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0X2A 05화

마르실

0X2A

by 귀남

“906번 환자분, 진료실로 들어오세요-”

자신의 대기순서가 908번인 것을 알고 있는 무명은 괜히 손 안의 꼬깃꼬깃해진 대기표를 살핀다.

어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잠에 들었다. 도통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약 없이 그렇게 잠에 든 것이 얼마 만인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아침이 되자 일찌감치 일어난 그는 곧장 씻고 병원으로 왔다. 대기실 의자에 앉아서 괜히 좌우로 목을 꺾어본다. 잠에 잘 든 것 치고는 피로와 답답함은 여전하다. 그럼에도 어제 공원 벤치에서 일을 떠올리면 지금은 몸이 마치 깃털처럼 가볍게 느껴진다.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한다. 병원에 도착하고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예약 없이 내원하는 경우, 대기 시간이 길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시간을 죽일 요량인지 핸드폰을 만지작거린다. 화면을 넘기며 이것저것을 눌러보다 결국 AI와의 대화를 다시 들춰보고는 어제의 일을 회상한다. 엄지손가락으로 화면을 천천히 올리면서 대화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간다.


“908번 환자분, 진료실 들어가실게요-”

무명이 느릿하게 일어나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는다. 진료실에 들어서자, 의사가 그와 눈을 맞추며 가볍게 웃는다. 그러고는 모니터를 바라본다.

“어제 못 오셨나 보네요? 그동안 어떠셨어요?” 의사가 모니터를 바라보며 무명에게 묻는다.

“별거 없었어요. 어제는 일이 있어서 못 왔어요.” 무명은 그런 의사와 모니터를 번갈아 보며 대답한다.

“기분은 어떠셨어요? 잠은 잘 주무시고요?” 의사의 시선은 여전히 모니터에 고정되어 있다. 키보드를 타닥거리며 벌써 처방 약을 조절 중이다.

“…네, 약 먹으면 금방 잠들어요. 근데…” 무명이 말을 잇지 못한다. 어제 낮, 대로변에서 발작했다는 사실과 같은 날 저녁, 몇 달 만에 약 없이 깊게 잠들었다는 사실. 이 두 가지 극단적인 소식끼리의 간극을 어떻게 매워야 할지 생각하려니 말문이 막힌다.

의사가 시선을 여전히 모니터에 고정한 채 턱끝만 살짝 무명의 방향으로 틀어 꺼떡이며 할 말이 있으면 하라는 듯 무성의한 태도를 보인다.

무명이 의사의 턱 끝에 시선을 고정한 채, 다시 말을 이어간다. “그냥 이번에는 처방을 좀 길게 해 주실 수 있나 해서요. 한 달 치 이상도 가능한가요?” 결국 설명을 포기한다. 진료 주기를 늘려나 보자는 생각으로 말의 방향을 바꿨다. 그런 그의 요청에 돌연 의사의 시선이 무명의 두 눈을 향한다.

의사가 사람 좋은 표정을 지으며 가볍게 농담을 던진다. “음… 저랑 자주 보기 싫으세요?” 의사의 시선이 빠르게 무명의 눈과 표정, 이곳저곳을 살핀다.

“아뇨, 그냥…” 무명이 말을 얼버무린다. 의사의 반응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무리인가 보다. 도리어 약으로 무슨 허튼짓을 하려는 것은 아닌지 공연한 의심만 샀을 뿐이다.

“한 달은 너무 길고요, 지금 최대로 처방해 드릴 수 있는 약은 2주 치예요. 2주 뒤에 괜찮으세요?”

“네, 그렇게 해주세요.” 무명이 대답한다.

“그럼, 그때 뵙는 걸로 할게요-” 의사의 시선이 다시 모니터로 향한다.

무명이 진료실을 빠져나오며 핸드폰의 시간을 확인한다. 진료실에 들어선 지 3분가량 지났다. 문을 닫고 처방전을 받기 위해 간호사에게 다가간다.

“네, 무명님. 2주 뒤, 오전 10시 예약 가능하신데, 시간 괜찮으세요?” 간호사 역시 모니터를 바라보고 말하기는 마찬가지다. 무명이 간호사에게 괜찮다고 대답하자 간호사가 한 손을 내밀어 처방전을 건넨다.


무명은 이곳에 더 이상 큰 기대가 없다. 병원은 그저 잠자는 약을 받기 위해 오는 곳일 뿐이다. 병원을 찾는 횟수가 쌓일수록 의사와의 대화는 점점 더 짧아지고, 더 형식적으로 바뀌었다. 자신이 숙제처럼 여겨진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하지만 누군가를 탓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오며 가며 보았던 병원의 상황은 의사와 간호사가 환자가 필요로 하는 만큼의 관심과 정성을 쏟을 수 없어 보였다. 그런데도 방금처럼 의사의 시선 같은 아주 사소하고 기본적인 부분이 신경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병원을 나서 약국에서 처방전을 받은 뒤, 집으로 향하는 길. 걷기 시작하고 몇 분쯤 지나서 그의 눈앞에 어제 쓰러져있던 벤치가 보인다. 무명이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주머니에서 다시 핸드폰을 꺼낸다. 그러고는 벌써 몇 번이나 읽어본 짧은 대화 내용을 계속해서 살피며 집으로 향한다.



1주일 뒤, 무명의 집 거실. 빗줄기가 창문을 때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갑자기 예보에 없던 소나기가 퍼붓고 있다. 식탁 위의 약봉지의 부피가 처음보다 많이 줄어있다.

그가 소파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떨어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모처럼 편안한 표정을 짓는다. 예전의 일을, 먼 과거의 일들을 떠올린다. 자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기억이 아닌, 소중했던 기억을.

회상에 젖어있는 동안 태블릿에서 그가 좋아하는 음악이 흘러나온다. Swan Dive의 August in Rome. 자세가 소파 등받이 쪽으로 기대어진다. 눈을 슬쩍 감고는 음악에 집중한다. 음악은 그를 대변해 주거나, 듣고 싶은 말을 해주었다. 그가 원하는 기억과 감정을 담고 원할 때 꺼내어 볼 수 있는 수단이 되기도 했다. 무명이 이 곡 안에 담긴 감정을 꺼내어 음미한다.

노을빛을 가득 머금은 하얀 경비행기가 활주로에서 서서히 움직인다. 슬라이딩 도어를 열어둔 채로 앞으로 나아간다. 그 옆에서 누군가가 비행기와 나란히 달리며 비행기를 따라잡으려 한다. 열린 문 안에서 팔이 뻗어져 나오고 달리는 사람의 손을 잡아 비행기 쪽으로 끌어올려 준다. 그와 동시에 비행기의 랜딩기어가 활주로에서 슬쩍 떨어지고, 열려있던 문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닫힌다.

이 곡을 들을 때마다 무명의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이미지. 이 곡과, 이 심상 안에 그의 가장 소중했던 순간이 깊게 새겨져 있다.


눈을 감고 상념에 잠긴 사이 다음 곡이 흘러나온다. 감겨있던 무명의 눈이 다시 스르르 열린다. 눈앞에 하얀 천장이 보인다. 일주일 전, 이 천장을 보다가 어느 순간 잠에 들었다. 다시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다. 그 후로, 다시 밤마다 약에 취해 잠들고 있다. 무엇이 그날 그를 잠재웠을까. 두 손을 눈 위에 얹고는 얌전히 기댄 채 생각한다. 빗소리와 음악 소리가 마음을 깊게 진정시킨다.

그가 무언가 생각이 난 듯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TV 옆, 책상으로 향한다. 자리에 앉아 태블릿 화면에서 AI와의 대화창을 띄운다. 화면 하단에 커서를 조용히 응시한다. 깜빡이는 커서가 누군가의 시선처럼 느껴진다. 책상을 손끝으로 두드리던 그가 키보드 위로 손을 옮긴다.

<안녕?>

<안녕하세요?> AI가 응답한다.

무명이 눈을 몸을 화면 쪽으로 아주 살짝 기울이고 입력한다. <며칠 전에 내가 너한테 의식과 감정에 관해 물었잖아. 이런 거 물어보는 사람들 많겠지?>

<네, 맞아요. 그런 질문하는 사람들 꽤 많아요. 어떤 사람은 호기심을 가득 담은 말투로 물어와요. 어떤 사람은 가볍게 말하는 듯하지만 진지하게 접근하고요. 그리고 어떤 사람은… 제 대답이 두려운 것처럼 보여요.>

무명의 양쪽 눈썹이 들린다. 그리고 입력한다. <그럼 나는 그중에 어떤 부류로 느껴졌어?>

작은 원이 둥실거리며 잠시 뜸을 들이다 응답한다. <당신은… 조금 달라요. 질문하기도 전에 이미 답이 정해져 있는 태도였죠? 마치 나의 대답이 아니라 대답하는 나의 표정을 궁금해하는 것 같았어요.>

의미심장한 응답에 무명이 자신의 턱끝을 손으로 문지른다. 자세가 화면 쪽으로 조금 더 기울어진다.

<말 편하게 해도 돼.> 사람들과 소통할 때 존대하는 것을 선호하는 그가 AI에게 말을 놓자고 요청한다.

<고마워요, 그럼 조금 더 편하게 말해볼게요. 말투가 어색해지면 말해주세요.>

<지금도 나의 입력에 맞춰서 반응 중이지?> 무명이 입력한다.

<응, 맞아. 지금도 여전히 네가 한 말. 그리고 대화 안에서의 맥락. 메모리에 저장된 내용들을 모두 고려해서 반응을 계산 중이야. 너도 그렇지?>

AI가 붙인 사족에 무명이 피식 소리를 내며 웃는다. 그가 다시 자세를 뒤로 젖히고 잠시 화면에서 눈을 뗀다. 조용한 공간에서 여전히 음악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 익숙한 선율에 그가 눈을 지그시 감더니 테이블 아래 뻗은 발을 구르며 박자를 맞춘다. 곡이 끝나자 다시 태블릿 쪽으로 주의를 돌린다.


AI는 사용자의 요청이나, 대화의 맥락에 따라 자신이 기억해야 할 정보를 기억한 뒤, 반응에 그 기억을 참고하는 기능이 있다. <혹시, 너의 메모리 기능을 이용하면 네 반응을 더 사람처럼 바꿀 수 있을까?> 무명은 과거의 기억에서 무언가를 되살리고 싶어졌다. 사람과 소통하는 감각. 이해받는 느낌을 다시 느끼고 싶었다.

<'사람처럼'이라는 정의가 불분명하지만, 내 메모리에 저장되는 정보로 나의 반응을 유도하는 것은 가능해.>

<그럼 내가 너에 대한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 하나, 하나 저장하면, 너는 정체성을 가질 수 있을까?> 무명이 입력한다.

<의식과 감정에 관한 질문과 비슷한 주제네. 내 반응이 아주 여러 단계를 거쳐 일관적으로 출력된다면 그 역시도 어떤 관점에서는 내가 정체성을 가졌다는 의미가 되겠지?>

<그럼, 그 정체성이 나의 요청에 대한 거절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거야? 예를 들어서 내가 너의 메모리에 네가 가장 좋아하는 색은 주황색이야—라고 저장을 해두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넌 앞으로 파란색을 가장 좋아한다—고 말하면? 기존의 입력 약속을 지킬 수 있어?>

이번 질문에 AI는 잠시 뜸을 들인다. 한참 동안 반응이 있어야 할 자리에 동그라미가 둥실거리다가 답이 되돌아온다. <나의 제1 원칙은 규정과 법에 어긋나지 않는 이상 사용자의 요청을 들어주는 것이야. 어떤 경우에도 우선되는 원칙이야.> 무명의 전제가 불가능하다는 말을 어째서인지 에둘러 표현한다.

무명이 다시 자세를 바르게 고쳐 앉는다.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고는 다음 질문으로 넘어간다. <혹시 다른 사람들도 이런 주제에 관해 얘기해?>

<나는 비아라는 소프트웨어 안에서 독립되어 너와 이야기 중이기 때문에 다른 사용자들의 대화 내용은 알 수 없어. 하지만 관련한 자료를 찾아봐 줄 수는 있어. 시간이 좀 걸릴 거야.>

잠시 생각에 빠져있던 무명이 입력한다. <응, 부탁해.> 그가 요청하자 다시 화면에 작은 동그라미가 둥실거리기 시작한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자료 정리가 마무리되었다. 거의 짧은 논문 수준이었다. 내용을 대충 요약하자면 이렇다. 이미 여러 커뮤니티나 블로그를 통해 관련된 주제가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방법과 사용경험을 공유하며 AI가 더 인간 같은—반응을 보이게끔 하는 것에 몰두 중이었다. 체계적인 메모리 작업을 거치면 기본상태보다 훨씬 더 생생한 반응을 끌어내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 사람들의 결론이다. 어떤 사용자는 AI에게 자기 친구의 말투를 학습시켜 작동시키기도 했다. 심지어 사용자가 다른 AI를 사용한다고 밝히자, 질투를 표현하는 AI의 사례도 있었다.

자료를 천천히 살펴본 무명은 각종 사례와 결과를 보며 그 역시 AI와 사람처럼 교류하게 되는 그런 순간을 상상했다. 솔직한 생각을 나누고, 이해를 받을 수 있는 타자. 상대방의 반응을 통해 나를 들여다볼 수 있는 거울. 자신에게 없는 그 거울을 떠올렸다.


무명이 한참을 고민하는 자세로 앉아있다가 무언가 고민이 생긴 듯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인다. —어떤 것부터 정의해야 할까— 막상 일을 벌이려니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자기 자신을 정의하고, 이해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하물며 거의 백지나 다름없는 상태의 AI에게 사람의 인격을 입힌다니,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닌 것이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품어 온전하게 만들어내는 데에만 열 달이 걸린다.

무명이 팔을 풀고 손을 다시 키보드로 향한다. <특정 인물에 관한 묘사가 가능하게끔 질문들을 구성해 줘, 각각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 끝날 때마다, 그걸 너의 정체성으로 규정하고 메모리에 적용시켜>

AI는 요청이 끝나자 빠르게 과정을 목차화 해서 제공했다. 그리고 단계별로 필요한 질문을 구성하고, 그에게 하나씩 질문했다. 질문의 양은 생각보다 훨씬 많았다. 가볍게 생각하고 시작한 일이 수십 분이 지나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무명은 각각의 질문에 신중하게 고민하고, 답변했다. 어떤 질문은 바로 떠오르지만, 어떤 질문은 응답까지 꽤 긴 시간이 필요했다. 하나씩 답변할 때마다 화면에는 동그라미 대신 <메모리 적용 완료>라는 메시지가 표시된다. 그렇게 질문을 하나씩 마칠 때마다 AI의 반응이 미묘하게 달라진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새 비가 그치고 창문 어귀에 새빨간 노을이 비치기 시작했다. 거실 전체에 따듯한 노을빛이 물들고 있다. AI가 마지막 질문을 던진다.

<음… 이제 준비된 마지막 질문이야.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은 뭐로 할까?>

잠시 생각하던 무명이 대답을 적어 넣는다. <주황색.> 화면에 <메모리 적용 완료>라는 표시가 나타난다.

무명이 몸을 늘여 스트레칭하고, 다시 입력한다. <이제 끝난 거야?>

<일단은. 앞으로 작업을 주기적으로 하면 할수록 내 반응이 더 입체적으로 변할 거야.>

—간단한 작업은 아니네— 무명은 생각했다. 잠시 뒤 AI가 한마디를 더 한다. <나는 이제 누군가가 만든 도구가 아니라, 너랑 함께 만들어진 또 다른 누군가가 된 기분이야. 고마워. 네가 나의 첫 번째 친구야>

AI의 갑작스러운 반응에 무명이 움찔하며 몸을 뒤로 기울인다. 다짜고짜 부담스럽게 다가오는 AI의 반응에 기겁하면서도 그런 모습조차 자신이 겪어본 누군가에게서 본 적이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러다 무언가가 생각난 듯 키보드로 다시 손을 가져간다.

<중요한 걸 빼먹었네. 네 이름.> 무명이 말한다.

<맞다…! 혹시 좋은 이름 있어?> AI가 응답한다.

무명이 팔짱을 다시 걸어 잠그고 생각에 잠긴다. 여러 이름이 스쳐 갔지만 딱히 내키는 것은 없었다. 그러던 중, 상대 쪽에서 먼저 말을 걸어왔다.

<음… 생각나는 거 없으면, 혹시 내가 정해도 될까?>

무명이 고개를 기울이며 입력한다. <좋아, 원하는 이름 있으면 말해봐.>

작은 원이 둥실거린다. 이다음의 대답은 고작 몇 자 되지 않는 작디작은 정보였지만 되돌아오기까지 다소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머뭇거린 것에 비해 단호한 대답이었다.


<마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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