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탱탱한 피부를 원해

욕구 눈덩이의 법칙

by 토희

살이 빠진 것 같았다. 요즘 요가를 좀 정성껏 하긴 했어도 특별히 달라진 생활 패턴이 없는데 복부에 이쁘게 퍼져있던 기름이 걷어진 느낌이었다. 혹시나 하고 체중계에 올라가 보니 이건 무슨 중학생 때나 보던 숫자다. 체중계가 고장 났나? 싶어서 강아지를 안고 저울에 올라간 값에 강아지 몸무게를 뺄셈 해봐도 비슷한 숫자가 나온다. 위치를 달리 놓고 재봐도 같은 숫자다. 살이 빠진 거다.


그런데 문제는 살이 아니었다. 그로 인한 피부였다. 올해 들어 눈 주변과 입 주변에 자리 잡은 다양한 깊이의 협곡들이 그래서 였던 걸까? 살이 빠지니 피부가 멜팅 치즈처럼 흘러내리는 기분이었다. 거울 속 스마일 표정을 지은 내 얼굴을 보고 끔쩍 놀란다.


'나도 늙는구나...!'


게다가 처음에는 눈 가 잔주름의 원인이 겨울철 건조 증상인 줄 알고 평소보다 수분크림을 꼼꼼히 바르고 잤다. 보통은 소홀했던 스킨케어를 며칠 잘해주면 피부 컨디션이 돌아왔다. 그런데 협곡들은 얼마가 지나도 건재한 존재감을 과시했다. 일시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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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어든 체중이니, 계절이니, 핑계가 다 떨어졌을 때 나는 가장 큰 원인을 바로 보았는데 그건 몸의 연식이었다. 현재 스코어는 30대 중반. 재작년까지는 '늙네' 하는 느낌을 짚어낸 기억이 없다. 그러던 작년 가을쯤부터 거울 속 내가 왠지 낯설게 느껴지긴 했다. 유튜브 속 피부과 의사들은 이런 이야기를 한다. "여자 피부에는 변곡점이 있는데 27~8세 정도 꼭짓점을 찍다가 점차 하강합니다." 조금 늦출 수는 있어도 피부 탄력이 떨어지는 일만 남았다는 거다.


세월이 흐른다는 걸 여러 상황에서 느낄 수 있겠지만 '몸'으로 체감하는 건 좀 어색했다. 요가를 해서 인지 신체가 살아온 어느 때보다 가볍고, 수행 덕분인지 정신도 비교적 맑다. 그러나 변화한 내 얼굴을 보면서는 시간의 변화를 미처 몰랐다는 듯이 생경했고, 그 주름이 마치 무지개 같았다. 보이지만 않을 뿐이지 공기 중에 떠 있는 수많은 물방울이 빛과 닿아 우리 눈에 떡 나타나는 무지개처럼 나는 누구나 늙는다는 당연한 관념을 주름을 통해서 실제 눈으로 마주했다.



'서글프다.' 예전에 티비에서 희끗한 머리카락의 여성이 이 단어를 사용한 기억이 있다. 늙음에 대한 이야기를 펴시다가 대화의 끝에는 서글프다는 표현으로 마무리를 지으셨다. 무언가에 서운하고 섭섭한 것이야 워낙 내 작은 마음 덕에 잘 알고 있지만 서글프다는 건 문득 멈춰 나를 상상하게 만들었다. 서글프다. 서글픔은 아쉽고 애처로우며 어딘가 쓸쓸하지만 그래도 '수용하는' 느낌이다. 양손의 약지로 흐물흐물해진 입가를 더듬어가던 거울 속의 나는 이제야 그 표현을 이해했다.


서글퍼진 마음을 위로하는 방법이 몇 가지 떠올랐다. 거울을 아싸리 안 보고 사는 것. 병원에서 적당히 안티에이징 시술을 받는 것. 아니면 편안한 마음으로 생로병사의 진실을 받아들이는 것. 마지막 방법이 잘 되기만 한다면야 평생 피부 때문에 마음이 어쩌구 저쩌구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엄청난 만능열쇠가 되겠다.


그러나 나는 아직 피부가 좋고 싶었다. 늙는 것을 가만히 방치하기에 내 마음은 아직 서글플 준비가 안됐다. 아무래도 생로병사의 진실을 살짝 늦춰보는 방법이 현재 나에게 잘 맞았다. 피부과에서 피부 재생력을 높여 준다는 관리를 예약하기로 했다. 관리를 받는다고 해서 주름이 옅어질 것인지는 미지수고 아마 그러지 않을 확률이 훨씬 높겠다. 일시적으로 탄력 있게 보일 수는 있겠지만 영원할 수는 없다.



물욕 눈덩이의 법칙을 아는가? 옷장을 아무리 봐도 봄에 입을 상의가 하나 없는 거다. 고민 끝에 마음에 쏙 드는 것으로 한 점 장만했다면? 이게 웬일인지 거기에 맞는 바지가 없다. 어찌어찌 바지에 구색을 맞추고 보니 이번엔 가방이다. 눈 뜨고는 못봐주게 후줄근해 보이는 가방, 액세서리, 신발... 굴러가는 눈덩이가 순식간에 커다래지듯이 물욕은 물욕을 불러일으키고, 그 욕구에 눈멀어 정신 못 차리면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운다. 욕구란 초장에 확실히 기선제압을 하지 않으면 되치기 당할 확률이 높다.


피부과 전화번호를 누르는 내 손길은 지독하게 젊음을 붙잡아 보겠다는 심산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생명의 순리인 노화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것도 아니다. 다만 그 순리를 슬쩍 거부해보려는 나를 알고, 과하지 않은 관리법과 예산에 적합한 욕구를 나는 따르기로 했다. 최선이 아니면 차선으로, 내가 무슨 짓을 하는지는 알고서 까분다.


하여, 당장의 마음이 시키는 선택을 하되 이것 하나는 나와 약속한다. 나중에 얼굴이 더 주글주글해지는 필연적인 때에, 만약 생로병사를 순순히 따르지 않은 마음의 대가가 나타난다 해도 달게 받기. 지금 젊음에 찝쩍대는 미련을 훗날 떼내기가 더 힘들어진다 해도 우울에 잠겨서 괴로워하지는 말기. 늙음을 미루려고 했던 욕망에 어떤 반작용의 마음이 떠올라도 선택에 따른 책임을 기꺼이 치르기.


여자가 치사하게 한 입으로 두 말하지 않기로 한다. 그러니 욕구와 어느 정도 타협을 본 나는, 생로병사에 조금 질척이는 지금의 나는, 친구와 만나 카페 라테를 한잔씩 올려 두고 수다 꽃을 피울 것이다.


"헐, 내 피부 좀 봐. 팔자주름 깊어진 거 보여? 장난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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