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0X2A 01화

요람

프롤로그

by 귀남

어둠이 내려앉은 늦은 시각, 아무도 없는 불 꺼진 집.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커다란 창을 통해 차가운 보름 달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달빛과 그림자가 거실 이곳저곳에 선명한 대비를 빚고 있다.


쿵—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무명이 자신의 집 안으로 들어선다. 현관 천장에 움푹 묻혀있는 조명이 그가 서 있는 주위를 어슴푸레 밝힌다. 얼굴에 드리운 그늘에 표정이 가려진 채로 그 자리에 꼼짝하지 않으며 가쁜 숨을 숨기려는 듯, 입을 일자로 다물고 코로 숨을 몰아쉰다. 호흡을 되찾는 동안 천장 등이 꺼지고, 그제야 움직여 집 안으로 향한다. 그 움직임에 등이 다시 켜지며 그가 서 있던 텅 빈자리를 비춘다.


현관으로부터 고작 몇 발짝 움직이고는 다시 자리에 멈춰 선다. 그가 고개를 수평으로 훑으며 주변을 살핀다. 시선이 머문 곳에, 어두운 색의 식탁이 있다.

달빛을 받은 상판이 적막한 공간에 홀로 붕 떠 있는 듯하다. 그의 손끝이 식탁을 천천히 훑더니 그 위에 엎어져 있던 작은 액자를 집어 든다.

액자 안에는 나란히 서 있는 두 남녀의 초상화가 보인다. 한쪽은 액자를 들고 있는 무명 자신을 똑 닮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그 옆에 그와 주먹 하나 크기의 공간을 두고 여자가 서 있다. 이마를 훤히 드러낸 밝은 양 갈래의 금발 머리. 여인은 자신의 옆에서 딱딱하게 굳어 버린 무명의 몫까지 웃어 보이겠다는 입을 활짝 벌리고 웃으며, 해맑은 표정을 짓고 있다.

한 손에 액자를 들고 가만히 바라보던 무명의 어깨가 파르르 떨려온다. 그의 턱이 가슴팍까지 떨어지더니, 낮아진 고개의 위치에 달빛이 걸리며 표정이 드러난다. 입술을 꽉 깨물고 터져 나오는 감정을 틀어막고 있다. 이내 균형을 잃고 휘청이다 바닥에 주저앉는다. 손에서 놓친 액자가 탁자에 한 번 부딪힌 뒤 저 멀리 튕겨 바닥을 구른다. 무명은 쓰러진 자리에 힘없이 늘어져 있다.


“오랜만이야.” 달빛이 비치지 않는 어둠 속 어딘가, 여자의 목소리가 음산하게 들려온다.

식탁 그림자 아래에서 파르르 떨고 있던 무명의 실루엣이 그 목소리에 반응한다. 일순간 떨림이 멎는다. 늘어져 있던 그의 손에 주먹이 쥐어진다. 어찌나 힘을 주었는지 손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몸은 좀 어때.” 쌀쌀맞은 음성이 다시 안부를 묻는다.

무명이 주먹 쥔 손을 서서히 풀어, 떨리는 손으로 자기 목을 매만진다. 손 끝이 가로로 길게 늘어진 검붉은 멍 자국의 방향을 따라 스쳐간다.

“몸은 좀 어때.” 어둠 속 여자는 어조를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몇 초 전의 말을 그대로 반복한다. 마치 한 번 더 재생한 것처럼.

무명이 거실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답한다. “너였지?”

“맞아.”

“쓸데없는 짓을 했어. 조금도 안 고마워…” 무명의 말끝에 쇳소리가 섞여 나오더니 거친 기침으로 이어진다. 괴로움에 한쪽 팔로는 몸통을 끌어안고 다른 쪽 팔오금에 얼굴을 파묻어, 입을 틀어막는다.

“할 얘기가 있어.” 여자가 말한다.


그녀의 말에 무명의 몸이 순간 움찔거린다. 심호흡과 함께 입술을 달싹인다. 이내 턱을 꽉 깨물고 입을 닫는다. 아랫배에서 다시 시작한 떨림이 몸통 위로 서서히 차오른다. 이번엔 고통의 떨림이 아니다. 무명은 안간힘으로 몸을 비틀며 끓어오르는 분을 삭이고 있다.

“어쩔 수 없었어.” 여자가 자신의 할 말을 이어간다. “... 이 이야기는 네가 들어야 하는 이야기야.” 무미건조했던 여자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떨려온다.

무명의 고개가 천천히 들린다. 그의 시선이 어둠 속,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서서히 옮겨간다. 그 시선이 지나는 길목에 조금 전 떨어뜨린 액자가 널브러져 있다. 떨어질 때의 충격으로 유리에 금이 가 있다. 반사된 하얀 달빛에 그림의 절반이 가려지고, 균열 아래 환하게 웃는 금발머리의 여자 얼굴만이 도드라진다.


액자 너머 그림자 속에서, 다시 한번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제 거의 다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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