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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tistgon Jun 12. 2020

연예인처럼 사는 게 꿈인 사람 앞에 나타난 망한 연예인

시카고에서 만난 귀인에게 본의 아닌 민폐를 끼치게 된 웃픈 이야기.

누구나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길 소망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본의 아니게 그 반대가 되는 경우가 있는데 내가 바로 그 굴욕적인 경우가 되었던 것이다.


설익은 과일도 시간이 지나면 슬슬 익어 가듯이 풋내 나서 아렸던 나의 설익었던 시카고에서의 시간들도 점차 익어가 안정을 찾게 되었다.


따스한 햇살이 과일이 익는데 큰 도움을 준다면 내게는 따스한 귀인의 손길이 그랬다. 그 귀인은 바로 '설거지언'을 시켜달라며 찾아갔던 동네 '스시 레스토랑'의 매니저님이었다. 그녀는 나의 엉터리 면접 이후로 간간히 '이사 간 집은 괜찮아요? 잘 지내나 걱정이 되네요.' '영어라도 익힐 겸 우리 가게 바에 나와서 앉아 있으세요. 귀가 먼저 트여야 하니까요.'등의 메시지를 보내와 나의 안부를 묻곤 하였다. 아무래도 서른 넘은 나이에 설거지언이 되겠다며 겁도 없이 무작정 쳐들어 갔던 내가 많이 불쌍해 보였었나 보다.


그러던 어느 날,


'난다. 혹시 이번 주에 잠깐 일 좀 도와줄 수 있어요?'

'스시 레스토랑' 매니저님이었다. 오 마이갓! 일? 코미디언과 작가가 직업의 전부였던 나는 스무 살 이후로 늘 '신박한 아이디어'를 만들어야 하는데 머리를 써야 했기 때문에 미국에서는 머리가 아닌 몸을 쓰는 일을 해보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다. 시카고에 온 후로 어학원과 동네 산책이 내 삶의 전부였기에 돈을 받든 안 받든! 뭐라도 하고 싶었다. 나는 무슨 일인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바로 오케이라고 답을 하였다.


'그럼 이번 주 토요일 오후 5시에 일 좀 도와줘요. 레스토랑에서 물 따르는 일 하는 친구가 그날 결혼을 해서 갑자기 일손이 필요한데 난다씨가 생각났어요. 위, 아래 검은색 옷이랑 검은 신발 신고 오시고요.'


돈이 아까워 쌀도 못 사 먹던 나였지만 단 한 번의 경험이라도 근사한 기억으로 남기고 싶었기에 그 길로 근처 H&M 매장으로 달려가 검은색 티셔츠를 샀다.


약속한 토요일이 왔다. 특별한 추억으로 남기고 싶었던 나는 스스로를 LA에 사는 '제시카 리'라고 상상하고 교포 스타일의 화장을 했다. 거울 속 나는 정말 미국에서 오래 산 사람 같아 보였다. 적당한 긴장감과 적당한 설렘을 안고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아! 난다! 잘 왔어요." 매니저님이 나를 반겨주었다. 아니, 반겨준다는 표현을 하기엔 매니저님의 표정은 그렇게 밝지 않았다. 내가 뭘 잘못했나 싶어 혹시 옷차림이 문제가 된 것은 아닌지 스스로 자가 검열을 해보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매니저님은 평소 표정이 무표정한 사람이었다. 가끔 아주아주 재밌어서 웃을 때를 빼고는 거의 무표정하셨다.


"오빠! 여기 난다 씨. 한국에서 왔대."

주방 쪽에서 키가 크고 잘생긴 분이 나오셨다 "안녕하세요. 이야기 들었어요." 밝은 미소로 반겨주던 그는 레스토랑에 셰프님이셨고 한국분이셨다. 두 분은 서로가 처음 시카고에 왔을 때부터 친하게 지내던 사이로 알고 지낸 지 수십 년이 된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이라며 본인들을 소개했다. 매니저님은 나를 오픈 준비로 분주한 레스토랑 여기저기로 데리고 다니시면서 직원들에게 오늘 하루 도와주려고 온 친구라며 소개해 주셨다. 백인 커플의 웨이트리스와 웨이터, 스패니쉬의 주방팀과 웨이트리스 및 셰프 등등 모두 나를 밝은 미소로 맞아주었다. 그곳이야 말로 진짜 '미국'같았다. 나는 내 이름은 '난다 신'이라며 내가 만든 미국용 이름을 자랑스럽게 알려주었으나 어느 한 명 '난다'라는 발음을 제대로 따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가 나를 '낸다'라 불렀다.

그날 내가 맡은 일은 손님들 테이블을 돌아다니며 물을 따라드리는 일이었다. 아주 간단한 일이었지만 태어나서 처음 하는 일인지라 굉장히 떨렸다. '물은 셀프'라는 문화가 익숙한 뼛속까지 한국 사람인 내가 테이블마다 돌며 물을 따라야 한다니. 덜컥 겁이 났다.  


'혹시라도 물을 따르다 물을 테이블에 엎기라도 한다면 어쩌지? 혹시 나에게 메뉴에 대한 질문 한다면 어떡하지?' 걱정이 쓰나미처럼 몰려왔지만 애써 태연 한척했다.


은은한 조명이 흐르고, 아름다운 재즈가 흐르는 레스토랑. 그곳은 중, 고급 레스토랑으로 데이트 목적의 풋풋한 커플들부터, 특별한 이벤트를 기념하고자 찾은 손님들이 거의였다. 난 스스로에게 '나는 최고급 호텔에서 일하는 호텔리어다!'라고 주문을 걸었다. 오늘만큼은 내가 손님들의 특별한 날을 더 특별하게 만들어주겠노라 다짐하였다.


매니저님은 내게 손님이 착석하면 테이블로 가 빈 잔에 물을 따라드리고 천천히 홀을 돌며 물 잔에 물이 1/2 정도 남아 있는 테이블이 보이면 찾아가 물을 채 워드라고 하였다. 한국에서 살던 나로서는 손님의 테이블을 관찰한다는 것이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입장을 바꿔서 식당 종업원이 내가 동행한 사람과 함께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계속 나를 주시하다가 물 잔에 물이 반만 남은 것을 발견해 쪼로로 달려와 물을 채우고자 계속 왔다 갔다 한다면 신경이 거슬려 결국 참지 못해 "물 필요하면 벨 누를 테니까 그만 오셔도 됩니다."라고 말할 것 같았다. 혹시 나 같은 사람이 있으면 어떡하나 심장이 쫄깃쫄깃했다. 이런 고민을 매니저님께 나누자 미국 사람들은 무관심한 것보다 관심받는걸 훨씬 좋아하니 걱정 말고 하라는 대로 하라고 하였다.


정말 그랬다. 테이블 분위기가 사뭇 진지하더라도 물 잔에 물이 반 남아 물을 따르러 가면 대화를 잠시 멈추곤 "땡큐" 라고 하며 내 눈을 보고 미소를 찡긋 지어준 후 다시 하던 이야기를 이어 나가는 것이었다.


그날 바짝 긴장한 탓에 물 잔 채우는 땜빵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짧은 경험이었지만 그날의 경험이 미국에서 산 그 며칠 동안 보다 미국 문화를 훨씬 많이 배울 수 있었던 꽤 유쾌한 시간이었다.


그날 성실하게 일하던 내 모습이 예뻐 보였는지 그날을 시작으로 나는 매니저님과 셰프님과 더욱 가까워졌다. 어느새 매니저님의 호칭은 언니로, 셰프님은 오라버니로 바뀌게 되었다. 주디 언니와 케이 오라버니! 두 분은 내게 '늘 똑같던 일상이 난다라는 새로운 인물이 와 재밌어졌다.'며 일을 마치고 야식을 먹으러 갈 때, 혹은 운동을 할 때 나를 데려가 주시곤 했다. 정이 많은 주디 언니는 내게 점심도 사주시고 과일도 챙겨주시는 등 엄청난 츤데레 귀인이었다! 케이 오라버니는 쌀과 반찬을 챙겨주시는 등 두 분과 친해질수록 허했던 나의 배와 마음은 든든하게 채워져 갔다.

만남이 깊어질수록 내가 살아온 인생에 대해 언니 오빠와 깊게 나누게 됐다. 결국 원래 한국에서 코미디언을 했었다는 이야기까지 나누게 되었다. 내 이야기를 들은 언니 오빠는 흥미로운 눈빛으로 날 보며 "아! 네가 신마담이구나! 나 텔레비전에서 너 본 적 있어! 기억나!" 하며 나를 알아보았다.


내 인생 이야기를 더 자세히 알게 된 주디 언니는 그 후로 나를 더욱 알뜰살뜰하게 챙겨주었다. 표정은 무표정이었지만 마음만은 뜨거운 정으로 활활 타오르던 언니는 내 남자 친구인 것 마냥 내가 좋아한다는 음식을 기억했다가 날 데려가 사주면서 "내가 먹고 싶어서 온 거야."라고 하는 영락없는 츤데레였다. 언니는 내게 끊임없이 "여기서 이렇게 살지 말고 한국으로 빨리 돌아가서 여기서 열심히 살려는 그 맘으로 다시 시작해봐!"라는 말을 하곤 했다. 언니의 말은 오랜 시간 팔팔 끓여 진하게 우려낸 사골만큼이나 영양가 있는 말처럼 느껴졌다.


어느 날 그날도 레스토랑에 놀러 갔다. 그날은 우연히 언니의 사무실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공간은 언니가 잠시 쉴 수 있는 공간이자 공부를 하거나 컴퓨터 업무를 보는 곳이었다. 작은 공간이었지만 찰나의 순간까지도 열심히 살고 있는 언니의 모습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곳이었다. 벽을 보니 벽에는 언니의 추억이 담긴 사진들이 붙어 있었다. 사진들을 하나하나 감상하다 시선이 멈춘 곳이 있었으니! 그곳엔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연예인처럼만 살자!'


언니가 적어 둔 결심의 문구였다. 평소 언니에게 한국 방송은 타국에서의 고단한 삶을 위로받을 수 있는 큰 의미였다. 그러고 보니 내게도 연예인들의 성공 스토리에 대해 얘기해 주거나 정말 그렇냐며 질문을 하곤 했었는데, 아무래도 언니는 연예인들의 삶을 통해 큰 감동과 도전을 받았던 모양이다. 연예인들의 무명시절이 그들이 흘린 피와 땀으로 인해 결국 성공으로 향했다는 '성공 스토리'를 보면서 언니는 희망을 얻었고 가능성을 꿈꿨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언니 앞에 어느 날 진짜 연예인이 나타났으니! 그 연예인은 언니에게 나타나 '제발 설거지라도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한것이다. 나는 망한 연예인이 된 것 같았다. 언니에게 연예인이란 존재가 주는 메시지가 이렇게 컸는데 내가 언니의 꿈과 환상을 모두 뭉갠 것만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집에 돌아와 세수를 하며 거울을 보았다. 거울에 보이는 내 얼굴 위로 동일선상에서 시작했던 동료들의 성공 스토리들이 하나 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미국에 와서 접했던 동료들의 성공 스토리... '누구는 이번에 건물을 샀다.' '누구는 올해 영향력 있는 연예인 상위권에 들어섰다.' '누구의 코미디 코너가 화제가 되고 있다.'


'만약 내가 한국에서 계속 일을 했다면 나도 성공한 연예인이 될 수 있었을까?'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나 또한 성공하고 싶어 열심히 살았는데 왜 나는 여기 있고 그들은 저기 있는 건지 갑자기 억울해졌다. 자괴감이란 블랙홀로 빠져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순간 십여 년 전의 한 만남이 떠올랐다. 라이프 코칭을 공부하던 개그우먼 선배님과의 만남의 순간이었다. 그 시절은 내가 열심히 산다고 살았지만 내가 뜻하는 대로 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그때 나는 '인생이 다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 괴로워지기 시작했었다. 그런 내 마음을 알던 지인이 선배님을 소개해 준 자리였다. 선배님은 나를 김치찌개로 유명한 목동의 한 식당으로 초대해 맛있는 밥을 사주셨다. 밥 한 그릇 뚝딱하고 배가 불러 배를 두들기고 있던 내게 선배님은 갑작스레 이런 질문을 하셨다.


"고은씨. 고은씨의 죽음 앞에서 고은씨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으세요?"

"훌륭한 개그우먼이요."

"아뇨. 직업 말고 어떤 사람이요."


머리를 망치로 얻어 맞은 기분이 들었다.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가 어려웠고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그때까지 나는 '직업은 곧 나요, 나는 곧 직업'이란 생각을 하고 살아왔는데 갑자기 직업과 나를 분리해야 한다니 난감했다. 그러나 그날에서야 비로소 난 깨달았던 것이다. '직업'은 내가 '나 답게 '살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 깨달음을 얻은 후 부터 나는 '유쾌한 사람' '따뜻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더라도 재밌게 해 줄 수 있는 사람' 등의 수식어가 붙은 '신고은'으로 기억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날이 떠오르자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래. 나 망한 연예인이 아니야. 내가 선택해서 여기까지 온 신고은이야!' 스스로 다짐을 하였다.


가끔 그럴 때가 있다. 내가 아무리 치열하게 고민하고 결정을 내린 선택이라 할지라도 갑자기 나타난 타인의 목소리 하나로, 타인의 시선 하나로 와르르 무너질 때가. 그러나 그럴 때일수록 잠시 멈춰 숨을 고르고 잠잠히 생각해야겠다. '내가 지금 이 곳에 있는 것이 하루아침에 충동적으로 오게 된 것인가?' 그 질문 앞에서 당당하게 '아니요. 치열하게 고민하고 밤을 지새우며 결정하였습니다.'라는 답이 바로 떠오른다면 그 순간 내가 서있는 그곳은 옳은 곳일 것이다!


나는 좀 더 내 편을 들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에 정답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각자 인생에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남과 같게 살 수 없다. 또한 나란 사람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결국 나이기에 나는 스스로에게 더 큰 믿음을 갖고 살아도 되며, 지금까지 지켜온 신념에 대하여 자랑스러운 맘을 갖고 굳은 심지를 지켜도 된다. 그러기 위해선 환경과 타인의 목소리에 쉽게 흔들리지 않을 수 있도록 훈련도 해야 할 것이다.


나는 망한 연예인이어도 괜찮다! 내가 지금 이 순간에 대한 후회가 없다면. 마음속에 어떠한 거슬리는 알갱이 없이 '아! 행복하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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