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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채움 Nov 12. 2020

필름 카메라와 단 한 나라만 갈 수 있다면, 단연 대만


필름 카메라와 함께 세 차례의 해외여행을 떠났다. 베트남, 스페인, 그리고 대만. 그중 가장 필름 카메라와 궁합이 가장 잘 맞았던 곳은 대만이다. 처음 대만에 도착하자마자 강렬한 느낌이 왔다. 아직 가방에서 필름을 꺼내기도 전이었지만 알 수 있었다. 어마어마한 사진들이 나올 거라는 예감.

낡은 건물, 굵게 휘갈겨진 한자, 푸릇푸릇함을 뽐내는 이파리, 곳곳에 숨어있는 아기자기한 가게. 필름을 찍기에 이보다 완벽한 곳이 있을까. 그리하여 부단히도 앵글을 찾아다녔고, 만족스러운 사진들을 얻었다. 아래는 부지런히 눌렀던 셔터의 결과물이다.

 

26번째 롤, 미놀타 TC1, 아그파 비스타 400, 2018년 10월 24일 인화

한국의 연남동과 비슷한 느낌이라기에 찾아간 곳.이지만 연남동과 비교했을 때 사람이 적고 거리의 규모도 작아 놀랐다. 하지만 대만 느낌 뿜뿜인 길거리와 아기자기한 소품샵에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처음 대만을 가서 가장 놀랐던 것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건물이 정말 많이 낡았던 것. 대만 사람들은 오래된 건물을 철거하지 않는다. 리모델링과 보수 작업을 거쳐 조금씩 고쳐쓸 뿐이다. 일본 치하에 있을 때 내진 설계로 지어진 건물들이 워낙 튼튼해 계속 쓴다는 말이 있는데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오래된 건물들이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대만의 핫플레이스인 화산 1914 문화창의산업원구, 송산문화원구, 사사남촌은 각각 양조장, 담배공장, 군인 숙소로 쓰이던 곳을 개조해 시민들의 휴식처로 새로 태어났다. 내가 생활하는 도시는 깨끗하고 늘 새로웠으면 좋겠지만, 잠깐씩 들리는 도시들은 그래도 좀 낡았으면 좋겠다. 이기적인 관광객의 얼굴을 한 나는 그렇게 대만의 빈티지함에 푹 빠져들었다.

두 번째로 놀랐던 것은 대만 길거리의 식물들이다. 그들은 우리나라의 식물보다 존재감이 크다. 더운 지방 식물에게서 느낄 수 있는 특유의 강인함이 있다.

대만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지점이 여기에 있다. 낡은 건물과 푸릇한 식물의 조화. 옛것과 새것의 조화는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것이 건물과 식물의 일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오랜 세월을 버텨낸 건물과 그 사이를 헤집고 생명력을 전하는 식물들. 그 풍경이 나를 계속 대만으로 끌어당긴다.

대만 특유의 문화라 하면 야시장이 빠질 수 없다. 놀랍게도 대만 사람들에게 부엌은 집을 이루는 필수 요소가 아니다. 부엌이 없는 집도 많다고 한다. 그 이유는 집에서 해 먹는 것보다 밖에서 사 먹는 경우가 더욱 많기 때문이다. 아침에는 딴삥과 같은 간단한 아침거리를 사서 등교와 출근을 한다. 학교나 회사에서 아침을 먹는 것이 일상이다. 밤이 되면 간단히 저녁을 해결하려는 사람들로 야시장이 붐빈다.

대만 야시장에는 맛있는 음식이 정말 많다. 가격도 저렴하다. 하지만 음식보다 좋은 것은 대만 사람들의 저녁 일상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함께 모여 가볍게 식사를 하고 들어가는 모습이 보기 좋다.

역으로 다른 나라 사람이 보는 한국의 저녁은 어떨지 궁금하다. 한 외국인이 TV에서 한국인이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아무도 학교와 회사에 지각하지 않는 걸 보고 놀랐다는데.. 이것과 비슷하게 열심히 놀고 열심히 일하는 느낌을 받으려나.

밤늦은 시간에 찾아간 야시장이기에 이렇게 사진이 잘 찍힐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지우펀의 풍경을 담기 위해 가져 간 아그파 비스타 400은 지우펀의 모습을 제대로 담지 못한 대신, 이런 깜짝 선물을 주었다. 역시 내 최애 필름답다.


한국인들이 꼭 가는 여행지 중 하나인 스펀 기찻길. 이곳에서 풍등에 소원을 써서 날린다. 이곳에 오는 관광객 대부분이 한국인인데, 어마어마한 인파와 달리 그들이 적는 소원의 종류는 몇 가지가 되지 않는다. 로또 맞게 해 주세요, 돈 많은 백수가 되게 해 주세요, 우리 가족 행복하게 해 주세요.

소원을 담고 널리 널리 날아가는 풍등. 정세랑 소설 '보건교사 안은영' 속 주인공은 에너지가 부족할 때마다 절을 찾아간다. 사람들의 소원이나 희망이 담긴 곳에서 에너지를 얻기 때문이라고 한다. 정말 그럴까? 우리의 소원은 그저 새카만 욕망 덩어리인 것 같은데. 불로소득이나 안일함을 바라는 이 마음들이 어찌 좋은 기운을 풍길 수 있는지 궁금하다. 

기찻길은 어느 나라나 아름답다. 특히 필름 카메라와 궁합이 잘 맞는 장소 중 하나기에 기찻길만 있으면 셔터를 찰칵.




26번째 롤, 미놀타 TC1, 필름 모름, 2018년 10월 24일 인화

스펀으로 들어가는 길. 왠지 토토로가 나올 것만 같은 풍경이다. 대만은 일본 식민치하에 있던 나라 중 하나이면서 우리나라와 달리 일본에 대한 호감도가 굉장히 높은 나라이다. '일본의 또 다른 내수시장'으로 일컬어질 만큼 대만 거리에는 일본 브랜드를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으며, 카페나 상점 등에서도 일본 느낌이 강하게 풍겨올 때가 있다. 그래서인지 가끔은 자연마저도 닮아 보인다. 사실 숲의 모습은 한중일 어딜 가든 비슷하지 (코쓱)

스펀 기찻길을 가다 만난 작은 상점. 음식과 과일 등을 팔았다. 이 일대에서는 대만이 아닌 베트남 같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늘 봐오던 대만의 도심이 아닌 시골이었기에 그랬던 것 같다. 그러고보면 시골은 어느 나라든 한적하고 평화롭다. 분명 그곳의 거주민들에겐 그곳 역시 도시못지 않은 치열한 삶의 전쟁터일텐데도.

뻔질나게 드나들던 타이페이 메인 스테이션. 지하철, 기차, 버스 등 온갖 대중교통의 중심지라 늘 붐비는 곳이다. 무엇보다 한번 들어가면 쉽게 나올 수 없다. 코엑스와 고속터미널의 대만 버전이랄까. 역 안에서 몇 번 울다 보면 대만 사람들이 나를 목적지로 데려다준다. 출장을 갈 때마다 대만 사람들의 친절함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타이페이역 대합실에 들어온 햇빛. 필름을 시작한 이후로 햇빛을 숭배하게 되었다. 노란 볕이 필카에 그대로 드러났을 때의 쾌감이란. 아이, 따뜻해.

타이페이의 밤거리. 대만은 여행보다는 출장으로 자주 다녀왔기 때문에 대만의 낮 풍경보다는 밤거리가 익숙하다. 낮에는 사무실에 처박혀 있으니 말이다.


3개월에 한 번씩, 출장 명령이 떨어질 때마다 좌절하던 집순이는 이제 출장마저 그리운 경지에 올랐다. 제가 잘못했어요. 대만 가게 해주세요 제발. 내가 이렇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지. 코로나 바이러스와 함께 한지 어느덧 9개월이 되었지만 코로나가 바꿔놓은 일상은 여전히 버겁고 지친다. 옛끼 나쁜 놈. 썩 물러가라. 나 여행회사 다닌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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