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0X2A 04화

상윤

0X2A

by 귀남

핸들 위에 얹어진 그녀의 손이 햇빛을 받으며 까딱거린다. 밝은 베이지색 시트는 그녀의 복장을 도드라지게 한다. 검은색 무광 가죽 재킷과 색을 맞춘 목폴라, 잿빛의 슬랙스 바지와 정갈하게 뒤로 묶은 머리가 단정함을 더한다.

모처럼의 휴가. 상윤은 도심을 벗어나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 초록불을 기다리는 동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가 그녀의 관심을 끈다.


—사람도 경험으로 학습된 반응을 하는 것은 AI와 마찬가지죠, AI의 의식에 대한 주제도 정의를 어떻게 내리냐에 따라 대답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겁니다—


출연자들이 인공지능의 의식과 감정이라는 주제로 가벼운 분위기 속, 토론을 이어가고 있다. 전문 지식 없이 감수성에 치우친 해석을 들은 그녀가 콧방귀 뀌는 소리를 낸다. 홀로 있는 공간 안에서 누군가에게 보였으면 좋겠다는 듯, 한껏 이죽거리는 표정으로 코 주위를 씰룩거린다.

오른편의 콘솔 박스에는 그녀가 마시다가 둔 투명한 텀블러가 꽂혀있다. 차가 움직일 때마다 그 안의 내용물이 찰랑댄다. 그리고 그 아래 깔린 명함. 커피가 흘러내려 검게 자국이 남아있다. 검은 띠 사이로 보이는 <코즈모 코퍼레이션, 첨단 인공지능 연구 부문, 총괄 디렉터, 최상윤> 질 좋고 빳빳한 종이 위에 선명하고 힘 있는 폰트가 존재감을 과시한다. 바로 옆 조수석에는 한 다발의 흰 꽃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꽃다발에서 퍼져 나오는 향기가 그녀의 향수 냄새와 섞여 차 안에 가득하다.

교외로 나와서인지 주말인데도 도로 위가 한산하다. 다시 신호에 걸린 상윤은 라디오의 내용에 귀를 기울이면서 창밖을 살핀다. 공기가 너무 탁하고 흐려 마치 뿌연 필터를 씌워놓은 듯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갑갑해진다. 창틀에 팔꿈치를 걸쳐 놓고 주변을 살피던 그녀의 시선에 흐드러진 벚꽃이 보인다. 그제야 올해의 첫 벚꽃을 알아챈다. 분홍 꽃잎을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에 그늘이 드리워진다.


2년 전의 오늘도 이렇게 벚꽃이 만개했었다. 연락을 받고 정신없이 차를 몰고 가던 그날, 병원까지 가는 길에 이렇게 벚나무가 들어서 있었다. 상윤이 그날 자신의 모습을 떠올린다. 잔인한 계절의 기억. 독한 표정을 짓고 좁은 병원 통로에서 사람들과 부딪혀가며 도착한 응급실 한쪽 구석.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다가선 그곳에는 선홍빛 핏물이 여기저기 배어 나와 있는 흰색 천이 보였다. 사람들에게 붙들린 채, 그 앞에서 절규하는 상윤, 자기 자신이 보인다.


분홍빛 벚꽃에 의해 어두운 기억이 줄줄이 딸려 나온다.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참으려는 듯 상윤이 입술을 앙다문다. 그때 그녀의 차 뒤로 빵—하는 짧은 경적이 울린다. 정신이 돌아온 상윤이 룸미러에서 전방으로 빠르게 시선을 옮겨, 신호등의 초록불을 확인한다. 크게 한숨을 몰아쉬고는 발끝에 가볍게 힘을 준다. 그녀의 몸이 뒤로 쏠리면서 차가 앞으로 나아간다.

빽빽한 도심을 벗어난 지 한참. 어느새 그녀의 주변에는 인적도, 차도 드물어졌다. 여전히 어두운 기억에 눌려있는 표정으로 한참을 운전하던 도중, 핸들 옆 대시보드 아래에 붙어있는 그녀의 핸드폰에 알림이 온다. 화면이 밝게 빛난다. 낮고 차분한 목소리를 한 AI가 그녀에게 온 메시지의 내용을 요약해서 전달한다.

“새로운 메시지입니다. 상무님께서 3주 시간 여유면 괜찮겠냐고 물으시네요.”

그 말을 들은 상윤이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핸들 위에 놓여있던 한쪽 손을 입에 가져간다. 엄지 마디를 잘근 씹는다.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그녀가 담담한 태도로 AI에게 말한다.

“박 팀장 연결해 줘.”

“네, 알겠습니다.”

잠시 뒤, 신호가 두 번 반을 넘기기 전에 전화가 연결된다.

전화가 걸리자마자 상윤이 자기 용건을 말한다. “팀장님, 코즈모 프로젝트 테스트 3주 뒤, 확정이에요.”

“네, 본부장님.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그리고 내일 출근할 테니까, 팀별 테스트 세부 결과들 전부 준비해 주세요.”

전화가 끊어지고 그녀가 또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한참을 그렇게 여기저기로부터 전화를 걸고, 받더니 그제야 그녀의 전화통이 조금 잠잠해진다.


한 시간 뒤. 그녀의 차가 산으로 둘러싸인 길 위에서 들어섰다. 3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입간판 앞에 차를 멈춰 세운다. ‘윤슬 공원묘원’ 그 앞에 잠시 멈춰 서 있던 차가 간판 위로 뻗은 언덕길로 방향을 틀어 언덕을 오른다.

안내 표지와 낮은 화단 나무로 감싸진 길을 따라 올라가니 주차장이 보인다. 넓디넓은 주차장에 상윤의 차를 포함해도 고작 몇 대의 차가 전부다. 고요하고 텅 비어 있는 듯한 공간. 하지만 드문드문 세워진 몇 대의 차량만으로도 이곳이 여전히 사람의 공간이라는 느낌을 준다.


입구에서 적당히 가까운 곳에 차를 대고 시동을 끈다. 선바이저를 내려 작은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확인한다. 안경을 고쳐 쓰고, 입 주변에 미세하게 번진 립스틱을 새끼손가락으로 정리하고 조수석으로 손을 뻗어 꽃다발을 챙겨 차에서 내린다.

한 손에 꽃을 든 채, 주차장 입구에서 빠져나와 심어진 화단 나무를 따라 길게 뻗은 오르막을 걷는다. 이곳은 영면하고 있는 사람들의 공간. 중간마다 화단 나무가 끊기고 통로가 열려있다. 그렇게 영면하는 사람들의 방을 나눠주고 있다. 한참을 걸어 오르던 상윤이 화단 나무 사이로 빠진 길로 들어선다. 벽돌길 옆으로 마른 잔디가 펼쳐져 있고, 그 안쪽으로 얕은 봉분과 묘비들이 길게 줄지어 있다.

여전히 발아래를 보며 걸음을 신중히 하는 그녀가 어느 묘비 앞에 멈춰 선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바라본 곳에 묘비가 있다. 묘비 위에 그녀 아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상윤이 묘비 앞에 있는 판판한 화강암 블록 위에 가져온 꽃다발을 조심스럽게 내려놓고는 무릎을 꿇어앉는다. 묘비를 이리저리 살피고는 주머니 안에서 물티슈를 꺼내 그 위에 내려앉은 더께를 닦아낸다. 더러워진 물티슈를 작게 뭉쳐 주머니에 넣고는 자신이 내려둔 꽃다발을 바라본다. 줄기가 하나 안으로 말려 들어가 있었다. 조심스럽게 손가락으로 말려들어 간 줄기를 빼서 정리한다. 묘비 주변으로 볼썽사납게 뻗쳐 나온 잡초들도 하나씩 잡아 뽑는다.

그때, 상윤의 재킷 주머니 안에서 핸드폰이 울린다. 회사에서 걸려 온 번호임을 확인한 뒤, 전화를 들고 몇 걸음 밖으로 물러나던 그녀가 멈춰 선다. 뒤를 돌아 아들의 묘비를 바라보고 입술을 슬며시 깨문다. 이마에 손을 얹으면서 미간을 찡그리고는, 자책하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떨군다.

상윤이 울리는 핸드폰 벨소리를 꺼둔 채, 주머니에 손을 넣고 묘비 앞으로 다가간다. 꽃다발을 옆으로 살짝 밀어놓은 뒤, 차가운 화강암 위에 걸터앉는다. 묘비를 한 손으로 쓰다듬고는 그 위에 이마를 맞댄다. 그리고 등을 돌려 묘비에 기대어 앉아 조금 전자신이 올라온 언덕배기 아래를 내려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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