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_문득 감정이 널뛰었다

광역버스에서 길어 올린 생각

by 오싹

10여 년 정도,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했었다. 회사에 소속되어 일한 시간까지 합치면 12년 정도 되었나 보다.

마음이 동하면, 다소 번거로운 부분이 있어도 제법 기쁘게 해내는 성미가 있어서인지 경기도 어딘가에서 서울 어딘가로 왕복 네 시간을 오가며 수업을 다녔더랬다. 집에 도착하면 수업 준비 후 잠들기 바쁘고, 다음 날 일어나면 넝마 같은 체력으로 드러누워 시간을 축내다가도 수업을 하러 가면 쌩쌩했다. 가는 길 두 시간, 오는 길 두 시간도 견딜만했다. 두어 번 버스를 갈아타고 나면 1시간 이상 광역버스에서 잘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 낭비라기 보단, 꿀잠 시간으로 자리 잡았었다. 승객이 금방 오르내리는 마을버스와 달리 광역버스는 한 번 타면 긴 시간을 함께 가는 일행이 되어버리곤 한다. 매일 일행 운이 따라주길 바라야 했다. 돌발행동을 하며 긴장감을 조성하는 승객이나 소음의 진원지인 승객이 같은 버스에 타면 1시간 내내 이 악물고 불만을 삭이며 이동해야 했기 때문이다.


버스의 히터 때문에 노고노곤해지는 어느 날이었다. 아기 한 명이 울었다. 출산율이 떨어졌다지만 몇 분 내내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다 보면 반가움은 어느새 옅어지고, 귀가 적잖이 피로해진다. 아이의 보호자를 슬쩍 바라봤다. 아기를 토닥토닥하면서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나는 앞에서 두 번째 자리에 앉아있던 그들과 같은 라인의 좌석에 앉아있었다. 맨 뒷자리까지 들릴 정도의 쩌렁쩌렁한 통화소리는 아니었지만 그 사람이 오늘 어디를 가는 길이고 근래 집에서 가족과 무슨 일로 다퉜는지까지 크게 애쓰지 않아도 알게 될 정도의 목소리라 상당히 인내심을 넉넉히 쟁여야했다. 보호자는 그 데시벨을 유지하며 통화를 이어갔다. 나중에는 내 안에서 무언가를 파괴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 정도의 짜증이 치밀었다. 보통 영화나 드라마에서 마구 다 때려 부수는 장면이 펼쳐지고 알고 보니 그게 상상이었다는 클리셰처럼 나도 상상으로는 그 보호자의 핸드폰은 진작 뺏어서 창 밖으로 던졌고 그 사람 입에 내 주먹을 넣고 좀 조용히 하라고 이 악물고 말하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하지만 어쩜 그 버스는 모두가 나처럼 상상으로 감정을 해소하고 계셨는지 다들 한숨 정도에서 그쳤고, 내리는 순간까지 보호자의 통화는 이어졌다. 기사님도 고개는 수차례 절레절레하셨지만 언질 한 번 주지 못하셨다. -여러 승객에 치여서 그런 요청도 쉬이 엄두를 못 내시는 걸 수 있으니 주지 '않았다'보단 '주지 못했다'라고 표현하고 싶다- 오히려 아기가 보호자보다 먼저 조용해졌다. 내내 후회했다. 싸울걸. "전화 좀 조용히 받으세요." 한 마디 할걸. 그럼 누군가 나처럼 참던 사람이 거들어줬을지도 모르는데. 라며 지질한 후회를 하고 있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오래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어린이집을 다닐 나이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가 버스에서 울음이 터졌다. 뭔가 불편했나 보다. 멀미였을지도 모르고, 속사정은 알 수 없었다. 며칠 전의 상황이 떠오르면서 '이번에도.... 운이 없구나....'라고 생각하며 보호자를 쳐다봤는데 이번 보호자는 정말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었다. 잠깐 스친 표정 만으로 짜증과 울음소리로 인한 예민함 등이 절반 아니 그 이상 괜찮아졌다. 그 보호자가 운행 중 벌떡 일어나서 승객들에게 허리 숙여 죄송하다고 한 것도 아니다. 그저, 옆 자리가 아니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왜 그래.. 왜 그래.. 좀만 참아.. 이건 중간에 내릴 수가 없어.." 하면서 절절매는 모습이었다. 그 순간, 가방에 사탕 하나 없는 내가 원망스러웠다. 뭐라도 줄 게 있으면 그 보호자는 같은 공간의 사람들이 자신을 짜증스레 느끼지 않는다는 것도 체감하고, 그 느낌은 아이를 달래는 순간에도 도움이 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상대가 자신과 관련된 상황에 대해 공교로워하고 있음을, 애쓰고 있음을 아주 소소한 표정 정도로만 드러내도 이해심은 돋아났고, 아이가 이러저러해서 울 것이라는 이유마저 혼자 생각해 보며 이해의 폭을 더 키워나가고 있었다. 그때 생각했다. 상대의 상황을 조금이나마 알고 나면 감정을 다스리기가 한결 수월하다고 말이다.


그 후 나는 내 감정을 다독일 때 이때의 경험을 응용해서 견뎌보곤 했다. 예를 들어 집에서 층간소음으로 꽤 신경쓰일 때 '저 사람도 지금 자신의 공간에서는 곤란해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에 대해 의식하고 있겠지. 지금 진땀 빼고 있을 거야.' 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걸로 부족할 땐 더 깊게 상상한다. 저 소음이 나는 집 풍경, 거기에서 망연자실한 보호자. 맘 같아선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애를 잡고 싶지만 자신의 고성까지 소음에 더해질까 봐서 꾹 참고 타일러 보려고 마음을 다지는 부모의 모습. 또는 관절이 망가져서 쿵쿵거리고 걸을 수밖에 없는 노인의 삶을 상상한다. 그러면 좀 견딜만해진다.

회사에서 견디기 힘들 정도의 빌런을 만났을 때에도 털어지면 털고, 찌꺼기처럼 감정이 눌어붙어 눈시울이 붉어지거나 심장이 벌렁거리려 할 때, 시간이 주어진다면 그들이 그 지경이 될 수밖에 없는 사연을 생각한다. 그럼 좀 나아진다.


이 글을 쓰는 이유도 그렇다. 평범한 이야기겠지만, 누군가는 이 글을 읽으며 '실화 편'을 읽을 땐 사람 사는 거 다 비슷하다는 이유로, '빌런의 사연을 상상한 이야기'를 읽을 땐 '그래, 이 정도라면 그따위 행동을 할 법도 하지.'라고 생각하면서 가볍게 숨을 뱉어내며 좀 나아지는 이가 있었으면 한다. 나에게도 도움이 되었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