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째 집 안에만 있다. 직장인도 아니고 파리를 쫓더라도 지키고 있어야 할 가게가 있는 것도 아닌 자유인으로서, 요즘 같은 시절엔 가만히 집에 있는 게 애국하는 것 같다. 공부모임도 다 취소하고 체육관도 못 가니 종일 책 읽다 특집 뉴스 보다 수시로 손 씻다 때 되면 밥 먹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있다. 슬슬 좀이 쑤시지만 그렇다고 뾰족한 수가 없다. 오랜만에 친구들이랑 수다나 떨어야겠다. 그리곤 전화를 걸었다.
신천지가 촉발한 인간의 이성에 대한 의심, 지역의 특수한 역사적 정치적 문화와 폐해, 정부에 대한 안타까움, 답답함, 일 인치 높이는커녕 단 영점 몇으로 정시에서 낙방한 딸아이에 대한 속상함, 강남의 럭셔리한 책방 이야기, 이젠 새롭지도 않은, 앱 하나로 부자 된 사연, 모 아니면 도 같은 성경 이해, 구직과 사업 구상, 정신적인 만족과 경제적인 풍요, 화장품 편집숍 MD의 갑질, 참 힘든 중국과의 관계, 헛웃음 나오는 중국인과 중국문화, 연극학교와 연극교육, 유명 강사의 고액 강사료...
우리의 수다는 주거니 받거니 끝이 없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그저 의식의 흐름에 맞춰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체면 차릴 부담도 없고 잘난 척할 것도 없고 실수할까 긴장할 일도 없고 편하게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생각, 의문, 안타까움, 호기심 등 뭐든 다 꺼내보여도 된다.
몇 달 전부터 역사공부를 하고 있다. 한 달에 한 번씩 모이는데 요즘엔 한국 현대사에 관한 책을 읽고 한 사람당 5가지씩 주제를 정해 와서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 회원들 대부분 평범한 시민이라 역사에 관한 지식이 깊고 풍부하지 못하다. 나도 물론 그중 일 인이다. 그런데 모일 때마다 좀 허전하고 아쉬웠다. 역사를 전공했거나 나보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책을 읽으면서 생겼던 궁금증이나 의문이 속시원히 해결될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모이는 사람들이 좋아서 모임에는 나가지만 그 점이 아주 아쉽다는 말을 친구에게 했다. 그러자 친구는 금강석 같은 말 한마디를 던졌다.
"다른 데서 전문가 찾지 말고 네가 전문가 돼. 유시민이 역사 전공했어? 아니잖아. 공부해서 책 낸 거지."
이 말을 듣는 순간 찬 바람이 스윽 불고 지나간 것 같다. 정신이 번쩍 들면서 답답한 마음이 상쾌해졌다.
"그러네. 너 말이 맞다. 내가 좀 더 공부해서 전문가 되면 되네! 그래 좀 더 열심히 해볼게."
서로 격려하고 자극하고 조언하면서 품위 있고 건강하게 함께 나이 들어가는 친구가 있어서 참 좋다. 그런 친구와 언제든 전화기 붙들고 수다 떨 수 있어서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