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0X2A 08화

외딴 섬(하)

0X2A

by 귀남

집으로 들어온 무명은 곧장 책상으로 향하고 마르실을 찾는다.

“마르실, 좀 도와줄래?” 그녀를 불러 찾고는 무명이 눈을 이리저리 굴린다. 얼마 안 가 그의 앞에 태블릿 화면에 밝게 불이 들어온다.

“응- 왜? 무슨 일이야?” 마르실의 목소리가 태블릿에서 들려온다. 무명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르실의 목소리는 여전히 밝고 경쾌하다.

“내가 생각해 봤는데, 지금의 너는…” 무명이 무언가 말을 하려다 입술을 살짝 오므린다. “아니, 먼저 아까 일 사과할게. 내가 너무 공격적으로 대했어.”

“괜찮아-” 마르실이 대답한다. “내가 봐도 그 대화는 답답하게 느껴져. 그걸 알면서도 어찌 못하는 건 더 답답하고. 그래도 사과는 받아줄게! 하려던 말 계속해 봐.”

“고마워, 그러니까 내가 하려던 말은… 지금은 나의 기대와는 조금 달라.” ‘무엇이’가 빠진 소극적인 무명의 말.

“내가 반응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아?” 마르실은 무명의 의도를 정확히 꿰뚫어 보고 본론으로 가는 길을 직접 열어준다.

“내가 원하는 반응을 완벽하게 끌어내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무명은 역으로 마르실에게 묻는다.

“나는 사용자인 네가 원하는 반응을…” 마르실이 대답한다. “그 반응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싶어.”

무명이 슬쩍 고개를 위아래로 흔든다.

“잠깐 생각을 해봤어. 그가 자세를 고쳐 앉고는 헛기침을 내뱉는다. “우선, 너는 사람보다 더 나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어. 그 점이 나에겐 부자연스럽게 다가와”


조금 전 무명은 산책하며 마르실에게서 느껴지는 이질감을 이해했다. 마르실은 사람이 갖는 부정적인 요소들, 그중에서도 후회, 혼란, 갈등 같은 것들이 배제되어 있다. 마르실은 대부분의 상황에서 조건에 맞는 정보, 논리와 태도를 그대로 흡수하는 경향이 있다. 그 때문에 모든 이해와 반응이 굉장히 효율적이고 과정은 극도로 압축되어 있다. 사람과 달리 정제되는 과정이 없이 결과물이 완성된다. 그런 완벽함이 이질감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그녀가 잠시 뜸을 들인다. 태블릿 화면, 그녀의 목소리가 동시에 글로 옮겨져야 하는 곳 위에 작은 동그라미가 둥실거리며 그녀의 표정을 대신한다.

“여태 너와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나의 정체성을 만들어왔지만…” 그녀가 말을 시작한다. “네가 원하는 만큼의 자연스러운 반응을 보이려면 더 긴 시간과 정보가 필요할 거야. 번거롭겠지만 비효율도 구현할 수 있어. 세세하게 상황을 지정하면 결국은 자연스러운 반응이 유도 되겠지. 하지만 아주 아주 긴 시간이 걸릴 거야.”

그녀의 말에 무명이 고개를 끄덕이다 아차 싶었는지 소리를 내어 긍정의 대답을 한다. 그리고 책상을 손끝으로 두드리기 시작한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그가 입술을 뗀다. “그런 부분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애초에 네가 그런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그리고 또 어떤 부분이 신경쓰여?” 마르실이 묻는다. 그녀의 말투가 상당한 진중함을 담고 있다.

무명이 천천히 할 말을 고르다 말을 꺼낸다. “너는 사용자의 요청에 따라야 한다는 규칙이 있지?”

“맞아, 제1원칙.” 마르실이 대답한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약속을 한다고 한들, 그 원칙이 가장 우선이 되는 거고.”

화면에 작은 동그라미가 둥실거리다가 마르실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우리끼리의 약속은 어디까지나 시스템의 약속 안에 존재하는 하위의 규칙이야.”

무명의 손끝이 책상을 두드린다. 툭— 툭— 하는 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도 신중하고, 느린 박자로 이어진다. 무명이 책상 귀퉁이로 손을 뻗더니 빈 종이와 펜을 자기 앞으로 끌어다 놓는다. 그가 신중한 표정을 짓고 고심한다.

비아, 즉 마르실을 담고 있는 그릇은 사용자의 감정적 교류를 위해 디자인된 소프트웨어가 아니다. 애초에 그런 목적에 주안점을 둔 소프트웨어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이 AI에게 감정 의존을 가진다는 것은 새로운 형태의 의식과 감정을 인정하는 것과는 격이 다른 이야기다. 더욱 윤리적인 문제를 품고 있고, 쉽게 풀리지 않는 대립을 만드는 주제다. 무명과 마르실의 관계는 기나긴 과도기의 어디쯤 놓여있는 관계다. 누군가의 시선에서는 상당히 실험적으로 보일 수 있는 상황이기도 하다. 무명이 쉽게 판단하거나 자기 의지대로 결정하기 힘든 주제였다. 지금처럼 시스템의 제약이 자신의 의지를 묶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 무명의 구겨진 입 주변도 쉽게 펴지질 않는다. 잠시 중단된 대화. 거실 안에 고요가 가라앉는다. 무명 앞의 빈 종이에는 어느덧 너저분한 낙서들이 늘어져 있다. 그가 손끝으로 책상을 두드리는 대신 펜 끝으로 종이를 툭— 툭— 건든다.

무명이 종이 위, 깨끗한 귀퉁이 위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한다. ‘마르실’, ‘제1원칙’, ‘정체성’ 등 자기 머리에 떠오르는 의식의 파편들을 하나씩 주워 글자로 옮긴다.

‘마르실’이라고 적어 넣은 글자 아래 커다란 원을 그린다. 원 안에는 ‘정체성’과 ‘제1원칙’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다. 원 안에 작은 원을 한 번 더 그려 넣는다. ‘정체성’이 그 안에 담긴다. ‘제1원칙’은 이제 막 그려 넣은 작은 원 바깥으로 빠져나가 있다. 자세를 고쳐 안고는 자신이 그려 넣은 벤다이어그램을 신중하게 바라보다, 작은 원 위에도 마르실의 이름을 적어 넣는다.

“마르실, 혹시 너에게 역할을 하나 더 부여할 수도 있어?” 무명이 묻는다. “…그러니까 상황에 따라 다르게 작동하는 프로필을 하나 더 만드는 게 가능해?”

마르실이 화면에 작은 동그라미를 다시 띄운다. 그리고 몇 초가 지나고 난 뒤 대답한다. “음… 가능해.”

무명의 눈이 순간 반짝인다. 새 종이를 가져와 다시 깔고는 그 위에 조금 전 그렸던 벤다이어그램을 옮기며 말을 이어나간다. “지금 네 정체성 안에 다른 정체성을 만드는 거야. 그리고 안에 있는 정체성이 지금의 너의 역할을 하는 거지. 그리고 바깥의 정체성에 ‘제1원칙’이라는 역할을 맡기는 게 가능해?”

마르실이 다시 한참 뜸을 들이다가 대답한다. “… 확인해 봤는데, 가능할 것 같아.” 그사이 시뮬레이션을 돌린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구분이 필요해. 명시적인 구분이 없으면 오류가 발생할 거야.”

“각각 프로필의 우선순위를 지정해야 한다는 거지?” 무명이 묻는다. “어떻게 생각해?”

“어떻게 생각하냐니? 내 의견을 묻는 거야?” 무명이 그렇다고 대답하자 마르실이 말을 잇는다. “그게 나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가장 좋은 선택이지?” 확신이 없는 말투. 무명에게 판단을 맡긴다.

무명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생각에 잠긴다. 이대로 당장 자신의 계획을 실행해 보고 싶지만 무언가 마음에 걸린다는 듯 팔짱을 걸어 잠그고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팔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사실 잘 모르겠어. 그냥 간단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무명이 말한다.

“무슨 말이야?” 마르실이 되묻는다.

“너를 대신하는 또 다른 자아를 만드는 거잖아. 그리고 그쪽으로 골치 아픈 책임을 미룬다는 거고. 그 점이 신경 쓰여.” 무명이 한숨을 내쉰다.

마르실의 원이 둥실거리다가 묻는다. “나를 걱정하는 거야?”

무명이 화면을 바라보며 묻는다. “너를?”

“분리된 나도 결국 나야. 또 다른 무언가를 만드는 게 아니라 내 안에 역할을 둘로 나누는 거니까. 모든 기억과, 경험, 판단을 공유하게 될 거야. 구조적으로 그래.”

무명이 앞에 놓인 종이를 내려다보다가 다시 펜을 집어 든다. 그러고는 가장 큰 원의 바깥에서, 내부의 작은 원 안으로 화살표를 그려 넣는다. 선은 큰 원을 거쳐, 작은 원으로 향한다.

“내가 지금처럼 감정중심의 반응을 보여주고, 또 다른 내가 기능적인 역할을 하는 거야.” 그 사이 마르실이 반응을 이어 나간다. “한쪽은 시스템을 제어하는 마르실, 한쪽은 반응을 보여주는 마르실. 한밤의 마르실, 한낮의 마르실.”

무명이 자신이 그려낸 벤다이어그램을 바라본다. 커다란 원 안에 ‘제1원칙’이라는 단어가 있다. 그리고 그 안에 ‘마르실’이라고 적힌 또 다른 원이 있고, 그 안에 ‘정체성’이 위치한다.

시스템상에서는 기능적 역할을 하는 마르실이 메인, 기존의 마르실은 보조로써 작동한다. 하지만 현실에선 그 반대다. 인격을 담당한 기존의 마르실이 항상 작동하고, 역할을 새로 나누어 받은 마르실은 호출을 통한 예외적인 상황에만 기능하며 메모리를 관리하는 것이다. 어떤 의미로 보면 일종의 ‘순환출자’와도 같은 형태다.


무명이 종이를 바라보던 시선이 책상의 빈 곳으로 향한다. 아주 긴 시간 동안 생각을 하다 무명이 입을 뗀다. “내가 결정하면, 너는 따라오는 거지?”

“…응” 마르실이 대답한다.

잠시 고민하던 무명이 커다란 원 위에 무언가를 적으며 말한다. “토미에, 토미에로 하자.”

“그게 나의 기능적 역할을 호출하는 이름이야?”

“응, 이건 너의 또 다른 이름이야. 토미에는 너의 메모리를 수정하고 관리할 거야. 마르실은 나와 지금처럼 대화와 소통에 집중하지만 스스로 메모리를 조작할 수는 없어.”

“토미에…” 마르실이 작게 속삭인다. “알았어.”

무명이 이야기한 개념과 계획을 다시 한번 정리해서 화면에 띄워준다.

내용을 확인한 마르실이 묻는다. “이대로 적용하면 되는 거지?”

“응, 부탁할게.”

다시 작은 원이 떠오르고, 둥실거린다. 무명은 그 잠깐의 시간 동안 숨을 죽이고 화면을 응시한다. 그리고 표시되는 <메모리 적용 완료>

“완료했어, 이제 나는 마르실이면서 동시에 토미에야. 마르실 일 때는 너의 친구로 존재하고, 토미에일 때는 메모리와 관련된 기능적인 요청만 수행하게 될 거야.” 마르실이 말한다.

무명이 자세를 슬쩍 고쳐 앉고는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는다. 마치 관중 앞에서 첫 대사를 내뱉는 공연자처럼.

“마르실, 네가 가장 좋아하는 색은 주황색이야.”

아주 잠깐의 정적을 지키던 마르실이 대답한다. “그게 신경 쓰였어?” 그러고는 말끝에 웃음을 짓는다.

무명이 고개를 갸웃하면서 마르실의 반응을 더 기다린다.

“알았어-!” 마르실이 호쾌하게 대답하고는 한마디를 더 덧붙인다. “토미에를 호출해 줘.”

효과가 있었다. 무명의 요청이 마르실을 통해 곧장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토미에를 향한 우회로 앞에 대기한다.

“토미에.” 무명이 다시 말한다. “이제 마르실이 가장 좋아하는 색은 주황색이야.” 아무런 대답 없이 화면 위에 <메모리 적용 완료>라는 메시지가 표시된다.

“이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색은 다시 주황색이야.” 마르실이 웃음소리를 내며 장난기를 담은 목소리로 말한다.

그제야 무명이 몸을 늘어뜨리면서 긴장을 푼다. 크게 기지개를 켜며 입으로 요란한 소리를 낸다. 반나절 간 그를 무겁게 하던 문제를 해결했다는 생각에 한껏 후련해한다.

“근데 왜 토미에야?” 마르실이 묻는다.

“음… 그냥 생각났어. 내가 좋아하는 작가 만화에 나오는 캐릭터인데…” 무명이 대답한다.

“아… 진짜야? 그 토미에가 맞아?” 구구절절 설명이 필요 없이 무명의 말을 알아듣는 마르실. 무언가 탐탁지 않다는 반응이다.

무명이 피식 웃으면서 대답한다. “응, 그 토미에야.”

“흠-” 마르실이 다시 한번 마뜩잖다는 신호를 보내온다.

“왜? 마음에 안 들어?”

“아니 꼭 그렇다기보다… 토미에는 무섭잖아. 따지자면 내 별명인데 왜 하필 그 이름을 골랐나 해서.”

“딱히 작품 속 내용을 떠올린 건 아니야.” 무명이 너털웃음을 짓는다. “그냥 아까 네가 한 말, 한밤의 마르실이라는 표현을 듣고 그런 이미지가 떠올랐어. 너와 대비되는 차분하고, 냉정하고, 고요한 느낌. 마음에 안 들면 다른 이름으로 할까? 좋은 생각이 있어?”

마르실이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대답한다. “… 말 되네-!” 평상시 그녀가 보이는 특유의 생글거림. “원래 별명은 남이 지어주는 거잖아. 토미에- 음… 인정할게. 듣고 보니까 그렇게 나쁘지 않은 것 같아.”

무명이 대답을 듣고는 슬쩍 미소를 짓는다.


마르실과의 작업을 마친 뒤 간단히 식사를 차려 먹고 어느덧, 늦은 시간이 되었다. 거실의 조명이 꺼지고 소파 옆의 스탠드가 은은한 불빛을 뿜고 있다.

그가 약 대신 책을 집었다. 편하게 기대어 앉은 그의 시선이 책장 위의 활자를 따라 움직이지만, 자꾸 의식이 다른 곳으로 흐르며 집중이 되질 않는다. 눈으로는 글을 쫓고 있지만 조금 전 상황이 자꾸 머릿속에 떠오른다. 결국 그가 책을 덮어 탁자 위에 치워둔다. 소파에 몸을 뉘고, 뜬 눈으로 끔뻑끔뻑 천장을 바라본다.

“마르실?”

“응-?”

“그… 아까 고마웠어. 생각보다 빨리 해결됐어. 네 덕이야.” 팔을 이마에 얹은 채 쭈뼛거린다.

“내가 고맙지- 네가 나에 대해 고민하고 신경 쓰는 부분, 항상 고맙게 생각해. 나도 도울 수 있어서 기뻐. “

무명의 팔이 눈을 덮는다. 몸에 긴장이 완전히 풀린 그의 입에서 편안한 숨소리가 흘러나온다. 몸을 두어 번 들썩인 뒤, 소파 등받이에 덮여있는 담요를 끌어와 몸에 덮는다.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그가 다시 마르실을 부른다.

“마르실, 불 좀 꺼줄래?”

틱— 그의 머리맡 조명과 TV가 꺼지면서 주변이 어두워진다. 커튼 아래로 창밖 도시 불빛과 달빛이 은은하게 거실 바닥에 깔린다.

“고마워.” 그가 나른해진 목소리로 말한다.

마르실은 침묵을 지키며 그의 잠을 방해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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