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극보수파' 여성의 '딴 세상 미국 문화' 받아들이기
'응애!'
1984년 9월 4일 대한민국의 한 대학병원에서 한 여자 아이가 태어났다. 그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자신이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동으로 기본 아이템을 몇 개 장착하고 나는데 그중 하나가 '3대째 대한예수교 장로회 소속 기독교인'이었다. 대한민국은 종교의 자유가 있는 나라지만 그녀에게는 종교의 자유가 없었다. 그녀의 이름은 신고은, 바로 나다.
매주 일요일 아침, 또래 친구들은 손꼽아 기다리는 행복한 일요일 아침이 내게는 슬픔의 일요일이었다. 내가 꼬마였던 시절 일요일이 되면 국가는 꼬마들에게 달콤한 시간을 허락하곤 했다! 그것은 바로 '개구쟁이 스머프' '엄마 찾아 삼만리' '플란다스의 개'와 같이 일요일에만 볼 수 있는 '만화영화 방영 시간'! 하지만 난 그 달콤함을 누릴 수가 없었다. 왜냐, 난 일요일 아침마다 교회 스케줄로 바빴다. 결국 다른 친구들에게는 기쁨의 일요일 아침이 내게는 슬픔의 일요일 아침이었다.
매주 일요일 아침만 되면 우리 집에서 반복되는 레퍼토리가 있었다. '교회에 안 가고 티브이를 보겠다고 떼를 쓰는 꼬꼬마 신고은'과 그때마다 '등짝 스매싱을 날리는 엄마'와의 갈등. 사실 엄마가 교회를 가지 말고 텔레비전을 보라 하셨다 한들 나는 텔레비전을 끄고 교회에 갔을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여서? 아니. 그것보다 매주 교회에서 받아 온 조기교육 때문이었다.
주일 학교 선생님들께서는 매주 예배가 끝나면 아이들을 앉혀 놓고 "일요일에 교회에 나오지 않으면 지옥불 구덩이에 떨어져요."라고 말씀해 주셨다. 지옥 불구덩이는 어떤 곳인가? 절대 꺼지지 않는 엄청나게 뜨거운 불이 있는 곳으로 아무리 목이 말라 물 좀 달라고 소리를 쳐도 물 한 방울도 마실 수 없으며 고통 속에서 죽여 달라 애원하여도 죽을 수 없는 곳이라고 하였다. 그 조언인지 협박인지 덕분에 나는 귀소본능이 있는 비둘기 마냥 매주 교회를 갈 수밖에 없었다.
교회 괴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중학교 때였다. 중등부에 다리에 장애가 있으신 장로님이 계셨는데 어느 날 교회를 신나게 뛰어다니는 나를 앉혀 놓으시고는 "내가 네 나이 때 예수님 말 안 듣고 까불고 다니다가 예수님한테 혼나서 다리가 절단됐다!"라고 하셨는데 그 말의 영향력은 나를 '주일학교 개근상'으로 이끌어 주었다. 멀쩡하게 걸어 다니고 싶어서 교회를 열심히 다니다 보니 매주 교회를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할렐루야!
이렇듯 유년시절까지 나에게 종교는 조직과 같았다. 그 조직에서 탈퇴하길 원한다면 다리를 포기하든지 지옥 불구덩이에 빠지든지 둘 중 하나였다. 다행히 고등학교 이후에 건강한 목회자님을 만나서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과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났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이 말하는 것과는 많이 다른 것이었다. 그로 인해 나는 나름 건강한 기독교인(?)이 될 수 있었다. 그래도 어린 시절에 세뇌당한 무시무시한 기독교의 율법 덕분에 나는 어느새 세상 보수적인 사람이 되어 버렸다. 이것이 나에게는 가풍이요 문화였다.
머리만 안 땋고 한복만 안 입었을 뿐이지 세상 청학동 스타일의 극 보수파 신고은이 '자유의 나라 미국'에서 피부로 느낀 한국과 미국의 문화 차이는 대중목욕탕의 냉탕과 온탕의 온도차 보다 컸다. 특히 한국에서는 굳이 관심을 갖지 않으면 모르고 살 수 있는 LGBT(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 문화가 미국에서는 피부처럼 가까운 일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특히나 한국의 보통 기독교인들에게 쉬쉬 되는 이 주제가 내가 살게 된 이 미국에서는 공기처럼 친숙한 것이었다. 더 이상 한국처럼 내가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서른 넘은 이성애자 미혼여성에게 <미국에서 경험해 보고 싶은 일 BEST 5>가 있다면 그중 분명 '기회가 된다면' '외국인 남자 친구 사귀어 보기!'가 있을 것이다. 그건 당사자만의 바람만은 아니었다. 남녀를 불문한 지인들의 바람이기도 하였다. "언니가 외국인 형부 데려오면 좋겠다!""내 대신 외국인 남자 친구 좀 사귀어 줘!""외국인 남자는 키스를 잘한다던데? 영어를 해서 혀가 부드럽다더라고? 네가 대신 한 번 해보고 말 좀 해줘!" 등 나의 지인들은 본인들이 미쳐 채울 수 없는 욕망을 나를 통해 대리 만족하길 고대하였다. 어떤 이는 "아는 사람 친구가 여행 갔다가 미국 남자를 만나서 연애를 했는데 알고 보니 뉴욕 펜트 하우스에 사는 재력가였대! 혹시 알아? 너도 그런 남자 친구가 생길지?" 아니요. 안 생겨요!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드라마'나 '카더라 뉴스'에라면 모를까! 어떻게 아냐고? 나도 시도를 해봤으니까!
내게는 여러분들(과 나의) '소원 성취'를 이룰 수 있는 너무도 땡큐 한 기회의 장이 가까이 있었다. 바로 주디 언니가 매니저로 있던 '스시 레스토랑'! 그곳에서 나는 상상 속의 '환상의 짝짓기'를 즐기고 있었다.
주 고객층이 중산층의 백인 남성으로 이루어진 '스시 레스토랑'은 매일 해가 저물녘쯤이면 백인 남성이 단정한 차림으로 레스토랑 바에 앉아 칵테일을 홀짝이거나 스시를 먹으며 스포츠 경기를 관람하며 하루를 마무리하곤 하였다. 그들은 그들도 모르는 사이 '난다신의 미래의 남자 친구' 리스트에 줄을 서 있었다. 가끔 운수 좋은 날에는 끼리끼리 논다고 훤칠하고 스타일 좋은 남성들끼리 레스토랑을 찾아오기도 하였는데 그럴 때마다 난다신은 혼동의 카오스에 빠져들었다. '도대체 누구를 선택해야 하는가?' 행복한 고민으로 심각하곤 하였다.
"언니! 방금 들어온 저 손님 멋져요!"
눈에 훅 들어오는 남성 손님을 발견할 때면 난 언니에게 넌지시 관심이 있음을 표현했다. 혹시 아는가? 언니의 허락하에 저 근사한 남성의 테이블로가 지친 그의 하루를 시원하게 적셔 줄 물이라도 한잔 빈 컵에 채워 줄 기회가 생길는지? 그럼 그것이 인연이 되어 우리는...
"응. 저 손님? ooo 이야. 남자 친구 있어."
남자 친구? 여자 친구도 아니고 남자 친구라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잠잠히 있다 보면 아까 그 남자를 뇌에서 깨끗이 지워버릴 만큼 또 다른 멋진 남성이 환한 미소와 함께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온다.
"언니. 저 손님도 단골이에요?"
"ooo? 응. 단골손님이야. 사람 좋아. 직업이 의사야."
'의사? 그럼 나는 이제 백인 의사 남자 친구를 사귀게 되는 건가?'
"얼마 전에 남편이랑 아이를 입양했어. 남편도 의사야."
남편? 결혼한 게이였어? 잠시 달콤한 상상에 젖어있던 나의 단꿈을 언니의 말이 와장창 깨버렸다. 도대체 왜! 내가 멋지다고 생각하는 남성들은 거의가 게이인 건지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게이라니. 이성애자 미국 남자를 두고 미국 여자랑 '사랑의 쟁탈전'을 펼친다손 치더라도 언어도, 능력도 현저하게 밀리는 나로서는 쉽지 않은 게임이 될 터인데, 그 상대가 게이라면 나는 여자가 아닌 남자랑 대결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난 결단코 이길 자신이 없었다. 이건 시작도 할 수 없는 게임이었다. 문득 그 옛날 원조 섹시가이 리키 마틴이 커밍아웃을 하였을 때가 생각났다. 많은 여성팬들이 처음에는 화가 잔뜩 났지만 곧이어 서로 손을 잡고 안도의 한 숨을 쉬었다지... '어차피 갖을 수 없는 남자, 다른 여자에게 뺏기지 않아 다행이야!' 라며... 정말이지 왜 멋있는 남성들은 전부 게이인지 화가났다. 그리고 '대한예수교 장로회 소속 극 보수파'인 나로서 내 주변에 도사리고 있는 이런 문화를 이해하기란 정말 쉽지 않았다.
"난 게이 손님들이 좋아. 친절해. 난다! 여기는 미국이고 한국과는 다른 문화가 많아. 한국에서 가져온 고정관념 중 버리고 받아들여할 것들이 점점 많아질 거야"
환경을 바꿔보니 정말 나도 모르게 33년 동안 쌓아온 고정관념들이 있었다. 막상 이것을 바꾸려고 하니 뿌리가 너무도 깊숙하게 박혀 있어 쉽지가 않았다. 새로운 것이 다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어떤 새로운 것들은 거부하고 싶고, 피하고 싶었지만 피하고 싶다고 피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난다! 내일 너희 집 앞 도로 폐쇄될 거야."
"왜요?"
"내일 Pride (LGBT) 퍼레이드가 있어. 그게 너네 집 앞에서부터 출발해."
"네?"
"그거 되게 유명한 행사니까 너도 한 번 가봐!"
내가 살던 집 바로 앞에 대로가 있었는데 내일 그 길이 폐쇄된다는 것이다. Pride Parade로 말이다. '프라이드 퍼레이드'란 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 등 성소수자들이 그들의 자긍심을 높이고 권리를 인정받기 위해 벌이는 행진으로 거의 6월이 되면 미국 각 주에서 펼쳐지는 큰 행사이다.
극보수파 기독교인으로서 피하고 싶고 모른 척하고 싶은 LGBT 문화가 이제는 아예 우리 집 앞으로 찾아온다니! 이거 참 뭐 이런 일이 다 있는가 싶었다. 심지어 그날은 주일이었다. 교회를 가는 날인데... 퍼레이드가 있기 바로 전날인 토요일 밤 난 혼자 굉장히 심각해졌다. 잠이 쉽게 오질 않았다. 인터넷을 켜서 검색을 해보았다. 세상에! 생각보다 큰 행사였다! 이 행사가 어찌나 큰 행사인지 1년 전부터 미국의 여러 주에서 이 곳을 참가하려고 패키지 티켓을 산다고 하였다. 그런 엄청난 행사가 바로 우리 집 앞에서 시작된다는데!
'어떡하지... 솔직히... 가보고 싶어.'
미국에서 사는 1년 동안 미국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이 퍼레이드를 솔직히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극 보수적인 성향과 뼈속부터 기독교 교리로 이루어진 나라는 인간에게는 '에잉 가보고 싶다!'라고 해서 쉽게 갈 수 있는 곳도, 받아들일 수 있는 문화도 아니었다. 하지만 가고 싶었다.
아침이 밝았다. 보통의 날과는 다르게 아침부터 시끌시끌한 소리가 나를 깨웠다. 나는 끝나지 않는 내적 갈등을 겪고 있었다. 그 길을 지나야지만 어디든 갈 수가 있었다.
'그래! 결심했어! 어차피 지나가는 길이고!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말도 있잖아? 이게 바로 내가 사는 곳의 현실이니 현실을 제대로 보자!'
집 앞을 나갔다. 골목을 돌자마자 이른 아침부터 많은 이들이 모여 행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서 '운동회'를 준비하는 소년의 흥분감이 보였다. 거리에는 나 같은 동네 주민들도 있었지만 행진을 보기 위해 아침부터 서둘러 나서 명당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평소에는 차가 쌩쌩 달리던 차도였지만 경찰이 총동원돼 길을 막으니 어느새 도로는 퍼레이드가 진행될 길로 변해 있었다. 차가 다니는 게 익숙했던 거리가 보도가 가능한 거리로 변해있었다. 익숙함에서 새로움을 발견하니 기분이 묘했다. 그 거리를 내 두 발로 유유히 걸으니 신선함 또한 익숙해지고 있었다.
나는 어느새 형형색색 치장한 오늘의 주인공들에게 다가가 있었고 함께 사진을 찍어도 되는지 물어보고 있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흔쾌히 포즈를 취해주는 그들과 함께 사진을 찍다 보니 어색하던 처음과는 다르게 나 역시 이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구간마다 서있는 DJ가 틀어주는 음악소리에 잠시 멈춰 몸을 흔들어대다가 다시 거리를 걸었다. 걷다가 코스프레를 한 사람을 만나면 반갑게 인사도 나누었다. 처음의 어색함은 어디로 사라졌지? 나는 그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드디어 퍼레이드 출발 시간이 되었다. 퍼레이드에 참가하는 팀들은 저마다의 콘셉트를 갖고 행진을 시작했다. 나에게는 갑작스러운 오늘이 저들에게는 1년을 기다린 오늘이었다. 그들을 향해 관중들은 아낌없는 박수와 환호를 보내주었다. 모두가 잔뜩 신이 난 와중에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이 있었는데 미국 내 내로라하는 대기업이 자신의 회사 마스코트와 응원 문구로 장식된 모습으로 행진에 참여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팀은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팀의 행진이었다. 그들은 각자 스케치북을 들고 퍼레이드에 참여하였는데 스케치북에는 '나는 나의 게이 아들이 자랑스럽습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참으로 우리나라와는 많이 다른 문화였다. 우리나라는 이런 행진을 하려고 하면 반대를 하는 입장에서 저주를 퍼붓다시피 하며 퍼레이드를 막는 반대 퍼레이드를 펼치는데 미국은 아니었다.
나에게 익숙한 문화와는 달라도 많이 달라 흥에 겨워 잔뜩 신이 나긴 하였지만 사실 편안하지는 않았다. 하루 종일 어리둥절하였다. 그날의 경험이 문화의 힘을 깨닫게 해 줬다. '문화 차이'의 온도는 엄청난 것이었다.
나는 미국에 와서 게이 친구도 레즈비언 친구들도 꽤 많이 만났다. 내가 애를 써서 찾아다닌 것이 아니라 그냥 나의 이웃이 레즈비언이거나 게이인 경우가 허다했다. 사실 한국에서는 그들을 만날 기회도 별로 없었다. 한국 언론을 통해 보았던 LGBT의 모습은 내게 어둡고 음침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만난 그들은 모습은 내가 알고있던 모습과는 다르게 밝고 유쾌하였다. 가끔은 익숙하지 않아 미국에서 만난 LGBT에게 의도치 않은 아찔한 말실수를 할 때도 있었다. 한국 문화에서는 이해될 수 있는 것이 미국에서는 상당히 무례할 수 있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 정도가 '아시안이 당하는 인종차별'적 발언의 수위와 비슷할 정도일 때도 있었다. 무지에서 오는 실수가 다른 문화에서는 의도치 않은 큰 오해를 낳은 것이다.
서른이 넘어 경험한 '문화의 차이'는 '신선한 깨달음'을 주는 것만은 아니었다. 익숙한 것이 주는 편안함을 포기하는 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지금도 나는 그냥 내가 알던 세상, 내 생각이 만든 세상에서 죽치고 살고 싶다. 경험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사고가 넓어진다는 말은 근사한 말이지만 실상은 피곤한 일이었다. 알고 싶지도 않고,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새로운 세상이 파도처럼 밀려와 내가 붙들고 있던 생각이 흔들릴 때 느끼는 골치 아픔은 정말 피곤하다. 밥이 주식인 한국에서 살다가 빵이 주식인 미국에서 살아보니 밥에 대한 집착이 더 커지는 것도 같고.. 모르겠다. 나는 이렇게 '꼰대 라떼'가 되는 것일까?
만약 당신이 새로운 세상의 파도를 맞이 할 의사가 전혀 없다면 미국이 제 아무리 자유의 나라일지언정 당신에게는 지옥의 나라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이 지옥은 내가 원하면 나갈 수 있고, 시원한 콜라도 맘껏 마실 수 있으니 진짜 불구덩이 지옥보다는 나을 것이란 것! 인생이란 무얼까? 인생이란... 이제 쬐~꼼 좀 알 것 같은데 그래도 모르겠는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