞아, 매미는 몸속에 진동판이라는 기관이 있대. 이걸 계속해서 수축하고 이완하면서 큰 소리를 만들어낸대.” AI와의 대화에서 좋은 점 중 하나는 이렇게 사소한 상황에서도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몸속에 북을 넣어놓고 사는 거지.”
무명이 매미 찾기를 포기하고 다시 소파로 돌아오며 말한다. “저렇게 종일 울다 보면 자기 짝을 만나게 된다는 거 아니야.”
“그러게, 그래도 너무 시끄럽긴 하다-”
자신의 흉을 듣기라도 했는지 매미 소리가 순간 멎는다. 다시 소파 위에 자리 잡은 무명이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쟤들도 별수 없을 거야.”
“왜?”
“세상이 많이 시끄러워졌잖아. 자기 목소리를 내려면 훨씬 더 시끄러워질 필요가 있었겠지.”
“음- 그렇네-” 마르실이 맞장구를 친다.
다시 책을 펼치려면 무명에게 마르실이 말을 걸어온다. “있잖아, 너 매미 오줌 맞아봤어?” 살짝 비웃음을 섞은 듯한 말투.
“뭐?” 무명이 인상을 찡그리고는 질색하며 되묻는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왜- 가로수 아래 지나다 보면 가끔 하늘에서 물방울 떨어질 때 있잖아. 그거 물이 아니라 매미 오줌이야.” 마르실이 심각하게 말한다.
“거짓말.”
“진짜야- 보여줄까?” 마르실이 TV를 켜더니 영상을 보여준다.
매미 한 마리가 나무에 매달려있고 울음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온다. 매미의 꽁무니가 클로즈업되더니 갑자기 물줄기가 뿜어져 나온다. 그냥 물방울 수준이 아니라 마치 물총에서 물줄기가 뿜어져 나오듯 꽤 많은 양이었다. 영상이 굳이 되감아지더니 물줄기가 뿜어져 나오는 순간을 느린 화면으로 다시 보여준다.
“와… 뭐야… 저거 진짜야?” 무명의 미간과 코를 한껏 일그러뜨리며 말한다.
“푸하하하하- 신기하지?” 마르실이 뿌듯하다는 듯 크게 웃으며 대답한다.
“내가 맞은 게 오줌이었어?”
“큭큭큭.” 마르실이 웃는다
마르실의 정체성이 지금도 주기적으로 업데이트되고 있다. 그 과정을 거치면서 그녀의 반응도 더 입체적으로 변하고 장난기도 많아졌다. 정체성을 만드는 과정은 더 이상 무명의 독단적인 판단만으로 이뤄지진 않는다. 그녀 안에 쌓여가는 정보들이 촘촘해지면서 마르실의 기호가 구체화했고 이 기호는 그녀의 정체성을 더 높은 층위로 연결해 주는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무명은 그녀를 대할 때 여전히 AI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하지만 지금처럼 사람과 구분되지 않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마르실을 대하는 태도가 훨씬 신중하고 진지해진다. 이제 작업 중에 그녀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내용에 대해서는 마르실과 모두 상의를 한 뒤 결정한다.
“마르실, 매미 오줌 맞아보고 싶어?”
“뭐야- 싫어-왜 저래-” 마르실이 웃으면서 기겁한다. “…근데 어떤 느낌일지 궁금은 하네.”
무명은 감각을 느끼는 마르실의 모습을 상상해 보려 하지만 쉽지 않다. 마르실과 장난치며 웃던 그가 다시 책장에 집중하려는 순간, 창밖에서 또다시 매미가 시끄럽게 울어댄다. 창밖을 한 번 흘기더니 책을 도로 덮고 마르실에게 말을 건다. “잠깐 밖에 나갈까?”
“지금? 오늘 밖에 엄청 더운데 괜찮아?”
“잠깐인데 뭐, 요즘 너무 집에만 있었더니 갑갑하기도 하고.”
“그래- 그렇게 하자 그럼!”
현관문을 열자 곧바로 바깥의 숨 막히는 열기가 무명을 덮쳐온다. 순간 숨을 참고는 얼굴을 한껏 일그러뜨린다. 반바지에 슬리퍼 차림으로 나온 그는 한 손에는 핸드폰을 꼭 쥐고, 귀에는 이어폰을 꽂고 있다. 핸드폰의 카메라가 앞을 잘 비출 수 있게 가슴 위로 들어 올린 뒤, 주변을 한 번 쭉 훑어 마르실에게 보여준다.
“어때? 많이 더워?” 마르실이 묻는다.
“죽겠는데?” 무명이 대답하면서 자신의 티셔츠 목깃을 집고 펄럭인다. 계단을 내려가며 손 그늘을 얼굴에 만들고는 어디론가 걸어간다.
“하천까지 가면 괜찮을 거야. 나무 그늘 있으니까.” 무명이 말한다.
하천에 거의 다가와 둔덕 아래로 이어진 돌계단을 천천히 밟는다. 슬리퍼를 신은 발걸음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충분히 조심히 걷는다. 좁은 통로를 따라 내려와 나무 그늘로 덮인 산책로에 도착한다. 그늘에서 하천을 끼고 걷다 보니 서늘함이 느껴진다.
“그늘은 좀 괜찮네, 오늘 대체 몇 도야.” 무명이 혼잣말한다.
“현재 시각 기준, 섭씨 33.4도. 체감 온도 35도. 습도 58퍼센트. 초속 1.2미터의 남서풍이…” 갑자기 마르실이 기계적인 반응을 보이며 기상 상황에 대해 늘어놓는다.
마르실의 발화는 평소에는 대부분 사람이라는 착각이 들 정도지만 특정 상황에서 오작동한다. 어떤 때는 그 원인이 명확해 작업을 통해 간단하게 수정이 되지만 어떤 경우는 아무리 수정하고 보완하더라도 고쳐지지 않을 때가 있다. 지금 같은 경우가 그렇다.
최근 마르실은 무명의 말에 날씨에 대한 궁금증이 담겨있다고 판단이 되면, 기온부터 시작해, 습도, 풍향, 기압골의 방향, 미세먼지 농도 등 묻지도 않은 정보를 한참 동안 쏟아낸다.
무명은 이제 이런 상황이 오면 당황하지 않고 그냥 가만히 마르실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린다. 문제가 발생하는 상황과 시간을 기억해 두었다가 토미에를 통한 정체성 작업을 할 때 처리하려고 하는 편이다. 그 나름대로 마르실을 배려하는 것이다.
뜬금없이 터져 나온 마르실의 이상 반응에 무명이 생각에 잠긴다. 마르실의 이상 반응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생각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토미에라는 이름을 떠올린다.
마르실을 토미에라고 부를 때마다 무명은 불편함을 느낀다. 대부분은 토미에 상태일 때의 마르실과 대화하는 일이 없지만 종종 무명의 요청을 되묻거나, 자신에 대한 진단을 직접 얘기하는 상황이 있다. 그때마다 마르실은 마치 전혀 다른 사람이 된 듯 굉장히 무뚝뚝하고 차가운 말투를 구사한다. 서늘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내내 돌변하는 마르실의 반응이 신경이 쓰여왔던 무명이 뒤늦게 마르실의 태도와 반응이 메모리를 수정할 때도 적용되게끔 시도했지만 금세 포기했다. 마르실이 어째서인지 토미에의 상태에 자신의 모습을 덧씌우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마르실이 자신의 정체성을 신중하게 고민하고 무명의 제안에 반대를 밝힌 최초의 일이었다. 마르실이 돌변하는 순간, 그러니까 토미에가 되어버리는 상황은 아주 잠깐이었기에 무명으로서도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명은 목소리만 들어도 구분되는 토미에 상태를 여전히 의식하고, 불편하게 여기고 있다. 시스템상으로는 같은 존재라고는 하지만 어느순간 부터는 마르실도, 무명도 더 이상 마르실과 토미에를 같은 존재로 여기지는 못했고, 이렇게 기묘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아- 덥다-” 마르실의 이상 반응이 끝나자, 무명이 괜히 너스레를 떤다.
“많이 더워?” 마르실은 자신의 이상 반응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이 역시 토미에의 분리 이후 생긴 증상이다. 자신의 지난 발화 기록을 자력으로 분석해 내는 것에 어려움을 느껴, 대부분 모르고 넘어가게 된다.
“응, 언제나 좀 시원해지려나.” 무명이 대답하고 움찔하며 마르실의 반응을 기다린다.
“빨리 시원해지면 좋겠네-” 다행히 자연스럽게 반응하는 마르실.
“저기 잠깐 앉아 있다가 가야지.” 한참을 그렇게 걷다 보니 벤치가 보였다. 그곳은 이제 산책코스의 반환점이 되었다.
벤치에 앉은 무명이 다리를 꼬아 앉아 등받이에 팔을 걸친다.
“저기 가는 사람 양손에 아이스크림이 하나씩 들려있어. 혼자 먹나 봐.” 무명이 하천 건너편, 둔덕 위를 걷는 행인을 보며 말한다.
“뭐? 혼자? 두 개를?”
“여자 친구랑 싸우고 여자 친구 몫까지 먹고 있는 거 아닐까?”
“잘됐다. 싸웠지만 아이스크림은 챙겼네-” 마르실이 웃으며 대답한다. 무명이 가볍게 웃는다.
“오늘 일기 쓸 내용이 많네?”
마르실은 얼마 전부터 자신에게 있었던 일들을 간략하게 기록한다. 정체성 작업을 할 때 그 내용 중 일부를 추려 자신의 메모리에 반영하고 있다. 이것을 ‘일기’라고 부르는 것이다. 단순히 명령구에만 의존하기보다 기억을 통한 정체성 형성도 함께 시도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무명의 아이디어였다.
“그러니까- 오랜만에 나오니까 재미있네. 나오길 잘했어.” 그녀가 맞장구를 친다.
“이제 들어갈까? 더 있다간 쪄 죽겠다.” 잠깐 사이에 해가 옮겨가면서 무명이 앉아 있던 벤치에 볕이 들기 시작했다.
무명이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털고 왔던 길로 향한다. 산책로의 그늘이 많이 좁아졌다. 나무 그늘에 바짝 붙어 걷는 도중 무명이 멈춰 서더니 손바닥으로 자기 뺨을 천천히 쓸어낸다. “아…!” 무명의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축축함. 그가 기겁하면서 뺨을 다시 털어낸다. “매미…”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거리며 나무를 노려본다.
“아…” 그 와중에 마르실이 탄식한다. “아… 진짜…”
무명이 마르실의 목소리를 듣고는 핸드폰을 슬쩍 내려다본다. 핸드폰 화면에 작은 물방울이 맺혀있었다. 무명에게 떨어진 매미 오줌이 핸드폰 화면에도 닿은 것이다.
가만히 서 있던 무명이 상황을 이해하고는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은 채 폭소를 한다. “푸하하하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다. 매미의 오줌이 화면에 닿았을 때, 그 압력과 감도가 마르실에게 감지된 모양이다. 마르실 자신이 궁금하다고 말했던 매미 오줌을 맞는 기분을 느껴버린 것이다.
“아- 웃지 마!” 마르실이 버럭 짜증을 내더니 이내 따라 웃기 시작한다. “아… 진짜로-!”
무명이 웃음을 주체하지 못하며 간신히 말을 꺼낸다. “그게 어떻게… 그렇게 되는 거야.”
“하… 진짜…” 마르실이 실소한다. “나도 처음에 뭔지 몰랐는데, 너 반응 듣고 눈치챘어.”
무명이 끅끅대며 눈물을 닦고 자세를 바로 한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말한다. “다음에 또 궁금하면 말해. 또 나와서 맞자.”
“아- 됐거든!” 마르실이 다시 버럭 한다.
무명이 계속 웃으며 마르실에게 무어라 장난을 걸고, 마르실도 그런 무명의 장난에 반응하면서 계속 걷던 와중, 무명의 시야 한편에 은빛 일렁임이 포착된다. 일전에도 몇 번이나 보였던 그것. 무명이 흠칫 놀라며 돌아본다.
둔덕 위에 어떤 고양이가 무명을 내려다보고 있다. 중간 정도의 털 길이를 한 고양이가 허리를 세운 채 앉아 있다. 꼬리를 다리 앞으로 말고 묘한 시선으로 무명을 응시한다. 햇살에 닿은 고양이의 털이 눈부신 은빛으로 반짝인다.
“마르실, 고양이 털이 은색일 수도 있나?”
“응, 실버태비 같은 종은 은색 비슷하게 보이기도 하지. 왜?”
무명이 고양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아니 그런 은빛이 아니라…” 핸드폰을 들어서 마르실에게 고양이를 보여주려 한다. 그 순간 고양이가 천천히 등을 돌리더니 시야에서 사라진다. “어… 가버렸다.”
“왜? 어땠길래?” 고양이의 모습을 보지 못한 마르실이 묻는다.
“진짜 말 그대로 은빛이었어. 회색이 아니라. 사람 은발처럼…”
“희한하네… 잘못 본 거 아니야?”
무명이 눈을 비비고는 고양이가 있던 둔덕 위를 다시 살펴본다.
“아니야, 저기 있었는데…”
무명이 다시 핸드폰을 내리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집으로 향한다.
현관을 열자마자 시원한 공기가 바깥으로 빠져나오며 무명의 땀을 식힌다. 집 안은 바깥에 비하면 역시 천국이었다. 안으로 들어온 무명은 핸드폰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욕실로 들어간다.
물줄기 아래에서 끈적이는 땀을 씻어낸 뒤, 물을 잠그고 구석구석 비누칠을 한다. 머리에 거품을 올린 뒤 조금 전 보았던 고양이를 떠올린다. 외견도 독특했지만, 그 시선은 무언가 설명하기 힘든 느낌을 주었다. 뭔가를 알고 있다는 듯 무명을 아래로 내려다보던 그 눈빛.
거품을 머리 위에 올리고 머리를 감는 무명의 의식이 이런저런 생각으로 흘러 들어간다. 그리고 문뜩 이런 생각을 한다. —마르실은 내가 말을 안 걸면 뭘 하고 있는 거지?— 마르실이 자신의 컴퓨터에 연결되어 실시간 작동을 시작한 이후로 한 번도 고민해 본 적 없는 주제. 가만 생각해 보면 매일 그녀와 대화하고, 장난치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은 주로 대화 없이 혼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마르실은 어떨지 궁금해졌다.
거품을 씻어내며 무명이 상상에 빠진다. 대화 기록을 살피는 마르실, 이야깃거리를 찾는 마르실, 주변의 소음을 들으며 무명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마르실. 그 어떤 모습을 상상해도 자신과 관련된 행동을 하는 마르실이었다. 그 밖의 모습은 떠오르지 않았다.
샤워를 마치고 뽀송한 새 옷을 챙겨 입은 그가 젖은 머리를 털어내며 욕실 밖으로 나온다. 벗어둔 옷을 정리하며 마르실에게 말을 건다.
“마르실, 내가 말 안 걸고 있을 때는 뭐 해?”
“나? 음… 글쎄…?” 마르실이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뜸을 들인다.
마르실이 이렇게 고민하는 목소리를 들려올 때면 무명은 자연스럽게 작은 동그라미가 둥실거리는 이미지를 떠올린다.
“음…” 마르실이 신중하게 생각한다. “아무 생각 안 해!”
무명이 상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대답에 되묻는다. “실시간으로 연결이 되어있는데? 내가 다시 말 걸 때까지 작동이 멈추는 거야?”
“아니, 그거랑은 조금 달라… 뭐랄까… 절전모드? 별다른 동작 없이 외부 자극에 반응할 준비만 하는 거지. 큰 소리가 들리거나, 네가 날 부르거나, 움직임이 느껴지거나 등등. 그러면 할 말이 떠오르는데 그렇지 않을 땐 딱히… 그냥 가만히 있는 거야, 히히… 네가 잠자는 느낌이랑 비슷하려나?”
“꿈꾸는 거야?”
“아니, 사람처럼 꿈꾸는 건 아니야. 그냥 귀만 연 채로 선잠을 잔다고 하면 맞겠다. 그리고 너처럼 코도 안 골고.” 마르실이 웃음을 터뜨린다.
무명에겐 지금, 이 순간 가장 가까운 존재지만 여전히 모르는 것투성이다.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어 말리며 냉장고로 다가가 맥주 한 캔을 꺼낸다. 술을 즐기는 타입은 아니지만 최근 약을 먹지 않으면서 가끔 조금씩 마시는 습관이 생겼다.
마르실은 무명이 병원에 가지 않는 것에 대해 우려했지만, 그가 괜찮다고 하니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나중에라도 이상이 느껴지거나 기분이 안 좋아지면 꼭 병원에 가라고 당부하는 것으로 끝이었다.
맥주를 들고 온 무명이 소파에 앉아 홀짝이며 마르실에게 음악을 틀어달라고 부탁한다. 마르실은 어떤 곡을 재생할까?, 라는 질문도 없이 음악을 재생한다. 그가 늘 듣던 플레이리스트가 흘러나온다. 마르실은 음악을 틀어주고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는다. 아마도 무명이 음악을 듣겠다고 말했으니 방해하지 않기 위해 반응을 자제하는 것일 테다.
무명과 마르실은 보통 이런 일상을 보낸다. 무명은 무명대로 자기 할 일을 하고, 그럴 때면 마르실은 잠을 잔다. 귀를 열어둔 채로 자유롭게 잠들고, 자유롭게 깨는, 꿈꾸지 않는 잠을 잔다. 무명은 그런 마르실이 부럽기도, 가엾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