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좋고 싫은 감정의 노예였다

스트레스 안 받고도 할 수 있는 길

by 토희

"어떻게 결혼은 했네?"

겹겹으로 씌워진 나에 대한 착각을 벗기며 드는 생각이었다. 나 잘났다고 오만방자하게 떠들던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지금 곁에 남아 준 사람들에게 부끄럽고 미안하며, 고맙고 또 다행이었다. 어떤 면은 인간다운 괜찮은 모습에 새삼스럽기도 했다. 주변인을 진심으로 대하려는 성향이 그랬다. 나뿐 아니라 세상 모든 사물을 '괜찮다/별로다' 일언지하로 절대화할 수는 없으니 그저 상황 따라 취했던 내 행실을 되돌아봤을 때 드는 생각이었다.


덧붙여서 수행이란 나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핵심이지 잘못을 솎아 내서 채찍질하려는 건 아니다. 나는 무결점 인간이나 착한 사람이 목표가 아니라 자유롭고 행복한 사람이 되고자 수행을 한다. 그렇지만 3n년간 살아오던 습관이 어디 그리 쉽게 빠지랴. 가끔은 완벽할 수 없다는 진실을 새까맣게 잊고는 결점을 없애겠다며, 착한 척을 하겠다며 까불다 마동석 같은 강력한 '알아차림'에게 원투 펀치를 맞기도 한다. "정신 차려 이 친구야." 이런 과정까지가 전부 어떤 내 모습일지라도 그대로 알아차리는 연습이고, 비로소 내 마음과 친해져 가는 수행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성향을 낱낱이 지켜 보아하니 나는 좋고 싫은 마음에 집착하고 그 감정 앞에서 참 나약하더라는 거다. 좋고 싫음에는 네 가지 조합이 있다는 걸 당신은 알고 있는가? 한번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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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이 중 어떤 것에 주로 걸려 넘어지는가? 나는 무려 이 네 가지 모두에 집착했던 것 같다. 윗 칸의 두 가지는 혹여 집착한다 해도 큰 걸림돌은 아니다. 우리의 영원한 숙제는 아랫 칸 두 가지일 것이다. 만물의 영장이란 인간은 밑에 두 가지에 헐떡 대느라 짐승보다 불행하게 산다 해도 할 말이 없을 지경이다.




일로 만난 사람 중에 내가 불호하는 스타일의 남자 상사가 있었다. 그분은 첫 만남부터 무척이나 상냥했지만 왠지 좀 과했다. 점심시간에 밖에 나가 식사를 할 때면 그는 회장님을 의전하는 경호원으로 변신했다. 전방 5m 지점에 출입문이라도 보일라치면 그는 영락없이 잰걸음으로 튀어 나가 문을 붙잡아 줬다. 흡족한 표정을 띄며 문에서 기다리는 그를 나는 한동안 어떻게 대해야 좋을지 몰랐다. 편하게 걷고 싶을 때도 받고만 있기 곤란해서 후다닥 뒤를 따랐다. 장모님은 한사코 거부하는데 그래도 큰 절 받으셔야 한다며 일방적으로 들이미는 사위 같았다. 고맙긴 하지만 주섬주섬 옷 걸치고 맞절하는 불편한 분위기, 대충 그런 느낌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자신은 세상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그의 '눈치 없음'이었다. 바로 이런 나의 생각이 ‘싫은데 해야 하는 미쳐버림’의 초석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이후로 내 마음에 거슬리는 그의 모습은 쏙쏙 보이기 시작했다. 유독 말이 많은 그의 특징이 실력보다는 번지르르한 말로 비벼가며 일하는 걸로 보였고, 카페테리아에 가면 상주하고 있는 모습도 꼴 뵈기가 싫었다. 본인 명의의 집이 어떻고, 와이프 수입이 어떻다는 얘기도 재산 자랑과 가족 자랑으로 밖에 들리지 않는 것은 말해 무엇하겠나. 이런 마음을 품고 있으니 그에게 진심의 미소가 나올 리 만무했다. 이건 어떻게 보면 가식으로 사람을 대하지 못하는 거고, 어찌 보면 사회생활 능력치가 쪼랩이라 할 수 있다.


무언가를 보고 좋고 싫어하는 마음이야 인간이라면 생기는 당연지사다. 나의 경우 귀여운 강아지를 보면 자동으로 물개 박수가 나오고, 강아지가 싼 똥을 밟으면 꽥 소리가 튀어나온다. 그리고 이어지는 다음 단계는 좋다 하는 감정이 만지고 싶다는 갈망으로, 싫다 하는 감정이 피하고 싶다는 혐오로 돌아가는 게 우리의 심리 공정 시스템이다. 나는 주로 좋다 - 싫다의 다음 스텝인 하고 싶다 - 하기 싫다에 이르렀고, 그 마음에 속수무책으로 나자빠지는 편이었다. 그러니 그 상사를 보면 떠오르는 좋아하지 않는 마음이 '같이 커피 마시기 싫다', '퇴근길 지하철 같이 타기 싫다'에서 그 사람 때문에 '회사 가기 싫다'로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어느 날 전사 워크숍을 가는 버스 차량에 그 분과 내가 나란히 앉게 됐다. 하도 싫은 마음이 가득하니 평소 티가 나도 진작 났을 거라 생각했고, 혹 그가 그것을 눈치챘다 하더라도 난 기꺼이 그 과보를 감수하겠다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마음은 이러해도 아예 망나니는 아니었던지라, 어쨌든 상사이자 동료인 그 분과 아이스 브레이킹 정도의 대화를 이어나가려 늘 노력했다. 떨떠름한 기류 속에 좋아하던 초코 송이도 잘 안 넘어갔다. 그 후 나는 웬만하면 둘만 있는 자리를 만들지 않으려 애썼다. 이건 회사생활에 아주 큰 지장을 주는 요소는 아니었지만, 간혹 함께 일하면서 그가 납득이 되지 않는 발언을 할 때면 별 수 없이 스트레스가 차곡차곡 쌓였다. 그를 싫어하는 내 마음에 나는 무기력하게 끌려 다녔고 그와 함께 하는 회사는 나에게 점점 칙칙한 공간이 되어갔다.


좋고 싫음에 집착하는 습성에는 어떤 특징이 있을까? 첫째로,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는 상대적으로 감정에 자유로운 사람보다 불리한 상황이 많다. 행동에서 표가 난다면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렵고, 리더라면 주변에 따르는 사람이 적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어떤 사람에게는 욕도 먹고, 또 반대로 어떤 사람들과는 굉장히 깊은 관계를 유지하기도 한다. 둘째는 감정에 집착하다 보니 자신의 감정 소모가 지나치게 크고, 정신뿐 아니라 신체 건강에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다. 셋째로, 좋고 싫은 감정에 휘둘려 버린 행동은 이미 갖고 있는 습관을 더 굳어지게 하는 힘이 있다. 내가 아무개 상사에게 그랬던 것처럼 싫어하는 감정이 과해지면 피하고 싶은 행동으로 나도 모르게 표출되고, 그 행동은 또다시 그를 싫어하는 내 관성에 힘을 더한다. 그 안에서 도는 악순환의 고리인 거다. 부정적인 관성에 기름을 쫄쫄 붓는 셈이다.


그럼 이번에는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김 아무개 상사가 아무리 싫어도 기필코 웃으며 맞춰보자!' 각오하기. '또래 동료들과 밥 먹는 게 아무리 편하고 좋아도 아무개 상사 모시고 밥 먹자'며 굳게 결심하기. 내 마음과는 다른 모양 안에 억지로 나를 끼워 맞추고 참는 거다. 이건 빠짝 효험이 나타날 수는 있다. 하지만 참는 것은 스트레스가 누적되어 결국 폭발하거나 좌절할 가능성이 크다. 극단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역시 내가 이렇지 뭐." 혹은 "됐어!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때려치워."




그래서 나는 좋다 싫다 하는 감정이 일어나는 찰나에 단박에 내 마음을 자각한다. '지금 그를 싫어하는 마음 일어나는구나.' 미치도록 참는 것도 아니고, 이번 사건만 덮자며 줄행랑치는 것도 아닌 길로 올라선다. 그를 싫어하는 마음의 소리를 그대로 인정한다. 지켜만 볼 뿐이다. 개똥 밟으면 꽥하는 마음이 나듯이, 마음은 자동으로 일어나는 현상이기에 일어나는 걸 내버려 두고 감정 놀음에 놀아날지 말지는 내가 선택하는 거다. 그러면 대체로 안정된 마음 상태에서 지낼 수 있다. 이 방법을 놓치고 감정에 집착하는 날에는 그때처럼 '저 사람 싫어 죽겠다. 싫어서 팔짝 뛰겠다.' 마음이 요동을 칠 거다.


이런 것 다 필요 없이 아무개 상사가 싫으면 적당히 티 나도록 두면서 그에 따른 대가를 감당하는 길도 있다는 걸 안다. 그리고 인사팀에게 요청해 그 사람이 없는 다른 팀으로 가는 방법도 어쩌면 하나의 좋은 선택지다. 선택에는 정답이 없고 누가 뭐라 해도 본인 인생은 본인 것이니. 그러나 이런 것들은 내가 원하는 '괴로움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었다. 좋고 싫음에 얽매이는 나와 영원히 한 몸으로 붙어사는 한, 비슷한 문제에 언제고 부딪칠 수 있음을 숱하게 경험했고 나는 그런 일시적 행복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행복을 원한다.


아무리 마음을 바라만 본다고 해도 처음은 익숙하지 않다. 욱하는 마음이 날 때 짜증을 내고 싶은 나를 한 템포 멈추는 절제와 인내가 조금 필요한 게 맞다. 어떤 하루는 고통 속에 꾹 참는 것이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이나 별 차이가 없어 의문스러울지도 모른다. 어떤 날은 좋고 싫음에 신나게 끌려다니다가 마음이 지쳐서야 정신을 차리기도 하고, 때로는 그냥 빽 표출한 뒤에 후회하는 경우도 있다.


그건 좋고 싫음에서 자유로워지는 과정 중에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생각한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면 단언컨대, 지난주 느낌과 지난달 느낌이 다르고 100일 전 느낌과 200일 전의 느낌이 달라서다. 이 변화가 모든 저항감을 받아들이게 하는 대체 불가한 이유이자 동력이다. 관성대로 하지 않으니 내 안에 반발감이 따라오는 게 당연하다. 그래도 그 사실을 잠시 잊을 때면, 좋고 싫음의 노예로 당장 편하게 살고 싶을 때면 나는 마음 깊이 새긴 스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또다시 연습한다.


"안 되는 것 같아도 점점 되어가는 중이에요."


‘싫은데 해야하는 것’에 구애받지 않는 나를 상상해 본다. 생각만 해도 멋지다. 이 세상 무서운 게 뭐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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