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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tistgon Jun 17. 2020

어학원이 망했다.

위기는 위기다.

중국인은 '위기'를 두 글자로 쓴다. 첫 글자는 '위험'이고, 둘째는 '기회'의 의미다. 위기 속에서는 위험을 경계하되, 기회가 있음을 명심하라.

- 존 F. 케네디 (John F. Kennedy)-


캬! 겁나 멋진 말 아닌가? 만약 내가 "이 말 들어 본 적 있는 사람 손 들어 보세요!"라고 한다면 아마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의 손이 올라가고 싶어서 어쩔 줄을 몰라할 것이다.

 

그런데 사실 케네디는 틀렸다. '위기'의 한자 뜻은 '위태할 위'에 '틀 기'로 뜻을 제대로 풀어보면 危(위)는 높은 벼랑에 올라앉아있는 사람의 모습으로 '매우 위태로운 상황'을 뜻하며,  機(기)는 멀리 화살을 쏘는 석궁을 말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위기'라는 말은 말 그대로 '왔을 때 빨리 피해야 하는 상황'으로 '위기는 위기'인 것이다. '위기는 곧 기회다'라는 말은 사실상 인간의 바람이 만들어 낸 위로의 말일뿐인데 정말이지 인간들의 이런 감각을 볼 때면 인간이란 존재에게 경이로움과 숭고함을 느낀다. 위기에 상황에서 낙담만 할 것이 아니라 '다시 한번 잘 살아 보자!'는 의지로 상황을 긍정적인 마음으로 재해석해내 희망의 메시지를 낳은 것이지 않은가? 이 얼마나 생동감 있고 감동적인가!


나에게도 생동감과 감동을 발현할 빌어먹을 '위기'가 닥쳤다.


어학원이 망했다. 자세하게 말하자면 어학원이 망해가고 있었다. 침몰하고 있는 타이타닉호에 탄 것 마냥 어학원이 망해가고 있었다. 시카고에 슬슬 정을 붙이려고 할 때쯤 알게 된 사실이었다.


내가 다니던 어학원의 학비는 9개월에 5,000불 정도였다. 이 정도면 시카고에서 저렴한 학원이었다. 시카고에 만나게 된 분들 중 나 처럼 어학원부터 시작해 정착을 하게 된 사람들은 내가 다니는 어학원의 이름을 들으면 거의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아... 왜 거길..." "거기 이제 괜찮대요? "아 저렴하니까~ 그래도 좀...." 사실 그때부터 조금 불안하기 시작 했다.


나에게는 이 어학원을 소개해 준 지인의 말이 정보의 전부였다. 어학원의 학비는 한 달에 약 700불 정도였는데 처음에 시카고로 갈 결심을 했을 땐 한 달마다 학비를 내면 된다고 생각했다. 700불 정도면 다른 어학원에 비하면 저렴한 편이었다. 내 생각과는 달리 지인은 꼭 9개월 치를 한 번에 내야만 한다고 하였다. 9개월치를 완납하면 할인을 받을 수도 있거니와 그렇게 해야지만 비자가 잘 나온다고 하였다. 하지만 내 1년의 안식년(?)을 시카고에서 다 채워 살 생각도 없었으며 예산 또한 빠듯했던지라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또한 입이 닳도록 말하지만 나의 원래 미국행의 목적은 '하와이에서 살아보기'였기에 고민의 깊이는 깊어져만 갔다. 내 고민을 학원을 소개해 준 지인과 나누자 그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학원 방학을 이용하여 하와이를 가거나, 휴학을 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또한 '어학원을 9개월 다니고 나서 다른 곳으로 옮기게 될 때에 정부에서  Grace period 라 불리는 2달 정도의 체류 기간을 주는데 그 시간 동안 하와이엘 갈 수 있을 것이니 그 기회를 잘 이용하면 된다.'라고 하였다. 괜찮은 조건이었다! 미국에서 어학원 경험도 해 봤으며 내가 가고자 하는 시카고 어학원의 한국지점 담당자였으니 나는 지인의 이야기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결국 예상하던 예산을 넘기게 됐고 모자라는 돈은 염치없지만 부모님께 빌려주십사 부탁을 드렸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중요한 결정은 상의도 없이 맘대로 다 해놓고 이제 와서 돈만 달라고 하는 게 괘씸해서 도와줄 수 없겠다."며 화를 내셨다. 나 또한 그런 아버지가 서운했다. 결국 부녀의 골은 깊어져 몇 주간 말을 섞지  않는 안타까운 상황까지 갔었다. 그 이야기를 하며 지인에게 9개월 말고 3개월 정도 등록하면 안 되는지 물었지만 어쩔수 없다며 9개월치를 꼭 내야 한다고 하였다. 다행히 겨우 겨우 어렵게 돈이 마련됐고 9개월치 원비를 완납하여 등록! 그렇게 어렵게 비자를 얻어 가게 된 어학원이었다. 그런데 그 어학원이 망한 것이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어느 날 지인이 내게 전화를 하여서 "고은 씨. 만약에 어학원이 망한다는 소문이 들려도 당황하지 마세요. 그런 소문 때문에 학원생들이 다 나가면 오히려 소수정예로 수업을 하게 되니 고은 씨 영어 공부하는 데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기회가 될 거예요!"라고 말했었는데 그 말이 어떤 상황에서 나온 말인지 진짜 위기에 닥쳐서 알게 됐다.


지구촌 사람들이 알고 보면 연결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보았는가? 아무런 정보도 지인도 없이 가게 될 시카고였는데 알고 보니 사돈 어르신 친구분이 시카고의 한 대학교에서 경제학과 교수를 하며 살고 계시단 것이었다. 사돈 어르신께서 나의 딱한 사정을 들으시고는 친구분께 사돈처녀가 시카고로 가게 됐다며 시간을 내서 조언 좀 해달라며 특별히 부탁해 놓으셨다고 하셨다. 그러니 도착하면 연락을 해보라며 '이메일'주소를 알려 주셨다.


'안녕하세요. 이범종(가명)님의 사돈처녀 되는 사람입니다. 인사 한 번 드리고 싶습니다.'

'네.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다음 주 점심에 볼까요? 주소는  ooo Blvd oooo' zip code 000000입니다. 와서 연락 주세요.'  


약속 당일, 혹시라도 길을 헤맬지 모르니 한 시간의 여유시간을 갖고 교수님이 일하시는 대학교로 찾아갔다.

교수님이 근무하시던 대학교는 내가 생각한 대학교 캠퍼스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보통의 한국 대학교처럼 캠퍼스가 한 곳에 모여있는 것이 아니라 큰 길가에 띄엄띄엄 세워진 빌딩들 마다 다른 학과들이 위치해 있었다.


보통 길을 찾을 때 구글맵을 요긴하게 사용하곤 했는데 복잡한 도심에서 구글맵은 계속 같은 자리만 맴돌게 만들고 있었다. 30분 정도 헤매자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Zip code 도 Blvd(boulevard)도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구글도 나도 백기를 들었다. 아무 건물로 들어가 건물 관리인을 붙잡고 주소를 보여주며 어떻게 가야 하는지 물어봤다.


"오! 디스 블러버드 이즈 투 블락 다운 스트릿 앤 고 어헤드 블라 블라...." 몸짓을 이용해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건물 관리인의 설명을 듣자 대충 어떻게 가야 할지 알 것 같았다. 역시! 바디랭귀지!!!

"땡큐 해브 어 그뤠잇 데이!" 인사를 드리고 알려준 길로 갔다. 'Blvd는 블러버드라고 읽는 거구나!' 나는 까먹지 않으려고 마음속으로 '불러봐도 울어봐도~'라는 가사가 나오는 <불효자는 웁니다>를 계속 흥얼거렸다. 나에게 교수님이야 말로 불러봐도 울어봐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완전 <불효자는 웁니다>가 아닌 <멍청이는 웁니다>였다.


드디어 교수님이 계시는 학과 건물을 찾았다. 잘 도착했다고 교수님께 메시지를 보내자 곧 내려오시겠다는 답이 왔다.


 "신고은 양?"

나를 향해 다가오는 한 사람이 있었으니! 내가 그토록 애타게 찾아 헤맨 교수님이셨다! 나를 향해 걸어오시는 교수님의 모습이 꼭 TV 다큐멘터리 <성공시대- 시카고의 작은 거인 ooo교수> 편 타이틀 처럼 보였다.


"신고은 양? 반가워요!"

"안녕하세요!"


교수님의 모습은 내가 상상한 모습과 너무나 달랐다. 청소년 시절에 우연한 기회로 얻게된 장학생 신분으로 미국을 오게 되셨다는 교수님. 그 시절 미국에는 동양인 학생도 거의 없었으며 심지어 미국인들은 한국이 어딘지도 몰랐다고 하는데 그런 미국 땅에서 모국어도 아닌 언어로 피 터지게 공부하시고 문화를 익혀, 지금은 미국 3대 도시 중 하나인 시카고의 한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계신 교수님. 나의 상상 속 교수님의 모습은 큰 체구에 포마드 기름을 발라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를 하고 계실 거 같았으며, 양질의 고기를 많이 섭취 해 얼굴에는 반질반질 기름이 좔좔 흐르실 거 같았지만 실제로 마주한 교수님의 모습은 나 보다 작은 체구에 동글동글하고 서글서글한 인상을 가진 분이셨다. 예의에 어긋날 수 있지만 교수님의 모습을 보다 상상하기 쉽게 표현해보자면 영심이 남자 친구 '안경태'의 60대 모습과 같았다. '저런 분께서 미국에서 교수를 하시다니... ' 왠지 미국에서 성공을 하려면 엄청 독하고 강인하게 살아야 하기에 당연히 딱딱하게 굳어지고 근엄한 표정을 장착한 얼굴을 하고 계실 거 같았는데 교수님의 얼굴에선 오로지 소년의 생동감 있는 표정만을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런 교수님의 첫인상이 내 마음을 편안하게 녹여 주었다.


교수님의 초상권은 소중하기 때문에 지켜 드리기로!


교수님의 사무실로 향하는 동안 복도에서 마주친 학생들은 흡사 할리우드 배우들 처럼 생겼다. 그들은 교수님을 보며 "하이!" 하며 반갑게 인사를 하였다. 어떤 학생은 쪼르르 책을 들고 달려와 질문도 하였는데 그 옆에 서있는 동안 나도 덩달아 뭔가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괜스레 우쭐했다. 물론 Blvd를 그날 처음 알았던 것은 그들에게 비밀이다.


곧이어 도착한 교수님의 사무실. 차가운 철제의 문은 신문에 연재된 만화나, 스티커 등으로 귀엽게 장식되어 있었다. 동료 교수 및 학생들이 미국 신문에 소개된 한국에 관련된 재밌는 이야기나 교수님을 떠오르게 하는 자료들을 가져다준 것으로 직접 꾸미신 것이라고 하셨다. 아마도 학교 내에서 사랑받는 교수님인 듯싶었다.

 

교수님의 사무실 문


나는 수줍게 교수님과의 첫 만남을 위해 준비해 간 한국에서 가져 온 귀한 '김'과 '북엇국 블록'을 선물로 드렸다. 교수님께서 김과 북엇국이 없어서 못 드시겠느냐만은 뭐라도 드리고 싶었던 내 마음의 작은 표시였다.


"아이고. 이거 고은 양 먹어요. 난 괜찮은데."


교수님께서도 화답으로 뭔가 주고 싶다고 하시며 본인이 재직 중인 대학교 로고가 박힌 텀블러를 주셨다.


"배고프죠? 오느라고 수고했는데 내가 좋아하는 레스토랑 갈까요? 스시 괜찮아요?"

없어서 못 먹는 귀한 스시을를사주신다니 "알 유 시리어스? 없어서 못 먹죠!!!"라고 대답하고 싶으나

"네. 좋습니다." 라는 대답으로 애써 흥을 꾹꾹 눌러 담았다.


스시 레스토랑에 도착하자 입구에서부터 쭉쭉빵빵 언니들이 교수님을 알아보며 반가워하며 가벼운 스몰토크를 주고받았다. 웨이트리스는 창가 쪽 가장 좋은 자리로 인도해줬다. 자리에 앉아 분위기를 녹이기 위해 사돈 어르신 이야기를 꺼냈다. 교수님께서도 사돈 어르신이 얼마나 훌륭한 친구였는지에 대해 얘기해 주셨다. 그런데, 말씀을 듣다 깜짝 놀란 사실이 있었으니! 내가 지금까지 사돈 어르신의 함자를 잘 못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범종(가명)'님이 아니라 '이종범'님이셨는데 지금까지 계속 '이범종 님의 사돈처녀 신고은입니다.'라며 함자를 거꾸로 불렀던 것이었다. 그런데도 별말씀 안 하시고 넘어가 주신 교수님을 보니 한국에서 뵙던 교수님 혹은 어르신들 과는 다른 여유가 느껴져 교수님에 대한 호감이 급 상승하였다. '이것이 바로 미국서 타일인가?'


너무 황송한 식탁이라 사진을 찍어 뒀다.


음식이 나오자마자 거리를 헤매느라 고파왔던 배를 채우기위해 '장국'에 코를 박고 퍼먹기 시작했다. 교수님과의 자리가 점점 편안해지자 '장국'안에 든 파가 하트처럼 보였다.


"교수님. 이 파 꼭 하트 같지 않으세요?" 기분이 한껏 들떠있던 내가 나름의 유머를 날렸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그건 그냥 파지 무슨 하트?"였다. 이런! 너무 흥분한 나머지 나사가 풀려가고 있었다. 다시 풀린 나사를 조이고 교수님의 조언을 귀담아듣기로 결심하였다.

다시 봐도 내 눈엔 하트만 보인다.


교수님께서는 미국에서 엘리스 정식 코스를 차곡차곡 밟아온 분이셨다. 그런 교수님께서는 내게도 정식 코스를 밟을 것을 권하시며 절대로 법에 저촉 되게 살아선 안 된다고 하셨다.


"이제 옛날에 한국인들이 꿈꾸던 <아메리카 드림 시대>는 끝났어요."

옛날처럼 몸으로 부딪히며 살기에 미국엔 힘센 멕시칸들이 많아졌다고 하셨다. 심지어 그들은 가족들과 똘똘 뭉쳐 일을 하는데 굉장히 성실하고 열심히 일하며 체력도 엄청 강하다고 하셨다. 미국에서 한국말을 하면서 살 수야 없지만 미국에서 스페인어를 사용하면서 살 수는 있으니 더더욱 한국인이 설 자리는 없어져 가고 있다고 하셨다. 그러니 한국인이 미국에서 정착하고 살기 위해서는 이제 언어도 필수가 되었다며, 그러니 나도 어학원에서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 미국 대학을 가서 전문 지식을 쌓은 후 스펙을 키워 한국으로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셨다. 아니면 나이가 있으니 영주권, 시민권자를 만나 결혼을 하는 것도 괜찮을 방법일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목표를 갖고 열심히 공부하여 원하는 것을 성취하는 것이 가장 괜찮을 것 같다고 하셨다.

누가 미국은 한국 처럼 나이를 안 따진다고 하였는가... 이 곳에서도 그놈에 나이가 늘 화두에 올랐다.


"절대로 어학 비자로 불법적인 일을 해서는 안 돼요."

혹여나 미국에 법을 어긴 것을 걸리게 되면 추방을 당하게 되며, 한 번 추방을 당하게 된 후로는 미국에 여행 조차 올 수 없게 될 수도 있으니 조심하길 권고하셨다. 미국의 법은 굉장히 강하고 까다롭다로우니 꼭 법을 지키라며 다시 한번 강펀치 경고를 날리셨다. 정말 일을 하고 싶다면! 소속된 어학기관에서 일을 하라고 하셨다. 하지만 그런 일자리는 경쟁이 치열하니 부지런히 사무실로 찾아가 일자리가 있는지 틈틈이 알아봐야 한다고 하셨다. 하지만 돈을 버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에는 업무도 많고, 급여도 얼마 안 된다며, 그렇지만 나중에 대학교로 편입을 하거나 '영주권'을 얻게 될 때에는 그런 경력이 가산점일 될 수 있으며 '소셜 시큐리티 넘버'를 발급받을 기회도 잡을 수 있을 것인데 이런 것들은 돈으로 살 수 없는 혜택이 이라며 쉽게 얻을 수 없는 찐 정보를 주셨다.


정도를 걸어오신 교수님의 인생 이야기를 들으니 당장 어학원을 달려가 일자리를 알아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일어나자마자 바로 어학원에 연락해보았다. 내가 다니던 어학원은 일리노이에 두 개의 지점이 있었는데 내가 다니던 도심에는 한국인 상담사가 없었지만 다른 지점에는 한국인 상담사가 있었기에 그 지점으로 전화를 걸었다. 한 7번 정도 전화를 걸자 비로서 한국인 상담사와 연결되었다.


"안녕하세요. 한국에서 온 신고은 학생입니다."

"네. 이야기 들었습니다. 잘 다니고 계시죠?"

"네. 다름이 아니라 제가 어학원에서 일을 좀 하고 싶어서요. 제가 일을 할 수 있는 자리가 있을까요?"

"음... 지금 모르시는 모양인데 저희 학원이 사정이 굉장히 안 좋아요. 원래 스폰을 받는 곳이 있는데 그곳이 스폰을 계속해 줄 수 있는지도 모르겠고 재판도 있어서... 여하튼 어학원이 굉장히 어려운 상황이라 일을 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어학원이 상황이 안 좋다고? 나는 황당했다. 이제 겨우 적응해서 어학원 다닌 지 한 달도 안 된 상황인데 어학원 상황이 어렵다니!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어학원이 어려워지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나머지 8개월은 어떻게 해야하지?


"저 그럼 휴학하고 잠시 하와이로 갈 수는 있나요?"

"휴학이요? 어학원에는 휴학이란 게 없어요. 가족 경조사 때문에 며칠 사유서 제출하고 다녀오는 정도 아니면 1코스 끝나고 방학 며칠 정도 주는 게 전부인데. 그거 말하는 건가요?"


말도 안 돼! 나는 분명 휴학이라는 제도가 있다고 해서 시카고로 왔는데! 눈 앞이 깜깜해졌다. 나는 벼랑 끝에 앉아있었다. 반 친구들은 이런 상황을 알기나 할까? 뭘 먼저 해야 할지 막막했다. 다른 친구들은 어떻게 할지 궁금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놀라운 사실을 하나 발견하게 되었으니! 어학원 친구들 중에 나처럼 9개월을 한번에 등록한 친구는 아무도 없었다. 거의 1개월, 3개월 이런 식으로 짧게 등록을 하고 다니고 있었다.


나는 촉을 세워 상황을 판단하기 시작했다. 잘 생각해 보니 한 달도 안 된 시간동안 어학원 선생님이 하루만 수업을 하고 그만두는 일도 있었고, 갑자기 결근을 하는 선생님도 있었으며, 시험날에 출근을 안 한 선생님 대타로 교장이라는 사람이 감독으로 들어온 적도 있었다. 그때는 그냥 '미국은 원래 그런가 보다.'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런 모습들이 무너져가는 어학원의 모습을 반영한 상황일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슬슬 쉬는 시간만 되면 친구들이 뒤에 삼삼오오 모여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야?"

그중에 한 친구에게 물었다.

"우리 어학원이 문을 곧 닫을 거래. 그래서 다들 옮겨갈 어학원을 알아보는 중이야."

다들 알고 있었구나! 역시 떠도는 소문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제는 학생들도 전부 알고 있었다. 학교가 나날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보통의 수업 시간


어느정도 적응해서 포틀럭(Potluck Party)에 한식을 준비하고 한복까지 준비했던 난다 신의 망하기 직전 행복하던 한때

"고은 씨. 학원이 만약에 문을 닫는다고 하여도 학원 옮기지 말아요. 학생들이 줄어들면 선생님이 더 잘 가르쳐 주는 거니까 계속 다녀요."


지인의 말이 생각났다. 그 말을 철썩 같이 믿었는데... 지금 그걸만한 상황이 아니잖아!!!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진짜로 망하기 전에 돈이라도 환불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던 환불규정을 찾아 살펴보았다. 다행히 한 달 다니고 나서 환불을 받을 경우는 원금을 꽤 보장받을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원금 보장률이 떨어지니 환불을 받는 게 급선무였다. 안 되는 영어로 어학원 사무실로 찾아갔다.


"환불을 받고 싶어서 왔다."

"왓?" 어학원 사무실 근무자는 신경질 적인 표정을 하며 말했다. 나는 다시 천천히 말을 했다. 하지만 직원은 계속 못 알아 들었다. '맞다. 내 발음이 구리지!' 휴대폰을 꺼내 번역기를 돌려 휴대폰 채로 보여줬다. 직원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그제서야 알아들고 내 이름과 신상정보를 물어보더니 컴퓨터에 입력 하였다. 직원의 표정은 '알쏭달쏭' 하였다.


"음... 그러니까 네가 9개월치 돈을 냈다고?"

"응"

"아닌데? 너 한 달치밖에 돈을 안 냈는데 무슨 환불을 받는다는 거야?"

"뭐? 나 9개월치 완납했어!"

"아니야. 너 어디로 돈 냈어?"

"나 소개해준 에이전시 사람한테 냈어!"

"직접 물어봐. 너 한 달치씩 내고 있어. ooo 카드로 한 달치 돈이 들어왔을 뿐인데?"

세상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ooo은 내 지인의 이름이었다. 나는 분명 9개월 치를 완납했는데 한 달치씩 내고 있다고? 그것도 지인의 카드로?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이해가 안 갔다.

"그건 내가 아니라 여기 소개해준 사람 이름이야. 내가 그 사람 계좌로 9개월치 돈을 냈어."

내 절망적인 표정을 읽었는지 그제야 직원은 동정의 눈빛을 보냈다.

"나도 이런 경우는 처음 봐. 일단 그 사람하고 이야기해봐. 그리고 혹시 무슨 일 생기면 꼭 말해줘!"


도대체 무슨 상황인 건지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시카고와 한국의 시차를 뚫고 어학원을 소개해준 지인과 통화가 됐다. 지인에게 지금 상황에 대해 설명을 하였다. 결론적으로 지인은 본인이 했던 말을 기억하지 못했고 오히려 내가 본인의 말을 오해를 하고 있다는 하였다. 하... 어학원도 침몰하고 있었고 내 10년 된 인간관계도 침몰하고 있었다. 시차와 거리만큼이나 좁혀지지 않는 대화를 계속 이어나가자니 지치고 화만 났다. 더 이상 말이 안 통할 것 같았다. 결국 한국에 계시던 엄마께 부탁해 엄마께서 지인과 통화를 하게 되셨고 다행히 1개월 학원비를 뺀 나머지 비용을 전부 환불받게 됐다. 지인의 변은 '나중에 어학원이 망하면 돈을 못 받을까 봐 자신이 가지고 있으면서 매 달 카드로 지급을 한 것이다.'였다. 내가 알던 지인은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나를 도와준 것도 맞다. 그러나 어학원 한국 담장자로서 너무 무지했다. 나를 보호해 줄 아무런 힘도 없었으며 오해가 될 만한 상황을 만든 것도 사실이었으며 결론적으로 상식적이지 못했다. 그리고 내가 잘못한 점이 있다면 무조건 지인의 말을 믿었던 것이다. 그 일로 내가 얻은 것과 잃은 것이 있다면 10년 된 지인을 잃게 됐으며 사람을 의심하는 기술을 얻게 되었다.


위기였다. 이 위기에서 난 도망쳐야만 했다. 희한한 것이 사람은 시궁창에 빠졌을 때 비로소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며칠 하염없이 울며 거리를 걷다 보니 억울했다. '이게 뭐하는 짓이야!' 갑자기 화가 나면서 내가 모르던 힘이 솟아나고 있었다.

위기의 상황에 닥쳐 울다지쳐 쓰러져 잠들던 시절의 굴욕적인 셀카

지인의 말만 믿고 안일했던 스스로를 반성도 해보고 스스로를 다독여도 보며 이리저리 정보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어느새 위기의 상황에서 도망갈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 어학 비자라는 것은 한 번 받게 되면 비자가 허락된 기간 동안 '전학'이라는 것을 갈 수가 있었다. 어학 비자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주일에 무조건 최소 18시간 어학시설을 다녀야 하고 시간이 조금이라도 모자라면 바로 추방인데 전학을 가고자 하는 시간 동안에는 다른 어학시설을 선택할 수 있도록 공식적으로 시간을 보장해 주는데 이것이 바로  'Grace period'다. (지인이 말했던 것처럼 꼭 9개월을 다 채워야지만 받는 것이 아니다.) 그 시간 동안 옮길 어학시설을 찾아 (현) 어학시설에서 (전학 갈) 어학시설이 원하는 자료들을 넘겨주고 심사를 걸쳐 학원비를 내고 '전학 완료' 허가를 받게 되면! 전학을 갈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레이스 피리어드'를 악용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면서 현재 매년 그 제도가 바뀌고 있으니 정확한 정보는 각 어학원에 배치되어 있는 전문 담당자에게 문의해야 한다.)


전학은 미국 50개 주 중 어디로도 갈 수 있다. (물론 이주는 보통 일이 아니라 모두에게 권하는 바는 아니지만 미국 여러 주에서 살고 싶은 맘이 있다면 이주하고자 하는 주에 건강한 어학기관을 찾아 전학절차를 밟아 전학을 가 그 주만의 고유한 삶을 살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전학을 가기 위해서는 처음 비자를 발급받은 어학원에서 최소 한 코스는 수료해야 한다. 코스의 수료 안에는 시험성적과 출석률이 포함되니 '시험점수' 및 '출석률'도 꼼꼼하게 체크해야 한다. 다행히 나는 한 코스를 수료했던 상황에, 출석률도 좋았고 시험성적도 있었으므로 전학을 갈 수 있는 자격이 되었다. 그러므로 난 검증된 어학원을 찾기만 하면 미국 50개 주 어디로든 전학을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와이! 난 하와이로 전학을 갈 것이다! 결국 이 위기의 상황이 내가 그토록 원하던 '하와이'로 도망칠 수 있게 만들어 준 것이다. 물론 쉬운 여정은 아니겠지만 의지가 있다면 풀어낼 수 있는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울방귀였던 억울한 상황 이었지만 나는 살아야만 했다! 내 인생이 불쌍했기 때문에 더욱 오기가 생겼다.


난 그때부터 하와이로 전학을 가기 위한 몸부림을 치기 시작하였다!

기다려라 하와이! 내가 가주마 하와이!!!!! 잘 있어라 이 씨! 카고야! 기다려라! 하하하하~ 하와이~

하와이에서 행복하던 한 때가 곧 현실이 되길 소망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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