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각 속의 나 말고

엉뚱하게 알고 있으면 괴로워

by 토희

망망대해를 허우적 대던 과거의 나에게 나는 단호하게 악수를 청했다. "우리 여기까지만 하자."

지금 이 시간부터는 너를 떠나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 거라고 얘기해줬다. 어떻게 그럴 거냐고 묻는 과거에게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내 마음을 더 이상 회피하지 않는다면 스스로 행복을 꾸려나가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를 위한 방법 중 하나로 나는 수행을 택했다. 수행은 행복에 닿기 위해 그간 해 본 어떤 방법들보다도 군더더기 없는 정공법이자 지름길이었다. 얼핏 보면 막연하고 돌아서 가는 방법 같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럼 방황하던 시절의 나는 행복을 소홀히 했느냐? 무기력했느냐? 아니, 오히려 최선을 다해 행복을 쫓아다녔다고 말할 수 있는 사례가 나에게는 즐비하다.


몸 쓰는 걸 사랑해서 배드민턴이란 운동에 3년간 심취했었다. 일주일에 6일을 클럽에서 뛰었고 초심 레벨이지만 대회에서 입상하는 설렘은 짜릿했다. 출근 전 새벽 6시에 남편과 수영을 배울 때는 신났고, 퇴근하고 노을 밑에서 운동하는 테니스는 상쾌하기도 했다. 1시간 반인 점심시간을 활용해 동료와 필라테스를 하고 나면 하루가 뿌듯했다. 가장 좋아하는 음악 장르인 힙합을 비롯해 재즈, 팝, 보사노바는 내 멜론 플레이 리스트에서 열일을 했다. 퇴근 후 "오늘 끝나고 한잔?" 친목의 분위기는 하루의 고단함을 녹였다. 나는 누구보다 행복에 진심인 사람이었다.


이렇게 여러 방법에 부단히 녹아들었지만 내 마음은 정작 작은 경계에라도 닿을라치면 피죽도 못 얻어먹은 사람마냥 픽 스러졌다.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할 때면 힘이 들어 괴로웠다. 그런데 아무리 행복에 서툰 문외한일지라도 하나는 알 것 같았다. 행복이란 건 내 안에서 일어난다는 걸. 그래서 삶이 힘에 부칠 때, '내 마음을 정면 돌파하는' 것이 정공법인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먼 데서 찾지 않고 등잔 밑을 보는 것이다. 쉬워 보이는 말이지만 우리는 눈 앞의 문제를 직면하기 두려워하면서 행복을 놓치곤 한다. 그러므로 더 이상 밖을 두리번거리지 않고 내 마음을 그대로 바라보는 연습 즉 수행을 한다. 어떤 착각이나 편견 없이 말이다.




퇴사하고 홀로 서기를 한다면 예전부터 흥미로웠던 BI(브랜딩) 영역을 해보고 싶었다. 회사를 다닐 때는 주로 UI 디자인이라는 결이 다른 작업을 했었기에 새로운 도전이었다. 예상했던 것 처럼 회사라는 울타리의 밖은 부드럽지 않았고 그 분야는 특히 더 많은 디자이너와 경쟁해야 했다. 한 프로젝트당 최소 열 팀 이상의 경쟁은 기본이었다.


어느 날 일주일에 걸친 브랜딩 디자인 작업이 있었다. 있는 것 없는 것 쏟아부어 완성한 시안을 떨리는 마음으로 던졌다. 두구두구. 결과는? 내 것이 선택받지 못했다.


클라이언트의 의도와 부합했고 아이디어도 나름대로 괜찮았다 생각해서 나는 기대를 크게 한 모양이었다. 결과를 알고는 속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작업에 어물쩍 착수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체 콘셉트를 꼼꼼히 계획하고 시뮬레이션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공수를 들여 받은 점수였다. 그러니 더 낙담할 수밖에. 이럴 때면 여러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인다. 그 캄캄함 중에서도 가장 도망치고 싶은 두려움은 내 역량에 대한 '불신'이다. '나 안되려나? 나 헛시간 쓰고 있는 건가?' 나보다 뛰어난 사람에게 모든 걸 떠넘겨 버리고 싶은 나약함이 휙휙 들락거리면서도, 내 성에 꽉 차게 잘 해내고 싶은 양가감정에 혼이 쏙 빠진다.




'불쾌'한 느낌의 불길은 이 상황이 '싫다'라는 감정에 빠르게 옮겨 붙고, ‘싫음'은 이윽고 '두려움'이라는 큰 불이 되어 마음 곳곳에 번진다. 부정적 감정은 이렇게 우리를 순식간에 사로잡는다. 과거의 방황하던 나는 사로잡힌 감정이 진짜라고 믿었다. 진짜라 믿었기에 사로잡혔을 거다.


과거에게 작별을 고한 지금의 나는 사로잡힌 마음을 용기내서 바라본다. 모호하게 괴로워하지 않고 마음을 한번 해부해 본다. 으악! 그 마음 안에서 나는 프로젝트에 선택받지 못한 나를 진짜 나라고 낙인하고 스스로를 주저 앉히고 있었다. 너무도 불쌍한 나. 가장 내편인 나에게 혼나고 있다. 그러니 두렵고 무섭지 않고서야 별 수가 있을까.


현재 일어난 일을 사실 그대로 보면 어떨까? 이 과정이 쉽진 않지만 이미 일어나 버린 일이기에 사실을 사실대로 보는 게 나에게 이득이다. 좀 더 들여다보면 나는 역시 '헛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선택되지 않은 나는 어제의 나일뿐인데 순간적으로 그게 나라고 믿고 있다. 그게 다시 도전하고 싶은 지금의 나는 아닌데도 말이다.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의 나를 현재의 시점까지 연속시키는 건 하나의 내 착각이다.


그러니까 해봤는데도 안됐으니 또 한다고 될 리가 있겠냐는 의심은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인 것이다. 감은 눈을 뜨고 보면 어제 한 프로젝트가 탈락한 것뿐, 아무런 문제가 없고 '내가 또 한다고 될까?'라고 사로잡혀야 할 근거가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작업물에 실패를 맛봤으니 경험치가 쌓였다면 그게 더 진실에 가깝다. 그러니 하고 싶으면 또 도전하고, 안 하고 싶거나 그만둬야 할 상황이라면 그만 두면 될 일인데 이런 것을 모르고 착각에 휩싸일 때는 괴로운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이건 비단 경쟁의 문제에만 적용되진 않을 터.




이런 연습을 이어가다 보면 새로운 나를 만난다. 착각을 조금은 벗을 수 있는 눈으로 바라보니 몰랐던 (혹은 타인은 알았는데 나만 몰랐던) 내가 보인다. 되고 싶은 내가 아닌 허상을 벗겨낸 내 모습을 접한다. 마더 테레사인 줄 알고 살았지만 현실에는 나눔에 서툰 내가 있다. 무언가 특별한 영혼인 줄 알았지만 그저 한 사람인 내가 서있고, 까칠한 쏘가리인 줄 알았지만 담담한 연어 같은 나를 본다. 그렇게 떠오르는 나의 민낯을 면면히 바라본다. 양파처럼 까도 까도 나오는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에 그 끝이 어디일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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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말한 대로 몸 움직이는 것을 좋아해서 그 순간에는 비교적 행복하다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에는 두 가지 개성이 있었다. 하나는 '일시적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행복보다는 즐거움에 가깝다.' 운동이나 음악 같은 건 하수고, 수행은 고고한 길이라는 이분법적 이야기가 아니다. 어떤 대상을 즐거움 자체로 보지 못하고 행복을 찾는 수단으로 접근하니 근본적인 해결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만일 마음에 괴로움이 있는 상태라면 암만 행복을 두리번 거려 봐야 진정한 안식을 느낄 수 없음을 배워 간다. 맑아진 마음으로 좋아하는 것들을 한다면 전보다 더욱 흠뻑 즐거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는 그 많은 것들이 있어도, 없어도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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