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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희 Sep 15. 2021

‘처음’엔 다 그래

은은함과 구수함이 음식으로 태어나면 평양냉면

 내 선택이 경솔했나, 의심이 들 정도였다. 임신 통지를 받고는 상상보다 훨씬 많은 것이 변했다. 지금으로부터 8년 전쯤 됐을까. 평양냉면의 구수함과 은은한 육향에 풍덩 빠져버렸다. 워낙 한 가지에 꽂히면 질려야 비로소 관두는 끈덕진 구석이 있긴 하지만, 평양냉면은 그 맛 자체로도 백 년은 족히 먹을 수 있을 만한 '소울 푸드'였다. 집 근처 5분 거리에 유명 식당인 평양면옥을 시작으로, 서울에서 이름 좀 날린다 하는 우래옥, 을지면옥, 봉피양, 필동면옥, 평가옥 등등 여러 집을 천천히 순례했다. 많이 먹을 땐 일주일에 세 번씩 먹었다. 혼자서도 먹고, 남자 친구와도 먹고, 직장 동료들을 직접 운전해서 모시고 가 점심으로 먹기도 했다.

 

 입덧이 시작되고는 음식의 이름만 들어도 ‘먹을 수 있겠는 것과 우웩 저리 치워' 하는 것이 머릿속에서 판가름이 났는데, 이 무슨 운명의 희롱인지 배척하는 여러 음식 중에 평양냉면이 속하는 게 아니겠는가. 그토록 즐기던 평양냉면 육수를 상상만 해도 헛구역질이 나는 듯했다.


 당황스러운 건 평양냉면 따위는 귀여운 애교이자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 몰아치는 변화에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매일 루틴하게 운동하는 게 하루의 낙이었던 생활 패턴은 임신 초기 산모에게 '금기사항'으로 취급됐다. 임신 12주까지는 유산의 가능성이 늘 존재하거니와 매일 하던 운동이란 게 코어를 이용한 근력 운동이 위주라, 병원에서는 자궁 수축을 우려하며 즐기던 운동 말고 기껏해야 가벼운 요가 내지는 스트레칭이나 산책 정도를 권고한다.


 많은 임산부들에게 나타나는, 원인을 정확히 알 수 없는 염증이 얼굴 피부의 반을 순식간에 뒤덮기도 했다. 하루는 자고 일어났는데 그 염증이 후두를 타고 내려가 목에 혹이 난 것처럼 침샘이 붓는 임파선염(림프절염) 진단을 얻었다. 거울 속 나는 급기야 눈물을 흘렸다. 이비인후과와 피부과의 의사 선생님께서는 공통된 말씀을 하셨다.


"며칠만 약을 복용하면 쉽게 나을 수 있는 증상인데 임산부라 처방할 수가 없네요. 큰 문제 아니니 자연히 낫도록 기다려보죠."  


 그뿐인가. 앞선 프롤로그 글에서 언급했던, 가족들에게 행복을 전할 수 있을 거라 기뻐하던 내 '이타심'마저도 비가 내렸다 그쳤다 하는 날씨처럼 오락가락 댔다. 제일 먼저 시댁에 첫 소식을 전하던 날. 너무 너무! 기뻐하는 시어머님과 통화하다 갑자기 나는 배가 아파졌다. 지금껏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톤으로 연신 '너무 좋다'라고 말씀하시는 그녀 따라 나도 감동이 밀려와, 어머님 좋으세요? 여쭈니 '그럼! 얼마나 기다렸는데...' 울먹거리시는 시어머님 대답에 별안간 뭉클함은 어디 가고 감정이 툭, 냉랭하게 돌아 선다.


 나는 임신으로 속이 불편해 먹지도 자지도 못하는 이 현실이 퍽 즐겁지 만은 않은데 기뻐하는 그녀의 마음이 '개인의 욕구가 채워져 만족해하는 상태'로 여겨지며 급기야 외로움이 밀려오는 것이 순간의 솔직한 감정이었다. 마음이 콩알만큼 쪼그라들었다 커졌다 하는 감각을 오랜만에 그리고 세게 느낀다. 입덧과 운동 금지, 피부 트러블과 꽁해지는 감정까지 이 모두를 호르몬 탓이라 돌려 본다.


 사흘 뒤, 속은 괜찮은 지, 먹고 싶은 게 있는지 어머님께서 카톡을 보내셨다. 마음이 퐁듀 치즈처럼 녹는다. 장난하냐 호르몬아. 휙휙 변하는 마음을 애꿎은 호르몬 책임으로 다시 한번 전가해본다.

 

그럼 뭐 어때?


 엄마와 아빠 그리고 여동생이 돌아오는 내 생일을 축하해 준다며 집에 놀러 왔다. 준비한 서프라이즈로 가족에게 임신 소식을 전하고, 한 바탕 감동의 도가니탕을 마신 뒤에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몸 상태는 어떻고, 엄마는 우리를 가졌을 때 입덧이 어땠는지 소소한 담소를 나누면서 나는 요즘의 감정을 식구들에게 가볍게 내놓았다.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지금까지는 나라는 것을 굉장히 내세우고 살아왔던가 봐. 임신을 하고 나니까 이제 나는 내려놓고 뱃속에 있다고 하는 그 생명체에게 모든 걸 양보해야 하는 거야. 나를 우선순위에 놓지 못하는 현실에 벌써부터 내가 없어진 것 같고 어쩌다 슬퍼지기도 해."


 임신은 내가 예상할 수 있던 수준보다 훨씬 더 치러야 할 대가가 컸다. 동산 너머 미지의 세계는 첩첩산중이었던구나. 엄마는 아마도 걱정스러운 마음에 좋은 생각만 하라고 했지만, 예쁘게 생각해야 한다는 둥 우울해하면 안 된다는 강박 따위 나는 취급하지 않는다. 그런 생각 좀 들면 어때? 이게 지금의 솔직한 마음인데. 일어난 감정을 억지로 밀쳐내기보다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 나를 아끼는 최고의 방법이다. 동생은 내 말에 그대로 공감해주었고 엄마는 경력자인 만큼 원래 다 그런 거라고, 금방 지나갈 거라고 말해 주었다. 과거 오랜 시간 가족에게 걱정시킬 만한 말은 일절 꺼내지 않는 컨셉의 큰 딸이었지만 꼭 그것이 행복이라고 볼 수는 없단 걸 느끼게 된 이후, 나는 자연스러운 감정을 가볍게 털어놓는 것도 건강한 관계에서 누릴 수 있는 건강한 모습이라 여긴다. 꺼내놓고 나니 심연이 한결 맑아진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게 나한테 주어진 상황이니까 받아들이는 과정 중이야." 라는 말도 빼먹지 않고 사실대로 덧붙였다.


  평양냉면아, 반가워!

ⓒ 2021. 토희 all rights reserved.


 몇 주가 지나고 동부간선도로를 달리던 어느 오후에 평양냉면의 맛이 강하게 뇌리를 스쳤다. 평양냉면이 말했다. 당장 자기를 먹으러 오라고!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그 즉시 남편과 부모님에게 연락을 돌려 몇 시까지 평양면옥 올 수 있는 사람에게 쏜다고 했다. 우리 중 제일 먼저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 마음의 갈증을 한껏 시원하게 해소하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까짓 거 앞으로 포기할 것은 깔끔히 포기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 중에 좋아하고 유익한 것을 찾아서 움직여야지. 무엇을 탓할 것도, 서글퍼질 것도 없어. 그래봐야 나만 손해잖아? 내게 주어진 몫을 시원한 평양냉면 한 그릇 후루룩 들이키듯이 호로록! 즐겨보는거야.'


 한 보름을 골골대고 나서였다. 인생 역대급 변화의 소용돌이 앞에서 회피보다 정통으로 맞는 것을 선택했기에 다시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동안 처음 겪는 낯섦에 적응하느라 뱃속 누군가에게 신경을 못 써줬는데, 이제는 건강한 양분을 정성스레 챙겨주려 한다. 떡볶이 말고 제철 음식을 섭취해야겠다. 배달 요리보다 고운 집밥을 차려먹어야겠다. 결국 그게 나를 위하는 것임을 느낀다. 때로 넘어지기도 하겠지만 사부작사부작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다. '처음'에게 평양냉면의 은은함으로 다가가자. 처음이란 누구나 서툴고, 두렵고, 설레며, 스며들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일 테니.


ⓒ 2021. 토희 all rights reserved.

 


[임신 6~7주 차]

몸과 마음이 여러 변화에 적응하는 시기이다. 프로게스테론의 급변으로 피부 트러블이 나기도 하고, 심한 변비, 두통, 입덧과 속 쓰림, 감정 기복 등 다양한 임신 증상이 나타난다. 산과에서 처방받은 대로 최대한 행동하며, 물을 많이 섭취한다. 자신의 컨디션을 수시로 관찰하여 일상의 리듬을 적절하게 유지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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