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삭동 씨는 알아주는 해결사이다
인명과 지명, 상호는 모두 가상의 이름입니다. 매 회차 첫 번째 이야기는 제가 여러 직장에서 겪은 실화이며, 두 번째 이야기는 빌런의 사연을 지어낸 픽션입니다.
제품이라는 건 모름지기 비슷한 양이 팔리다가도 불쑥 운이 닿거나 여럿의 노력이 모여 불티나게 팔리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바란다. 세계 정세나 천재지변이나 교통문제나 노사 갈등 등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제품 재고가 항상 물류창고에 낙낙하게 있었으면 좋겠고 어디 마차에 실어서라도 고객 물건은 배송 진행 중이기를 말이다. 하지만 걱정한 일들이 마음처럼 풀리지 않는 경우는 종종 있는 법. 이 날도 그랬다. 택배 파업으로 고객들의 물건 배송이 지연되고 있었고, 불만 전화가 여기저기서 이어졌다.
이쯤 되니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이번 고객님은 얼마나 화가 나있는 상태이실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마른침을 한 모금 삼키고 전화를 받아야 했다.
"감사합니다, 클린짱입니다."
"어이고, 수고하십니다!!"
기분이 좋은 톤이셨다. 유쾌한 분이신 걸까. 이러다가 갑자기 사자후를 내뿜을 가능성은 현저히 낮아 보였다. 어떤 용건으로 전화를 주셨는지 확인해 보았다.
"아아, 그 클린짱에서 파는 일렉트릭 프리미엄 파워 디벨롭 킹덤 제품 말인데요. 왜 배송 조회를 해도 움직이질 않는 겁니까아?"
유쾌한 말투로 나의 마른침을 한 번 더 고이게 하셨다. 사과 엔진을 부르르릉 걸어보았다. 무작정 우기는 분께는 직업마인드를 잊고 '내 이 분을 반드시 이기리라.'라는 부푼 꿈을 가져보기도 하지만, 배송지연은 얘기가 달라진다. 당분간은 사과가 이어질 전망이었다.
"고객님,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 제품이 지금 택배 파업으로 배송지연상태라고 확인받았습니다."
"으이그.. 그럼 전화를 내가 걸기 전에 먼저 주셨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이?"
"말씀 맞습니다. 저희가 세심하게 안내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판매량도 많았으나 인원은 적었기에 한 분 한 분 다 전화를 드릴 형편이 못되었다. 전 직원이 아웃바운드에 묶이면 고객센터로 들어오는 전화 응대는 놓치게 되기 때문이다. 문자 안내를 일괄적으로 하긴 했으나 배송지연으로 불편 겪는 모든 고객에게 전달되며 마음을 달래주기엔 부족했을 것이다. 전화 준 고객도 그중 한 분이셨으리라.
"그... 내가 말요? 전화받는 분에게 뭐라고 하는 게 아니요. 이것을 선물하려고 구매한 제품인데 말요! 주려던 사람에게 아주 폼을 잡으면서 말했다 이거요. 내가 너 줄 것을 샀으니 너는, 못해도 3일 안에는 선물을 받게 될 것이다! 하면서 폼을 잡았는데 내 입장이 말이 아니게 됐단 말입니다?"
말투는 여전히 유쾌하게, 너무 무겁거나 무섭지 않게 풀어가고 계셨지만 마음까지 가벼워질 순 없었다. "네.. 네..."를 연발하며 대답하고 있으니 고객 분께서 계속 말씀하셨다.
"그 저, 내가 사람이 좋아서 그냥 넘어갈라니까 배터리 하나 정돈 주시오! 모타를 주시던가!"
하필 주요 부품 중 가장 비싼 부품을 선택하셨다. 그때는 내가 아직 1년 차였을 때였고 융통성 있는 제안이 참 힘들었다. 우리가 사과할 일이 있는 입장에서 회사의 이해타산에 대해 생각하고 사측의 입장을 고객에게 납득시키기란 너무 힘든 영역이었다.
"네? 배터리.. 요? 아.. 너무 죄송합니다.. 배터리는..."
"너무 비싸다 이 말요? 으이.. 거참.. 그 정돈 줘야 미안해하는 마음이 삭- 느껴지는 거인데..!"
"아.. 제가 권한이 없어서.. 죄송합니다.."
한참을 배터리 정도는 줘야 늦게 받아도 기분이 풀린다며 허허 웃으면서 주장을 굽히지 않으시자 진땀이 났다.
"그럼 다른 거라도 줘보쇼! 그래도 쓸모가 있는 걸 뭐 더 줘야 나도 끊을 마음이 생기겠으니까이! 허허허"
시종일관 유머러스한 말투를 잃지 않으셨다. 하지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오히려 이 분의 유머감각 들어찬 말투가 삽시간에 차가워질까 봐서, 내 제안에는 만족하지 못하실까 봐서 입을 떼기가 어려웠다. 모터도 어렵다. 브러시 헤드도 어렵다. 죄송하다. 이 말만을 연발하며 겨우겨우 고민하다가 필터를 종류별로 하나씩 드리는 걸 제안해 보았다.
"아이.. 너무 손해 안 보려고만 하는 거 아뇨..! 뭐.... 씁.... 그래도 뭐뭐 전화받는 내내 미안해 허시고..! 내가 이쯤 합니다! 필터 세트는 꼭 주셔야 합니다이!"
"네, 물론입니다..! 양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거.. 두 세트 주는 건 안되죠? 낄낄"
"아.. 두 세트..! 드리겠습니다..!"
"주실 수 있는 거였고만! 농담이었는데, 잘 받을게요이!"
- 뚝 -
"휴-"
숨 돌리려는 찰나, 전화가 또 이어졌다. 이 날은 고객분들의 기분을 달래는 가지각색의 멘트만 온종일 주절거렸던 고된 날이었다.
"삭동아, 나는 네가 있어 참 든든하다이?"
이 말은 삭동 씨를 가장 기분 째지게 만드는 말이다. 그는 부모님에게나 친구들에게나 비슷한 칭찬을 받을 때가 많았다. 유독 능글능글하고 넉살 좋은 그를 모두가 어찌나 반기는지,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도, 가족 모임에서도 그가 빠지면 너 나 할 것 없이 연신 전화를 걸어 어떻게든 불러내려 하는 것이다.
"아니, 아줌마! 우리가 오늘 여기서 먹은 술이 맻 병인데, 서비스 주는 게 그리 아깝소!!"
"아유, 손님.. 그게 아까워서가 아니고 요새 채소값이 많이 뛰어서 그래요.."
"야박하네.. 야박해..! 동네 장사 그렇게 하는 거 아뇨!"
"아이고 야야, 사장님 곤란하시다이!"
"삭동아! 아, 서운하잖어! 이거 단골 놓치는 건데 저 사장님이 답답허게 굴잖어!"
"이런 걸 진-상이라고 하는 거여! 사장님, 이놈들이 좀 취해서 그러니 맘 푸쇼! 파전 써-비스 말고, 우리 술 마시면서 집어먹게 이거 기본 뻥과자나 안 떨어지게 계속 좀 주쇼!!"
"아.. 네.. 그건 계속 챙겨드릴게요.."
"삭동아 인마, 너는 사람이 너무 좋아서 탈이여. 몇 번만 더 말하면 파전 한 장 받을 수 있었던 거인데!!"
"넌 너무 써-비스를 좋아해서 탈이여!"
한참을 그렇게 푸념하고 웃고 떠들다가 집에 가는 길에, 삭동 씨는 친구에게 슬쩍 운을 띄웠다.
"야야, 내가 너한테 뭐 하나 조만간 보낼 거이니까 그렇게 알어라!"
"뭘 보내 보내긴?"
"아이, 그 그 낼모레 이사잖냐. 필요할만한 거 내가 날짜 딱 맞춰서 턱 하고 보낼 거이니까. 그리 알어!"
친구를 적당히 궁금하게 하고는 괜스레 으쓱하며 집에 돌아와 곯아떨어진 삭동 씨는 다음 날 청소기가 잘 배송되고 있는지 조회를 해봤다. 분명히 송장번호는 떴는데 화면이 텅 비었다. 이걸 어디에 물어봐야 하나 한참 사이트를 마우스로 여기저기 클릭하면서 겨우 전화를 했더니 판매처 고객센터 번호를 알려주겠단다.
안내받은 번호를 다시 메모해서 전화를 걸었더니 두세 번 거니까 그제서 연결이 되고 직원이 전화를 받았다. 신명 나게 인사를 건네며 왜 배송이 안 뜨고 화면이 허옇게 보이는 건지 물었더니만 직원이 택배파업 이야기를 꺼내며 배송이 늦어진다고 하는 게 아닌가.
이삿날 떡하니 청소기를 받아볼 친구의 얼굴을 상상한 삭동 씨는 맥이 빠졌다. 괜히 어제 생색은 내 가지고는 곤란하게 되어버렸다. 그냥 알았다고 끊기엔 아쉬웠다. 택배 파업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이십만 원 가까이 주고 제품을 샀는데, 요즘처럼 잽싸게 배송되는 세상에 언제 받을지 확답이 어려워서 미안하다는 답은 참으로 섭섭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삭동 씨가 누군가. 꼭 뭐라도 하나 챙겨 받고 주변 지인들에게 "역시 삭동이야!" 소리를 듣고야 마는 해결사가 아닌가.
본래 처음에는 질러 놓고 살살 줄여나가는 것이 자타공인 흥정의 비결 아니던가. 시원하게 배터리 아님 모터라고 원 플러스 원처럼 말했더니 이 직원이 쩔쩔매는 게 전화로도 느껴진다. 삭동 씨는 아직 제안할 카드가 많았다. 그런데 직원이 자꾸 방어만 하는 것이 영 흥이 안 났다. 알아보겠다고 말이라도 해주지 뭘 다 안된다 어렵다고만 하는가. 그래놓고 마지막에 필터를 주려고 하길래 그거라도 야무지게 받아보고자 3종 세트를 다 줄 거냐고 물었다. 그제야 가능하다는 대답이 나왔다. 성과가 소소하지만 그래도 뭐 하나 챙겨 받았으니 삭동 씨는 이번에도 "역시 삭동이다!"를 들을 수 있을터.
탄력 받은 김에 한 번 더 흥정을 했다. 돼도 그만 안 돼도 그만이었지만, 필터를 두 세트 달라고 해 본 것이다. 직원은 아까와 달리 방어할 생각 따위 없이 삭동 씨 요구대로 두 세트를 주겠노라 약속했다. 이럴 줄 알았다. 언성 한 번 안 높이고 유쾌하게 상황을 풀어갔으니 전화받은 직원도 덕분에 웃지 않았을까.
맘 같아선 택배 파업도 삭동 씨가 짠 하고 나서서 중재하고 해결해버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내가 바쁘지만 않았어도 거까지 가서 상황 해결을 딱! 해버리는 거인데!"
라고 혼잣말을 하며 으쓱이는 삭동 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