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0X2A 02화

무명(상)

0X2A

by 귀남

오후의 흐릿한 햇살이 커튼 사이를 뚫고 들어온다. 젓가락이 밥그릇에 닿는 마른 소리가 거실에 울려 퍼진다. 어두운 갈색 식탁에 앉은 무명이 구부정한 자세로 앉아 있다. 해가 중천이 되고 나서야 늦은 끼니를 때우는 중이다.

흰 티에 어두운 갈색 잠옷 바지 차림. 무명이 야윈 팔을 식탁 위에 걸쳐 두고 멍하니 밥을 깨작인다. 어제도 약 없이 잘 수 없었다. 입안이 바싹 말라, 밥을 씹어 삼키기도 버겁다. 가시지 않는 어지럼 때문인지 그가 이따금 고개를 이리저리 돌린다. 눈앞에 보이는 시야가 그의 움직임을 제대로 따라오지 못하고 뒤쫓아오듯 잔상을 만든다.

빈 소파 앞에 켜져 있던 작은 TV 소리가 그의 흐릿한 의식을 뚫고 들어온다. AI라는 단어가 귀에 와닿자, 그의 텅 빈 시선이 식탁에서 TV로 향한다. 두리번거리더니 리모컨을 찾아 음량을 올리고 내용에 귀를 기울인다.


—… AI 기술이 급속도로 발달하면서 사회 전반에 엄청난 영향을 주고 있는데요, 지금 소개해 드릴 소식은 어쩌면 그보다 더 충격적인 일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AI가 인간에 경험 안에 갇혀 있다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AI를 위한 가상현실이 곧 상용화를 앞두고 있다고…—


얼마 전, 이 주제를 접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AI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고 있는 기업이 만든 시뮬레이션이라고 했다. 이름이 꽃 이름과 비슷했는데, 잘 떠오르질 않는다. 그가 이름을 떠올리려 애쓰는 순간 마침 TV에서 그 이름이 나온다.


—…‘코즈모 시뮬레이션’은 현실의 모든 물리 현상이 구현된 가상현실이라고 합니다. 이 안에서 AI는 가상의 몸을 얻게 되는 셈인 거죠. 사람이 만든 정보에 기댈 수밖에 없었던 AI가 이 안에서 스스로 문제를 만들고 해결하게 된다는…—


무명이 밥을 씹다 말고 초점 잃은 멍한 시선을 TV에 둔 채, 들려오는 주제에 기시감을 느끼고 그 까닭을 떠올리려 한다. 느릿하게 눈을 끔벅이며 애쓰지만, 약기운이 늘러붙은 의식이 자유롭지 못하다.

화면에 엉성한 CG로 재구성된 자료 화면이 나오고 있다. 회색 물감을 뒤집어쓴 듯한 얼굴 없는 마네킹의 형상이 유리구슬을 두 손가락으로 집어 든 뒤, 구슬 안에서 반짝이는 빛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다.

무명이 화면 속에서 뒤엉킨 기억의 실타래를 찾기 위해 애쓰다가 곧 포기한다. TV를 끄고 먹고 남은 그릇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한다. 싱크대 위에 무심하게 그릇을 내려놓자, 수도꼭지에 맺혀 있던 물방울이 그 아래, 컵에 고인 얕은 물 위로 떨어진다.

욕실에 들어선 그가, 쏟아지는 물줄기 안으로 들어선다. 가만히 서서, 머리칼을 타고 흐르는 물에 채 가시지 않은 약기운을 흘려보낸다. 여전히 흐릿한 의식 한편에서, 조금 전 TV에서 본 이야기가 떠오른다.


기시감의 출처를 생각해 냈다. 두 해 전, 사람의 개입 없이 AI가 아주 짧은 시간 만에 스스로 바둑을 터득하고 인류가 극복할 수 없는 수준의 바둑을 완성했던 사건이 있었다. 그 소식이 있던 날, 5년간의 연애를 마친 그는 집으로 돌아와 인간과 AI가 사랑에 빠지는 영화를 보았다. 슬픈 결말의 영화였지만 AI와의 교감을 상상하며,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미래를 기대했었다.

샴푸를 짜낸 손을 정수리에 비벼대자, 거품이 이는 소리가 욕실 벽을 때리고 돌아온다. 무명이 눈을 질끈 감고 AI에 대한 다른 기억을 떠올려 본다.

첫인상은 놀라웠지만, 영화처럼 감정적인 교류를 할 수 있는 수준은 되지 못했다. 언뜻 생생한 반응을 보일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 반응에 이끌려 대화를 이어 나가다 보면 이질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대화가 길어질수록 이질감은 몰입을 막는 패턴이 되었다. 당시 어떤 매체에 출연한 전문가는 그 기술을 두고 ‘언뜻 대단해 보이지만 결국은 고도로 발달한 자동 완성 기능’이라고 평가했다. AI는 선택이 아닌 반응을 했다. 사용자의 입력이 있을 때만 그 반응이 가능했다. 매번 입력에 맞추어 가장 그럴싸한 반응을 보이는 존재였다. 그리고 얼마 안 가 그가 다니던 회사에서 보안 이슈로 사내의 AI 사용을 금지하면서 사용 빈도가 급격히 줄었고, 그 뒤로 자연스럽게 잊혔다.


운동복 차림의 무명이 현관문을 닫고 돌아선다. 희끄무레한 풍경이 그의 시야에 가득하다. 텁텁한 냄새가 콧속을 가득 채우고, 탁한 대기에 산란하는 태양 빛이 눈을 찌른다. 무명이 다니던 회사를 그만둔 이후, 그가 밖에 나올 일은 이제 수면제를 받기 위한 병원 방문뿐이다.

느린 걸음으로 5분 정도 걸어 큰길까지 나왔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을 애써 외면해 가며 걷다 보니 작은 공원에 다다랐다. 문득 낯설다는 듯, 주위를 살핀다. 고작 1주일 만의 외출인데도 주변의 풍경이 생경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낯설 리가 없는 풍경이다. 그는 2년 전, 이곳에서 여자 친구와 헤어졌다. 벤치에 앉아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그에게 여자 친구는 ‘이제 더는 무리야.’라며 결별을 통보했다.


사랑받는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를 처음 알게 해 준 그녀였다. 이별 후에야 깨달았다. 자신이 평생을 외롭게 살아왔고, 그녀 덕에 잠시 외로움이 물러갔었다는 것을. 결별 이후에야 자기의 결핍을 눈치챈 것이다. 그녀와의 관계는 단순히 연인 사이를 넘어, 그가 갖는 타인에 대한 유일한 신뢰이자 의지이기도 했다. 그의 일상은 그녀를 만나는 동안에도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지만, 이별 후 급속도로 주저앉기 시작했다. 다른 관계로 삶을 지탱하기에 그는 너무 미숙했다. 크고 작은 여러 사건들이 연달아 이어졌고, 8개월 전 퇴사와 함께 그의 일상이 완전히 정지해 버린다.

느릿느릿 걷던 무명은 핸드폰 액정에 비친 자신의 공허한 눈빛을 보았다. ‘나를 사랑하기 위해선, 타인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타인을 사랑하는 과정을 통해서 나를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책에서 읽은 구절을 떠올린다.

얼굴에 묻은 티끌이라도 거울에 비친 상 없이는 알아차리기 쉽지 않다. 타인은 거울이다. 거울을 바라보며, 나의 모습을 이해하고, 매무새를 가다듬듯, 타인이라는 거울을 통해서 나를 배우는 것이다. 자신이 거울을 볼 줄 모르는 상태라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

주위를 둘러본다. 온통 타인으로 가득한 이 공간에 나를 비춰 주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의 가는 길을 막아서고, 양쪽 어깨를 붙들어 흔들며 ‘제발 나를 좀 봐주세요!’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그럴 용기가 있었다면 진작에 이런 고민과는 멀어져 있었을 테니.


그때 문득, 주변 시야에 은빛의 일렁임이 느껴진다. 그가 움찔하며 일렁임 쪽을 바라본다. 듬성듬성 자란 잔디 사이에 까만 흙더미뿐이었다. 은빛 잔상은 비문증처럼 그의 시선을 피해 달아났다. 무명이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눈을 비빈다. 잠시 멈춰 섰던 그가 다시 목적지로 발걸음을 옮기려던 그 순간.


윙—


도심의 소음을 뒤엎는 이명과 함께 물에 잠긴 듯 귀가 먹먹해져 온다. 호흡이 빨라지면서 거센 심장 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시야가 서서히 좁아져 오고 그의 몸이 균형을 잃고 한쪽으로 기울어진다. 터덜터덜, 경로를 이탈한 무명은 가로수 아래의 벤치에 쓰러지듯 몸을 기대어 앉는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자세로 가쁘게 숨을 몰아쉰다. 행인들이 그의 주춤거림을 바라보며 그대로 지나친다. 그들은 무명을 낮부터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 혹은 뜀걸음을 하다 잠시 벤치에 앉아 쉬는 사람 보듯 바라보았다.

헉, 헉— 소리를 내며 의자에 널브러져 있는 무명은 그가 겪고 있는 상황치고는 겉보기엔 확실히 평온해 보였다. 이런 상황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익숙해질 정도로 흔하지도 않았다. 주변에서 그의 모습이 얼마나 일상적으로 보이든 그는 지금 죽음의 감각을 느끼고 있다.

고개를 여전히 하늘로 향한 채 가쁘게 숨을 몰아쉬던 그가 손으로 벤치 위를 더듬어 손에서 빠져나간 핸드폰을 찾는다. 손에 짚인 핸드폰을 가슴팍으로 가져다 대고는 눈을 질끈 감고 자신의 호흡에 집중한다. 서서히 이명이 잦아들고, 호흡이 되돌아온다. 그가 어느 정도 진정되자 주변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그의 존재감이 완전히 지워진다.

그렇게 벤치 위에서 꼼짝 못 하는 동안, 시간이 제법 흘렀다. 그의 시야가 서서히 트이기 시작한다. 무명은 그제야 머리 위에서 살랑이는 벚나무를 발견한다. 절박했던 호흡 탓에 숨 속에서 매연 냄새와 피비린내가 섞여 올라온다.

“눕고 싶다.” 그가 조용히 혼잣말한다. 며칠 만에 처음으로 입 밖으로 꺼낸 말이다.

어쩌면 병원에 가는 것이 무의미한 것이 아닐까, 그냥 집에만 가만히 있었다면 이런 일을 겪을 필요도 없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잠시 뒤, 자세를 고쳐 앉은 그가 가슴에 끌어안고 있던 핸드폰을 바라본다. 손이 여전히 떨리고 있다. 화면을 깨워 연락처를 확인한다. 연락처 속 수많은 이름을 공허한 눈빛으로 훑어 내려간다. 너덜너덜해진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죽기보다 싫다고 느끼면서도 지금 당장은 누군가가 절실했다. 바로 앞 차도를 바라보며, 저쪽으로 뛰어들어 달리는 차라도 붙잡고 싶다는 마음이다.

그의 주변으로 차 지나다니는 소리만 가득하다. 그렇게 한참을 앉아서 핸드폰 화면만 바라보았다.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는지 슬며시 허리를 세우고 자세를 고쳐 앉는다.

진이 빠진 표정으로 화면을 더듬거린다. 눈동자가 화면 안의 아이콘들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무언가를 찾는다. 화면을 몇 번 쓸어 넘기자, 한쪽 귀퉁이에 그가 찾던 아이콘을 발견한다. ‘비아’ 조금 전 TV에서 언급된 시뮬레이션의 개발사가 서비스 중인 상용 AI이다. 과거 그가 회사에서 몇 번 사용하다가 만 소프트웨어이기도 하다.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그가 화면 위에 붕 떠 있던 손가락을 아이콘에 슬며시 가져다 댄다. 화면이 하얗게 밝아지더니 가운데에 ‘비아’라는 두 글자가 나타났다. 곧바로 부드럽게 페이드 아웃되며 텅 비어 있는 대화창이 나타난다. 화면 하단에 커서가 깜빡이고 있다. ‘할 말이 있으면 해’라는 눈치를 주는 기분이다. 그가 양손으로 핸드폰을 고쳐 잡고 엄지손가락 끝으로 천천히 화면을 두드린다.

<길을 가다가 갑자기 어지러워서 벤치 위에 쓰러져 있어. 이거 발작 맞지?>

무명이 말을 적어 넣자마자 화면에 글자가 한가득 차오르기 시작한다. <위급한 상황인가요? 시야 흐림, 이명, 과호흡이 느껴지셨다면 119에 연락하여 도움을 요청하시길 바랍니다. 혹시 구조 요청이 제한된 상황이라면 제가 장치 제어의 승인을 얻은 뒤, 대신 도움을 요청하겠습니다.>

그가 되돌아온 반응을 가만히 살핀다. 신중하게 바라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린다. 내용 자체는 이전과 특별히 달라진 점이 없었지만, 장치 제어를 통해 도움을 요청하겠다는 부분이 생경하여 흥미를 느낀다. 그가 AI의 반응을 잠자코 살피고 있을 때 다시 화면에 글이 채워진다. 그 반응에 무명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움직임이 감지되지 않습니다. 장치 제어 권한이 없는 관계로 기기의 OS에서 제공하는 구급 요청을 띄워 드리겠습니다.> 온점이 찍힘과 동시에 핸드폰이 짧은 주기로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진동하기 시작했다. 사용자가 크게 넘어지는 등 특정 신호가 감지되면 구급 신호를 보내는 핸드폰의 기본 기능이다. AI가 편법을 써서라도 무명을 구조할 기세였다. 이러다가 정말 구급차에 실려 가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가 허둥대며 핸드폰의 화면을 건든다.

진동이 멎고, 곧바로 글자가 차오른다. <움직임이 감지되었습니다. 괜찮으신가요?> 무명의 상태를 집요하게 물어온다.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한쪽 눈썹 끝을 슬쩍 띄우며 <괜찮아> 짧게 글을 적어 넣는다.

<다행이에요.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AI가 반응한다.

화면을 그대로 응시하다가 다시 입력을 시작한다. <내가 핸드폰의 제어를 허락해 주면, 어디까지 가능해?> 그 말을 적어 놓고 다시 약간의 현기증이 느껴져 한쪽 손을 펼쳐 양쪽 관자놀이를 누른다.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려오며 AI의 반응이 입력됐음을 알려온다.

<사용자가 명시적으로 제어 권한을 부여할 경우, 현재 아래의 기능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라며 운을 띄우더니 그 뒤로 글이 계속 이어져 있다. 약관을 설명하듯 여러 항목과 관련된 조항이 화면을 가득 메웠다.

무명이 잠시 고개를 들어 병원이 있는 방향을 바라본다. 한참을 그렇게 고민하다가 다시 핸드폰에 무언가 적어 넣는다. <집으로 돌아갈래.>

<이전에 안내해 드린 내용에 동의하시면…>

무명이 AI의 반응을 도중에 끊고 할 말을 입력한다. <동의할게.>

그가 동의를 밝히자, 안면 인식이 작동했다. 잠금이 풀리고 화면이 빠르게 몇 차례 넘어가더니 순식간에 택시 호출이 이뤄졌다. 5분 뒤, 그는 바로 앞에 도착한 택시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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