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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희 Mar 22. 2024

애기 낳으면 뭐가 좋아?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던 아이를 기르며 경험하는 신기함이 있다. 그건 바로 사람 간에 느끼는 생생함. 굳이 단어로 하자면 사랑인데 자기애라고 해야 할까, 인류애라고 해야 할까.


우리 엄마 아빠는 애 가지라는 은은한 잔소리를 할 적에 왜 그걸 빼놓고 연설하셨을까? 그 이야기로 날 꼬셨더라면 내가 적어도 5년이나 당신들의 이야기를 귓등으로도 콧등으로도 안 듣는 일은 없었을 것 같기도(아 아니다... 그래도 난). 아니나 다를까, 먼저 애를 낳은 사람들을 보자니 분명 뭔가 달라진 게 있어도 크게 한 방 있는 것은 같았다.


나는 결혼 전과 후에도 2세에 관심이 없었다. 우리 부부의 자유로운 삶에 더할 나위 없는 사람이었거니와 감각 기관이 예민한 나에게 아이들의 우는(징징대는) 소리는 영 내 삶에 그려지지 않는 판타지 같은 거였다. 굳이 왜?


어느 날 남편이 우리에게도 아이가 있기를 원한다 하여(그것도 내 마음을 지켜보다 결혼 5년 차쯤에) 1년간의 셀프 문답 끝에 하기로 한 것이 2세를 낳고 길러보자는 것이었다. 철회가 불가능한 그 선택의 고민은 훗날 스스로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라는 결론이 날 때까지 징그럽게도 해보았다. 나도 나지만 무엇보다 태어날 그 아이를 위해서였다.


임신 과정을 지켜보는 건 생각보다 재밌다. 특히 지나가다 마주치는 할머니들이 내 남산만 한 배를 보며 하시는 한마디는 같은 길을 먼저 걸어본 여자로서의 응원 같아 꽤나 즐겁고 행복했다. 그렇게 30대 중반에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그 외롭고 기쁘고 짜증 나고 감사하고 돌아버릴 것 같다가도 눈물겹게 사랑스러운 육아의 길을 통과하면서 '애를 낳으면 대체 뭐가 달라지는지' 몸소 맛볼 수 있었다.


슬프지만 별로 달갑지 않은 변화는 이렇다.

이리 돌려보고 저리 돌려봐도 칙칙해진 피부톤. 헐거워진 뱃가죽의 탄력도. 무엇보다 가장 극적인 건 언제든 누워서 티비보는 한갓짐이다. 두 돌을 앞두고 있는 우리 집 아기에게 이것을 허락받기란 여간 녹록지가 않다. (잠들면 가능)


육아의 본질로 인해 얻은 것들도 있다.

소통이 거의 불가능한 상대(애기)를 돌보는 극고의 노력으로, 본의 아니게 커진 타인에 대한 이해심이다. 어디 가서 그 능력 키우려면 더럽게 고생깨나 해야 가능할 것 같은데 내 애 보면서 생겨난 것이니 이래저래 감사하다.


빽빽 우는 아기와 한시도 떨어져 있을 수 없는 시기에는 혼이 쏙 빠져 그럴 여유가 없지만, 아이와 물리적으로 떨어짐이 가능한 시절(지난주부터 어린이집에 다닌다)이 오면 문득문득 사랑이란 것을 바라볼 기회가 생긴다. 굳이 의도한 게 아닌데 어쩌면 저절로 그리 된다.


나는 살면서 사랑이란 뭘까에 대한 정의를 끝까지 내려본 적이 없다.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는 마음에 대해서도 십분 이해가 되지 않고 나 역시 그들에 대한 감정이 피차일반인지라 이 부분은 늘 미적지근하게 탐구하다 마무리가 된다. 이성과의 사랑은 어떨까. 마음 한 구석에 결핍이 있던 나에게 그건 의지에 가까웠다. 내가 모든 패를 까도 믿을 만큼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이어야만 나눠지는 감정이 사랑이었다.(다음 생에는 짝사랑도 실컷 해보리라!)


내가 아는 사랑은 그 정도다. 수준이 좀 미흡한 것 같다. 이 미흡함에 대해 남편에게 이야기를 나누면 그는 "사랑에 대해 너무 과대평가하는 거 아니야? 네가 하고 있는 그게 그냥 사랑이 아닌 이유는 뭐야?"라고 말한다. 머리를 환기시켜 주는 고마운 그의 일면.


이런 내가 자식을 통해 알게 된 사랑은 아이를 낳고 달라진 여러 변화들 중 가장 색다르다.


이색적으로 느끼는 부분 첫 번째. 아이를 향한 뜨거운 이 마음에 도리어 내가 감동을 받는다는 것이다. '나 좀 괜찮은 사람 같아' 하는 것과도 결이 비슷하다. 자식이니 뭐니 해도 인간이란 역시 자기 자신이 일 번이구나 싶어 그게 약간 부끄럽기도 하지만 인정하면 재밌다.


두 번째. 그렇긴 해도 아이에 대한 마음은 크기에 있어 압도적이다. 그 순간만큼은 '모자람 없이 완전하다'는 게 이런 걸 의미하나 싶다. 밀도 있는 마음이 이 안에 꽉 차있는데 그게 또다시 나를 꽉 차게 한다. 감정주머니의 부피가 어느 정도인지는 몰라도 지금의 주머니가 한 치의 부족함도 없이 완전하구나, 확신할 수가 있다. 살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이렇게 굳은 믿음을 보인적이 있었나.


이 모든 걸 알아차리는 순간 내 세계가 불현듯 환해진다. 그 사랑을 받을 아이도 그럴 거라고 여기고 있는데 그럴 때면 마음이 뜨겁고 촉촉해진다. 눈이 뒤집힐 만큼 힘들긴 해도, 가끔은 다 때려치우고 도망치고 싶긴 해도,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경험은 인간에게 있어 사랑이란 게 뭔지 확연히 배울 수 있는 대체 불가의 선택지 같다. 타인을 사랑하는 나 자신을 사랑하게 되고 그게 또다시 타인을 사랑하게 되는 것. 어떤 게 먼저랄 게 없어지는 눈 부신 경험.


지나가는 어른들이 수도 없이 말씀하셨지만 그저 '말'로만 들렸던, 아이를 낳고 키우는 행복이라는 것에 대해 배워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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