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 보니 내가 조금 나빴네요

사희란 씨는 그저 오늘 하루가 버거웠을 뿐이다

by 오싹
인명과 지명, 상호는 모두 가상의 이름입니다. 매 회차 첫 번째 이야기는 제가 여러 직장에서 겪은 실화이며, 두 번째 이야기는 빌런의 사연을 지어낸 픽션입니다.


생각해 보니 내가 조금 나빴네요

전반적으로 전화도 카톡도 별로 많지 않은 날이었다. 입방정이 되어 돌아올까 직원들 누구 하나 '오늘 한가하네요.'라는 말을 입밖에 내지 않았던 그런 날이었다. 덕분에 무심코 창밖도 바라볼 짬이 났다. 사무실은 에어컨 바람으로 더위가 달래지고 있었고 밖은 창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보니 그저 초록빛의 쨍한 색감이 눈에 담겨서 당시의 날씨를 망각하고 '아, 여름 바람 쐬고 싶다.'라는 속 편한 생각을 하고 있던 그런 날이었다.


-따르르르르르릉 따르르르르르릉-

"감사합니다. 클린짱입니다."


"아, 저기 내가 거기 제품을 쓰고 있는데요. 청소기가 6일 전부터 안되고 있어요."

그래, 이 고객은 어필했다. 불편을 오래 겪고 있음을. 빨리 수거를 해주거나 바로 해결할 방법이 있는지 파악하면 될 일이었다. 다만 구매정보를 알아야 했는데 이 고객은 불편에 대한 호소가 다소 길어지고 있었다.

"내가 이걸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요렇게도 해봤는데 아무것도 안 통했어요."

"그러셨군요."

고객의 말이 길어질 때 여유 있게 상대의 번호를 전산에 입력해 보니 조회가 되지 않았다. 당황할 건 없었다. 직접 구매자가 아닐 수도 있으니까.

"고객님, 연락 주신 번호로 조회해 봤습니다만..."

"일하고 집에 가면 매번 늦고, 치워보려면 여전히 작동이 안 되고.."

"네 고객님, 많이 불편하셨을 텐데요. 우선 구매하신 제품에 맞게 여러 가지 확인해 보고자 검색을 해봤는데 조회ㄱ.."

"청소가 하루하고 하루 안 하고 그럴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여간 불편한 게 아녜요."


뭐지?

이쯤 되니 고객에게 내 목소리가 안 들리는지 순수한 궁금증이 들었다.

"고객님, 혹시 제 전화 품질이 안 좋은가 해서 여쭙니다. 제 안내가 잘 들리시나요?"

"들려요."

다행이다. 아니, 다 들리고 있었단 말이야?

"네 고객님, 불편사항 간단히 들었습니다만 고객님 주문 건이 조회되지 않아서요. 혹시 선물 받으신 제품이신가요? 아니면 구매당시엔 다른 번호를 사용 중이셨다면 말씀해 주세요. 다시 조회해보려고 합니다."

"뭐라는 거예요."


엇, 이 분은 뭐라는 거지?


"고객님께서 연락 주신 번호가 저희에게 보여서, 필요한 접수나, 안내를 드리려고 조회해 보니 구매내역이 나오지 않아 확인차 여쭌 겁니다."

"내가 산 건데 왜 안 나와요 안 나오긴."

"간혹 마켓에 따라 안심번호로 저장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성함으로 조회를 좀 해봐도 될까요?"

"이러다 주소도 물어보시겠네. 참나."


왜 화가 난 거지? 나도 화낼 줄 안단 말입니다.


"고객님, 물론 수거 접수 등, 상황에 따라 필요하면 주소지를 여쭐 수도 있습니다만, 지금은 고객님 구매정보 확인이 우선이라 성함만 여쭤보는 겁니다."

"아, 진짜 정보만 다 뱃겨먹고 뭐 하는 거예요."


아직 다 뱃겨먹지도 않았단 말입니다..


"고객님 청소기로 불편 겪으신 기분은 모르는 바 아니지만 지금 당장은 말씀하지 않으시더라도 고장으로 인하 수거 접수 하게 되면 정보는 여쭙게 됩니다. 지금 말씀하기가 내키지 않으신다면 우선 제품 모델명이라도 확인 부탁드립니다. 증상 관련 여쭤보면서 도움드리려고 합니다."

"아니 그쪽에서 팔면서 뭐 파는지도 몰라요? 청소기라고요."


뇌가 말했다. 이 인간 때문에 화내는 건 불필요한 에너지 손실이라고.

나는 조금 유쾌해지기 시작했다. 이 동물의 심리를 파악하지 못해서 호기심이 잔뜩 차오르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고 심장도 꽤 방망이질 쳤지만 오해마시라. 절대 화가 난 건 아니고. 그저 어떤 선을 훌쩍 넘어버리자 아찔하게 유쾌해졌을 뿐이다.


"고객님, 저희가 청소기를 한 모델만 취급하는 게 아니라 여러 종류를 판매하고 있습니다."

"유세 떨어요 지금?"

"왜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지금 고객님 제품에 대해 잘 안된다는 정보 말고는 알고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필요한 접수나 안내를 드리기 위한 최소한의 정보를 여쭙고 있는 겁니다. 저절로 뜨는 전화번호 말고는 말씀해 주신 게 아무것도 없으신데 제가 어떻게 도와드릴 수 있을까요?"

"하- 어이가 없어서.. 제품 모델명을 어떻게 외우고 다녀요."

"고객님 감정 조금만 가라앉히시고 제가 문자로 카카오톡 링크를 드릴 테니 거기로 고객님 제품 사진이라도 있으시면 보내주시겠어요?"


그래, 사람 새끼 아니 사람이 나쁜 게 아니다. 이 미친 더위.. 여름이 문제인 것이었다. 그게 맞다.


"진짜 요구하는 것도 많네."


하지만 당신은 화만 많고요.... 요구한 것 중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어요 고객님..


"들어갔어요. 뭐 어떡하라고요?"

"제품 사진 찍어두신 게 있을까요?"


없겠지.. 없을 거야.. 난 대체 이 난관을 어떻게..


"기다려봐요."


있어? 제품 사진은 그 와중에 있었다.

잠시 후 고객센터 카카오톡으로 온 제품 사진을 보고 맥이 탁 풀렸다.


"고객님, 죄송하지만 해당 제품은 저희 업체 제품이 아닙니다.."

"뭐라고요?"

"다행히 제품 일련번호 라벨까지 요청드리지 않아도.. 사진에 고객님 제품 브랜드명이 잘 보여서 확인이 됐는데요. 저희는 클린짱이고, 고객님 제품에는 청결나라라고 쓰여있습니다..."


잠깐의 정적. 고객도 사진을 확인한 모양이다.

"여기는 청결나라 제품은 안 팔아요?"

"네 고객님, 수입처가 아예 다르다 보니 해당 제품은 저희가 안내드릴 수가 없습니다.. 도움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 짜증내서 미안해요. 하. 이건 또 어디에 전화를 해야 하는 거야.."

"고객님, 찾아보니까 해당 제품은 제가 지금 카카오톡으로 남겨드린 연락처에 문의해보셔야 합니다."

".... 고마워요."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 뚜 뚜 뚜 -


옆자리 직원이 물었다.

"진상이에요?"

"그냥, 좀 더위 먹었나 봐요. 짜증을 있는 대로 내더니 막판엔 또 맥이 풀려서는. 아, 몰라. 인간은 겁나게 유쾌한 존재야 역시. 우하하"

"오싹 씨도 더위 먹었어요?"

"조용히 해주세요."




사희란 씨는 그저 오늘 하루가 버거웠을 뿐이다.

지루한 과정을 지나 드디어 남편과 남남이 된 희란 씨는 금쪽같은 반차를 쓰고 남편에게 반려동물을 넘겨주고 오는 길이었다. 살 맞대고 더 정든 건 희란 씨였지만, 원 소유주인 남편에게 아롱이를 보내야 했다. 원 소유주고 뭐고 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과정이 어찌 됐든 아롱이는 이제 집에 없는데.


날은 쩅하고, 오후에는 또 회사에 가서 온갖 인간에게 전화로 굽신거리며 상품 하나 팔아보려고 알랑방귀를 뀌어야겠지. 안 고마워도 안 미안해도 고맙고 미안한 체하며.


너무 더워서 샤워라도 하고 남은 시간 커피라도 때려 넣어야 회사에 가서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집에 가서 아롱이가 없는 빈자리를 느낄 새를 주지 않고 집안일을 먼저 해치우고 싶었다.


"그래, 차라리 땀을 먼저 쭉 내고 씻자."

빨래를 먼저 모아서 세탁기에 넣고, 아침 식사 흔적을 설거지했다. 싱크대의 물기까지 삭삭 닦아내고 청소를 시작하려 했다.


- 딸깍 딸깍 -

아차, 며칠 째 이놈의 청소기가 말썽인 걸 잊었다. 그래서 아롱이가 방을 어지럽혀도 한 번에 청소기로 밀지 못하고 근래 빗자루 질을 하며 땀을 뻘뻘 흘린 기억이 났다. 에어컨도 시원치 않은데 청소기까지 합심해서 자신을 골치 아프게 하는지.


"어디에 전화를 해야 하는 거야 대체."

남편이, 아니 이제 전 남편이 된 그가 낡은 청소기는 버리고 선물해 줬던 무선청소기인데 이젠 이 청소기도 꼴 보기 싫어졌다. 설명서 어딨냐고 이거 어디에 전화해서 물어보냐고 물어보려고 남이 된 인간에게 전화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소파에 몸을 던져 검색을 했다.


대기업 제품은 아닌 것 같고. 청소기 AS를 검색하니 그냥 다른 사람들의 후기가 잔뜩 나오거나 사설업체가 나와서 영 헷갈렸다. 무선청소기 AS를 검색해 보니 대기업 링크 몇 개와 다른 링크 하나가 보였다. 무선청소기 다 거기서 거기니까 일단 물어보면 도와주겠지 싶어 전화를 걸었다.


직원이 전화를 받았다. 나긋한 목소리를 듣고 나서 그냥 좀 이 청소기 때문에 자신이 겪은 억하심정을 하소연하고 싶어졌다. 주절주절 말하고 있는데 직원이 자꾸 중간에 말을 끊고 들어왔다. 연락처로 검색이 안 된다니 당연한 거 아닌가. 전 남편이란 작자가 샀다는 말도, 그 사람 이름이나 전화번호도 다 말해주고 싶지가 않았다. 따박따박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말하는 상담사에게 이제는 하소연할 마음도 달아났다.


상대가 흥분하지 않자 희란 씨도 조금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생각했다. 자신의 말투가 생전 처음 통화하는 여자에게 너무 날 서있던 것이다.


이웃으로서의 희란 씨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희란 씨 스스로 생각한 자신의 성격은 오히려 소극적이고 조용하고 아무 말에나 잘 미소 지어주는 무난하고 적당히 희끄무레한 인간이었다.


전화로 온갖 이상한 인간을 접하다가 이제 자신의 성격도 그 인간들처럼 꼬여버렸다는 생각에 불쾌하고 서글퍼졌다, 심지어 번지수도 잘못 찾고 엉뚱한 곳에 자신의 청소기를 해결해 달라고 전화한 꼴이라니.


희란 씨는 구구절절 왜 자신의 태도가 그랬는지 설명하고 싶었다. 그런 사람은 아니라고 해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 상담사가 자신이 왜 그런 괴팍한 말투였는지 궁금하기나 할까 생각하니 의지가 사라졌다. 그래도 최소한 희란 씨는 자신이 전화로 응대했던 역겨운 인간과 나는 다르다는 걸 어떻게든 증명하고 싶었다. 겨우 에너지를 끌어모아 상담사에게 말했다. 미안하다고. 그리고 마지막까지 응대해 준 상대에게 한 번 더 말했다. 고맙다고.


전화를 끊자마자 눈앞이 아득해지며 속상함이 밀려왔다. 누구보다 싫었던 태도를 그래도 답습하고 있는 자신에 대해.


"하, 출근 준비 해야겠네."





즐겁게, 또는 공감하고 같이 성내며 읽어주시는 브런치 독자분들께 늘 감사한 마음 전합니다.

얼마 전 메일로 자신의 사연을 알려주면 써줄 수 있냐는 분이 딱 한 분 계셨어요. 한 분이었지만 그 의미는 각별하게 다가오더군요. 이 연재물과 관련해서 독자께 받는 직접적인 첫 반응이라서요. 제가 준비해 둔 소재는 아직 반 이상 남아있습니다. 혹시 시간 내어 읽어주시는 분들 중 저처럼, 빌런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지어내서라도 미움과 마음을 삭히고 싶은 분이 계시다면 아래 메일로 남겨주세요.


ogghi@naver.com


제목은 '브런지 사연_익명' 또는 '브런치 사연_가명_홍길동'이라고 통일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1. 브런치 사연_익명 : 이렇게 써주시면 서두에 사연을 토대로 쓴 글이라고 명시하되 저의 이야기인 것처럼 녹여서 풀어가겠습니다.

2. 브런치 사연_가명_홍길동 : 이렇게 써서 '홍길동' 부분에 원하는 가명을 적어주시면 그 가명을 녹여서 주변 인물들과의 대화도 다루며 이야기를 풀어내 보겠습니다. 이 경우도 당연히 서두에 '사연을 토대로 쓴 글'이라고 명시하고 씁니다.


오늘의 글도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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