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잖게 말했으니 괜찮죠?

지명국 씨는 솔직한 편이다.

by 오싹
인명과 지명, 상호는 모두 가상의 이름입니다. 매 회차 첫 번째 이야기는 제가 여러 직장에서 겪은 실화이며, 두 번째 이야기는 빌런의 사연을 지어낸 픽션입니다.


점잖게 말했으니 괜찮죠?

점심시간이 지나고 오후 첫 전화가 울렸다.

"감사합니다. 클린짱입니다."

"네, 수고 많으십니다. 선생님."


예감이 좋았다. '선생님'이라는 호칭은 과했지만, 아주 매너가 좋은 분의 전화였다. 자사 제품을 8개월 남짓 사용하셨다고 했다. 이상하게도 사용기간에 대한 어필을 듣자마자 곧바로 불길해졌다. 사람이란 자신이 바라는 것을 말에 담는 법. 자신이 사용한 기간을 불편사항보다 먼저 언급하는 사람은 대부분 목표가 있었다. '내가 1년도 안되어 불미스러운 일을 겪었다'라는 점을 지속적으로 어필하겠다는 원대한 목표. 하지만 고장증상이라면 8개월은 충분히 무상보증이 가능한 시기이지. 좋다. 얼마든지 오십시오 고객님.


"봉 부분이 파손되어서요."


가십시오 고객님...


파손이라니.. 자주 겪던 대화 패턴이 예상되었다. 우리는 파손된 제품은 보증기간 내에 연락을 주셔도 유상수리가 원칙이라고 AS정책에 명시되어 있다. 상세페이지에도, 설명서에도 적혀있는 내용이지만 이 내용은 우리에게 방패가 되어주지 못할 때도 많았다. 어디에도 기재되지 않은 '깨진 걸 무상으로 받을 권리'를 고객이 어떤 식으로든 끈질기게 밀어붙일 때면, 차라리 사람 좋은 체하며 하나 드려버리고 싶을 때도 많다. 상세페이지고 설명서고 뭐고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마음으로 끝내버리고 싶을 만큼 지치게 되는 것이다.


"고객님.. 파손의 경우 1년 내에 연락 주셔도 유상처리 되는 점.."


이럴 때면 종결 표현 하나하나에도 고민이 따라온다. '양해부탁드린다'? 뭔가 우리가 잘못한 느낌이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고... '참고 부탁드린다'.. 이 표현은 너무 통보하는 느낌이라 반발이 있을 것 같고.. 결국 0.0001초의 고뇌 끝에 약간의 저자세를 택하며 '양해부탁드린다'라는 표현으로 안내를 했다.


"음, 선생님. 이건 AS가 안 되나요? 제가 1년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만.."

역시 그랬다. 기간에 대한 어필.

이제부터는 서로의 할 말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누가 지치냐의 문제, 희대의 창과 방패가 우리네 업무 시간엔 늘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한참을 채쟁챙챙 창과 방패가 불꽃을 튀기던 중 고객분이 말하셨다.


"선생님, 이런 말씀까지는 구차해서 드리지 않으려 했습니다.. 8개월이라는 시간은 초기 불량으로 판단하기도 어렵다는 말씀에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저는 업무 특성상 이 청소기를 쓸 일이 별로 없으며, 손댈 일이 적은 만큼 떨어뜨리는 일도 생길 가능성이 적겠죠.. 아니, 없습니다. 이 물건에 충격을 가할 만한 상황을 만들어놓고 부품 값 아까워서 둘러대는 파렴치한 사람은 아닙니다.. 정말입니다 선생님. 저도 이해가 안 가서 그렇습니다.."


점잖고 부드러운 말투만으로 판단하면 이 분은 무조건 눈 딱 감고 해 드리는 게 맞다. 하지만 사람이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말투나 겉모습을 꾸며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던가, 사연이 구구절절한 것만으로 기존 정책을 무너뜨리면 정책의 힘이 약해지니, 넙죽해드리기엔 갈등이 되어 한 번 더 방어했다. 그러자 고객분의 말씀이 이어졌다.


"선생님, 제가 이렇게 점잖게 말씀드렸는데.. 정책만 말씀하시는군요.. 저를 흔히 말하는 진상과 비슷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정말 아닙니다. 제가 억울해서 계속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숙고해 주실 수 없으신 건가요..?"


이미 이 통화만으로 20분가량 소요했다. 정말 억울했을 수 있겠지만 CCTV라도 돌려보지 않는 다음에야, 어떻게 억울함을 말투만 갖고 믿어줄 수 있겠는가. 하지만 내 나름의 기준과 달리, 상대는 비싸지 않은 부품인 걸 알면서도, 정책 얘기를 몇 번을 듣고서도, 끝내 같은 말을 잔잔한 말투로 반복하는 고객분이었고, 패배의 언덕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았다.


결국 이 점잖은 고객분에게는 '저희도 확인할 길이 고객님들 말씀뿐이다 보니 정책대로 안내드린 점 양해부탁드린다.'라는 유감 표명과 함께 '이번엔 특별히'라는 밑밥과, '다음엔 파손으로 연락 주실 경우 유상 처리 된다'는 부분에 대한 당부를 하며 파손된 부품을 무상으로 제공하면서 잔잔한 기싸움에서 대차게 패배했더랬다.






지명국 씨는 솔직한 편이다

해외출장이 잦은 명국 씨는 모처럼 이른 시간에 집에 들어왔다. 3일 만에 돌아온 집. 친구에게 따로 부탁해 둔 덕분에 함께 지낸 지 6년 된 강아지 맹구는 사료도 든든히 먹고 달려와 자신을 반겨주었다.


"아이고.. 맹구야.. 삼촌이 잘 놀아줬어..? 착하다. 우리 맹구.."


그리웠던 만큼 안겨서 낑낑거리는 맹구를 한참 쓰다듬어 주다가, 바닥에 떨어진 사료며, 맹구가 물어뜯으며 논게 분명한 두루마리 휴지까지, 치워야 할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맹구야 잠깐만 기다려. 청소 좀 하고 놀아줄게."


청소기를 거치대에서 빼내어 바닥을 좀 밀어주려던 찰나 청소기 봉 부분이 대롱대롱 매달린 듯 전선까지 노출되어서는 볼성사나운 모습이 되어있는 것이 아닌가. 집에 청소해 주는 분도 없고, 근처 사는 친구는 맹구 밥 주는 것과 화장실 치워주는 것만 챙겨준다. 그의 집은 보통 로봇청소기가 청소를 해줬지만 로봇청소기가 고장 난 덕에 서브로 무선청소기를 집에 오는 며칠에 한 번씩 돌려주는 게 전부였다. 신중한 그의 성격만큼이나 감정대로 세게 물건을 다루지도 않을뿐더러 청소기를 내던지는 것도 아닌데 이게 무슨 갑작스러운 상황이란 말인가. 그래도 청소는 해야겠기에 급한 대로 실내용 빗자루를 이용해서 어수선한 것들을 쓸고 걸레질까지 해주었다.


소파에 기대어 앉은 채로 맹구를 쓰다듬어주며 서랍장에 깔끔히 모아둔 설명서 더미에서 청소기 설명서를 찾았다. 구매한 날짜도 제품 설명서 표지마다 적어놓은지라 확인하기가 편했다. 달력을 보니 이 청소기는 구매한 지 1년도 되지 않았다.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잠시 뒤 연결된 상담사에게 그 특유의 정돈되고 예의 바른 말투로 인사를 하고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나 대답은 생각보다 냉정했다. 자신의 제품 파손이 초기 파손으로 분류되기엔 기간이 애매하다는 답변. 그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십분 이해된다. 하지만 내가 8개월가량의 기간 동안 제대로 쓴 횟수가 10회 남짓인데, 부딪히거나 쓰러진 적도 없는 청소기를 모처럼 쓰려니 봉이 쑥 빠져 전선이 노출되는 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의 과실은 아닌 것 같았다.


설명을 재차 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흔들림이 없었다. 이쯤 되니 명국 씨도 서운하고 억울하기 시작했다. 결국 아무리 정책이란 게 있어도 사람이 하는 일인데 이런 특수한 경우에 대한 예외 처리를 해준다면 그 경험으로 업체에 대한 신뢰나 고마움이 생기지 않겠는가. 혹여나 상대가 자신보다 인생경험의 폭이 좁다면 그런 유연함을 가지기 어려울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여간해선 화를 내지 않는 명국 씨이기에 한 번 더 꾹 참고 다시 조곤조곤 자신의 입장을 피력했다.

아까보다는 상담사도 고민하는 것 같았지만, 이내 비슷한 대답이 돌아왔다. 이럴 바엔 포기라도 빨리 할 수 있게 AI와 통화하는 게 나을 뻔했다. 점점 명국 씨는 자신이 구차하게 느껴졌다. 2만 원 부품 값이 아까운 게 아니다. 이건 자신의 억울함이 전달되느냐 아니냐의 문제였다. 내가 이 회사의 물건을 막 다뤄놓고 떼쓰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이해시키는 것이 중요해져 버린 것이다.


결국 자신의 답답한 토로가 전해진 걸까. 상담사는 그의 입장을 감안하여 이번 경우는 비용 없이 처리하겠다고 했다. 사실 100점 만점의 대답은 아니었다. 정말 거의 쓴 적도 없이 물건이 파손되었다는 걸 믿고, 자신들 물건의 불량 가능성도 배재할 순 없겠다는 인정이 있었다면 명국 씨의 마음은 좀 더 나았겠지만, 그래도 '과실'이라는 단어에 무기력하게 수긍하는 통화로 끝나지 않은 것에 소소한 만족을 해야 했다.


급한 일은 다 해결했으니 루틴대로 집에 별일이 없었는지 홈캠을 돌려보며 씻을 준비를 하였다. '빨리 감기'로 친구의 방문 외엔 누군가의 침입이 없었음을 확인하며 영상을 마치려는 계획과 달리 영상에선 반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자신이 도착하기 몇 분 전 맹구가 현관문 가까이 다가오는 소리에 놀란 건지 거실을 방방거리고 거실 끝과 끝을 뛰어다니다가 청소기 거치대와 부딪혔고 청소기가 앞으로 쓰러졌다.


다행히 청소기에 부딪히진 않았지만 바닥에 떨어지는 큰 소리에 한 번 더 놀란 맹구는 바닥에 오줌을 지리며 방방거렸고 이어서 비밀번호를 누르고 친구가 들어왔다. 친구는 넘어진 청소기를 세워둔 다음 맹구를 달래며 바닥의 오줌도 치워주고 사료를 그릇에 부어주고 몇 분 동안 소파에 앉아 맹구를 쓰다듬고 장난감을 던지며 놀아 주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친구가 떠난 문 앞을 한참 바라보던 맹구는 소파 위 두루마리 휴지를 입에 물고 뜯어대며 놀았다.


한 손에 목욕가운을 든 채로 영상을 바라보던 명국 씨는 결국 반려견의 과실이었음을 확인하며 잔잔한 실랑이 끝에 지켜낸 2만 원이 내심 민망스럽게 느껴졌다.


"그래도... 예의는 지켰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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