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제일 높은 사람이잖아요?

공현보 씨는 불의를 참지 않는다

by 오싹
인명과 지명, 상호는 모두 가상의 이름입니다. 매 회차 첫 번째 이야기는 제가 여러 직장에서 겪은 실화이며, 두 번째 이야기는 빌런의 사연을 지어낸 픽션입니다.


내가 제일 높은 사람이잖아요?

끈기만 있으면 어떤 말다툼이든 영원히 이어갈 수 있는 법이다.

해, 안 해, 해, 안 해, 해, 싫어, 해, 싫다고, 왜, 싫으니까, 왜 싫어, 말하기 싫어, 그냥 해, 안 한다고.

그저 지치지만 않으면 자기 의견만 고수하며 영원토록 말다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가끔 고객응대를 하다 보면 생각한다.

하루 한 통화만 해도 나를 향한 평가에 영향이 없다면, 이 인간만은, 이 금수 같은 인간하고 만큼은 끝까지 겨루고 싶다. 지고 싶지 않다는 생각.


그날은 그렇게 투지에 불타올라 있었다.


다만, 내가 친절을 잠시 접어두고 자웅을 겨룰 때에는 혼자만의 원칙이 있었다. 품위를 잃지 않고 싶다는 것. 상대와 똑같은 수준으로 떨어져서 싸우고 싶지는 않다는 원칙이었다. 같이 진창에 빠져버리면 지든 이기든 나 스스로 너덜너덜해지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그날은, 그렇게 여러 결심과 원칙을 가슴에 안고 통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아니, 이봐요. 내가 볼 때 이 제품은 처음부터 불량이었다니까?"

"고객님, 구매내역을 살펴보면 2년 가까이 사용해 주셨고, 저희에게 AS관련 처음 연락 주셨습니다. 2년 남짓 써주셨는데 이번에 파손이 된 것을 초기불량이었던 제품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을까요?"

"이보세요. 지금 나랑 해보자는 겁니까?"

"답답한 마음에 말씀드려 봤습니다. 2년 동안 큰 불편 없이 사용하신 제품이 사용 중 파손을 일으켰다고 해서 사자마자 하자가 있던 제품이라고 환불을 요청하시는데, 저희가 어떻게 요청대로 해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작은 회사라도 고객은 중요한 게 아니냐고 고객이 되물었다. 당연하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무리한 요구하는 걸 모두 들어줄 수도, 들어줄 이유도 없었고, 그래서도 안 됐다.


"고객은 왕 아니에요?"

"고객님들 없인 저희가 존재할 수 없는 관계인 건 맞으나, 그렇다고 해서 불가능한 요구를 들어드릴 순 없습니다."

"상급자 바꿔주세요."


곤란했다. 왜냐하면 내가 상급자였기 때문이다.


"고객님, 제가 고객응대부서 팀장입니다."

"팀장님부터가 그렇게 고객을 무시하시니 이 회사 알 만 하군요."


가끔 고객응대를 하다 보면 생각한다.

먼저 공격당했을 땐, 나도 그 정도 수위의 반격은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품위를 지키자고, 똑같이 유치해지지 말자고 되뇌며 말을 이어가야 했다. 하지만 가시 하나 정도는 박아두고 말하고 싶었다.


"원하시는 답변을 드리지 못하는 건 유감스럽습니다만.. 저도 타당한 말씀을 하시는 고객분들께는, 화를 내시든 아니든 최선을 다해 도움드리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아저씨는 타당하지 않습니다. 진짜로요.


"내가 그쪽하고 더는 얘기 못하겠고. 사장하고 통화할 수 있게 해 주세요."

"고객님, 사장과의 통화는 불가합니다."

"고객은 왕이라면서요."


폭군이었다. 그 해 왕은 폭군이 분명했다.


"고객님, 저와 통화하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설령 사장과 통화가 된다고 해도 답변의 내용이 달라지진 않습니다. 고객님께서 사용 중 파손된 부품은 별도 구매를 해주셔야 합니다. 원하시는 방향으로 도움드리는 건 불가합니다."


그리고 잠깐 조용하다가 왕께선 소보원에 우리를 신고하겠다고 엄포를 놓으며 물러나셨다.

즉위한 지 30분 만의 일이었다.






공현보 씨는 불의를 참지 않는다.

오늘도 뉴스를 보면 부당한 일 투성이다.

"어우, 아니 저렇게 억울하게 죽었는데 가해자는 왜 집행유예일까.."

아내가 측은해하는 말투를 흘리며 뉴스를 보다 혀를 찼다. 현보 씨는 그 말을 듣고 대꾸했다.

"법이 서민 편이 아니라서 그래. 저 사건 유가족이 서명을 요청하는 것 같던데, 이따 링크 보내줄 테니 참여라도 해봐요."


아내는 그래야겠다고 끄덕이며 아이들의 등교 준비를 마저 챙겼다. 현보 씨는 가정에도 충실했지만, 한참 혈기왕성할 때 사회참여활동에도 진심인 사람이었다. 가장 소소한 것으로는 서명 참여부터 시작해서 매스컴에 등장하거나 매스컴에서 조명조차 받지 못하거나, 나오긴 나오더라도 왜곡되어 댓글에서 일방적인 욕을 먹고 있는 사안들을 골고루 살펴보며 직접 시위에 참여하기도 했다. 사회 뉴스, 경제 뉴스 등 골고루 살펴보며 식견도 넓다고 자부했다.


출근이 아이들 등교보다 늦다 보니 뉴스를 마저 보기 위해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

"가전제품이 불량이어도 환불받는 데에 난항을 겪는 소비자들이 증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큰일이다. 불량이어도 환불이 안 된다니 얼마나 답답할까.


"이어서 다음 소식입니다. A기업의 창업주가 직원들에게 갑질을 했다는 소식입니다."

대체 직업, 직급이 다르면 달랐지 좀 더 높으면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저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그는 아내가 아이들을 챙기는 사이 청소기를 밀며 뉴스를 계속 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딸그락'


청소기의 먼지통 버튼 부분이 떨어져 나가는 게 아닌가. 덕분에 먼지통이 열리면서 기껏 빨아들인 먼지들이 다시 바닥으로 쏟아졌다. 짜증이 돋아났지만, 그래봤자 해결되는 일은 없는 법. 버튼이 떨어진 쪽을 들여다보니 마모된 건 아닌데 떨어져 나간 걸로 보였다, 이 물건을 1~2년 정도 쓰는 동안 떨어뜨리는 걸 본 적이 없는데, 깨지거나 마모되지도 않은 부품이 그냥 떨어져 나온다는 건 버튼 부분에서 잡아주는 역할을 제대로 못하는 것일 테고 그건 설계 단계의 미스라는 판단이 들었다. 게다가 자신이 아는 아내는 어떤 사람인가, 물건 하나 허투루 사는 돈이 아까워서, 기왕 산 물건은 망가지지 않게 애지중지하는 사람이 아니었던가.


전에도 어딘가 헐겁다는 말을 한 적이 있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현보 씨는 아내가 아이들을 바래다주러 나가는 사이 설명서를 찾아서 고객센터 번호에 연락을 했다.


직원에게 불편 사항을 설명했다. 그러자 전화를 받는 상담사는 2년 정도 된 제품임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이건 이것대로 기업의 갑질 아닌가? 자신이 아내의 검소함, 물건을 애지중지하는 심성까지 설명해 가며 상담하고 싶진 않았다. 그들은 그걸 알 이유가 없다. 그저, 소비자가 물건을 떨군 적 없는데도 부품이 떨어져 나갔음에 사과를 하고 조치를 해주면 그만이다. 초기부터 불편을 감수한 적이 있음을 설명해도 막무가내였다.


상급자를 바꾸랬더니 자신이라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그럼 더 윗사람을 바꾸라고 했더니 사장은 아예 바꿔줄 수도 없다고 한다. 직원 뒤에 숨는 사장이라니 볼만하다. 직원은 끝까지 자신의 입장만 고수했다. 현보 씨는 사장을 감싸느라 급급한 이 직원과 말씨름을 할 이유가 없었다. 버튼 값은 얼마 하지 않지만, 소비자로서의 자신의 권리와 물건을 귀하게 썼을 아내의 명예는 돈으로 따질 수 없었다. 소비자의 권리 보호를 위해 현보 씨는 끝까지 싸울 작정으로 전화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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