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것을 소중하게
당신을 잘 아는 사람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친구? 애인? 배우자? 직장동료? 혹시 부모님과 형제자매들은 어떤지.
나는 우리 집의 큰 딸이다. 6살 차이 나는 똑똑하고 예쁜 여동생과 자랐다. 우리는 결코 조용한 가족은 아닌데 오순도순한 분위기의 말보다는 주로 본인에게 필요한 대화가 오갔던 관계였지 싶다. 모든 게 상대적이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가족 간 대화의 양과 질이라는 기준에서 보자면 그렇다. 특히나 부모님과 그랬다. 나의 10대를 떠올리면 나밖에 모르는 고집 센 여자아이의 모습이 단번에 그려진다.
엄마는 갓 사회에 나온 20대 초반, 당시 아빠의 꽃미남 얼굴 하나에 뿅 가서 지금 살짝 후회를 하고 계신다. (하하) 두 분은 그 해에 결혼을 하시고 다음 해에 나를 낳으셨다고 한다. 그러니 엄마는 꽤 어린 나이에 나를 낳으신 거다. 엄마가 젊으니 나를 낳아주고 길러주신 어머니의 개념이 아니라 '친구' 같은 엄마였다. 지금 바라본 10대의 나는 애늙은이 같은 구석이 있어서 당시 엄마랑 정말 말이 안 통한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엄청난 추진력과 털털함의 N극인 엄마와 예민과 섬세를 오가는 S극의 나는 늘 전쟁이었다. 우리 전쟁의 주제는 언제나 나의 '학업'이었고. 지금 돌이키면 엄마보다 내가 모든 면에서 낫다고 생각한 것 같다. 애는 애였다.
그렇긴 해도 어버이날과 엄마 아빠의 생신, 크리스마스. 이 3대 기념일에는 빼먹지 않고 손수 만든 카드 위에 글자를 적었다. 그 글 뒤에 숨어 매해 거기서 거기인 멘트(나름대로는 엄마 아빠의 눈물을 쏙 빼놓고야 말리라는 야심 찬 감동 멘트)를 꾹꾹 눌러 담아 행복을 선물하고 싶어 하는 딸이기도 했다. 얼마 전에 엄마로부터 사진 몇 장이 전송되어 왔다. 내가 어릴 때부터 성인이 되어서까지 당신께 만들어 드렸던 카드를 하나씩 찍어 보관한 사진이다. '우리 엄마에게도 이런 면이 있구나.' 새삼스러웠다. 덧붙여 내가 아는 엄마다운 솔직한 한마디도 함께 왔다.
'이번 생일에도 이런 거 받고 싶어.'
나는 우리 아빠 딸인 게 분명하다. 눈썹, 눈, 코, 입술, 얼굴형, 모질. 외모만으로 이미 김씨로 대동단결인데 결정적인 건 성격이다. 아빠가 다루시는 악기는 통기타, 색소폰, 드럼이다. 가끔 아빠가 툭 던지시는 여리여리한 문자 메시지에 잠시 세상이 일시 정지되는 듯하다. 내 감수성의 최소 8할은 아빠 쪽이라는 걸 우리 가족 모두는 인정한다. 그런 딸바보 아빠지만 내가 한참 말 안 듣던 시절 아빠와는 특별히 대화를 나눈 기억이 없다. 엄마한테 대드는 나를 보다 못한 아빠가 굵직한 몸의 대화를 두어 번 시도하긴 했어도.
이렇게 우리 가족은 나의 10대 시절 그리고 지나온 20대에도 차분히 앉아서 서로의 마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딱히 없다. '내 마음은 이렇고, 나는 이런 삶을 살고 싶어. 이런 건 좋아하고, 이런 건 싫어해.' 같은 거. 너무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인가?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인가? 그렇다 해도 좋다. 나는 이런 감수성의 사람이다. 주변 사람들과 이런 잔잔한 대화를 즐겨 나눈다. 하지만 가족과의 현실은 희한하다. 부모님 앞에서는 왠지 무뚝뚝해진다는 거다. 내가 하고 싶은 표현, 평소 남편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하던 표현의 절반 정도도 안 하는 것 같다. 아마도 어릴 때 주고받던 소통의 방법들이 잔재하는 이유가 아닐까? 추측한다.
그래서인지 가족들과 SNS 계정을 공유하는 건 왠지 쑥스럽다. 내가 밖에서 뭐하고 다니고 가족들 외에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대하는지, 요즘 무슨 생각을 하는지. 부모님이 아시면 왠지 어색하다고 생각했다. 쓸 데 없는 걱정을 만들어 드릴 것 같다는 판단을 내려버리기도 했다. 그렇게 살던 대로 살아도 특별한 문제는 없었다. 밥 먹고 살 부대끼며 평범히 때로는 안 평범히, 그렇게 어쩌면 가장 평범한 가족의 모습으로 사는 거니까.
이후 나는 결혼과 함께 출가를 했고 우리 가족은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주어진 각자의 몫을 다 하며 살고 있다. 그렇지만 언제나 내 마음속 한 귀 탱이에는 마시멜로처럼 보드라운 꿈같은 게 있다. 친구와 남편이 아는 가장 거리낌 없는 나의 모습, 내가 아는 가장 나 다운 모습으로, 물보다 진한 피가 섞인 가족들과 허물없이 소통하는 그런 것. ‘에헤이. 이제 와서 무슨, 엄마 아빠가 아는 캐릭터로 대충 지내.’ 마음속에 그리는 것만큼 살갑게 다가가지 않는 것을 마치 내가 안 하는 냥 저 아래 묵혀뒀지만 실은 못하고 있는 것임을, 나를 있는 그대로 살펴보면서 인정한다.
수행을 통해 나 스스로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가고, 내 마음을 보다 여실히 느껴가면서 마음의 방황으로 소실되던 에너지가 제법 줄었다. 좁은 구멍으로 세상을 바라봤던 눈이 조금은 트임을 느낀다. 그리고 30대, 이제는 애도 아니지 않나. 가족들에게 뭘 그리 망설였나 싶은 마음이 불쑥 들었다. 그 마음을 찬찬히 들여다보니 좀 부끄럽고 쑥스럽지만 그래도 내 모습 그대로로 부모님과 지내고 싶어 한다. 그렇다면 내가 가장 다정하게 대해야 할 사람은 경비 아저씨도 아니고, 택배 기사님도 아닌 우리 부모님, 내 가족이다.
나는 SNS에 기록했던 내 감정을 담은 글을 가족들에게 공유해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나를 편안하게 전하는 첫 스타트로 말보다는 글이 좋을 것 같았다. 글의 내용인즉슨, 우리 부부가 강아지 입양을 한 마음, 유기견 봉사를 하게 되기까지의 감정, 유기된 강아지들을 도우면서 어떤 생각이 드는지, 나는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와 같은 이야기였다. 부모님이 알지 못할 거라 생각한 나를 전해보고 싶었다.
이 생각의 출발과 과정이 어쩌면 오글거리고 낯 간지럽기도 하다. 하지만 과거의 관성을 깨뜨리고 나는 지금의 나로서 가족들과 소통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글을 공유하며 넌지시 설명했다.
"우리는 어쩌면 서로에 대해 생각보다 잘 모를 것 같아. 그래서 내가 먼저 이렇게 해보려고."
한참 리액션이 없다. 역시 우리 가족은 맡은 바 역할에 충실한 대한민국 국민이다. 이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있나. "다들 바쁜가벼?" 상상했던 포슬포슬한 분위기와는 달리 결국 내가 먼저 운을 띄운다. 엄마는 나에게 "일이 바빴어. 항상 보면 큰 딸이 마음이 여려." 아빠는 "아까 글을 읽고 여러 감정이 들어서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기특해." 라고 하신다. 동생은 평소 나와 대화를 많이 해서인지 언니의 마음을 공감해주는 아주 긴 응답을 보내줬다.
누군가는 가족과 이미 충분히 소통하는 삶을 살고 있고, 인생의 고민을 가족과 풀어나가는 사람도 있을 거다. 우리는 그런 것과는 좀 달랐고 그래서 글을 공유한 그 날을 더욱 잊을 수가 없다. 그러고 나니 세상이 환해지는 기분이었다. 오후의 햇살을 머금은 눈시울이 촉촉했다. '아, 나는 가족들과 이렇게 살고 싶었던 거구나.' 막연하게 꿈꾸던 걸 해보니 제대로 알게 됐다. 나에게 가족은 행복이라는 퍼즐의 커다란 한 조각이었던 것을.
지난날, 나조차 힘에 부치는 나를 돌보느라 가족을 들여다보지 못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이제라도 손을 내밀 수 있어 다행이고 감사했다. 요즘은 이전과 달리 잔잔하고 소소한 이야기들을 많이 주고받는다. '진짜 고민' 같은 것은 오히려 서로에게 걱정을 끼칠까 내놓지 못하지만 우리는 꽤나 달달해졌다. 내 이야기보다는 부모님 이야기를 많이 들어 드리고 싶다.
친정에 갔다가 헤어질 때면 엄마 아빠를 꼭 안아드리려고 한다. 생각으론 수십 번도 더 하고 싶지만 겨우 한 번 나가는 수준이다. 그렇지만 하고 또 해본다. 늘 하던 대로, 되는 대로 살고 싶진 않다. 부모님 머리는 희끗해질 테고 나 역시 인생을 딱 한 번만 살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