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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tistgon May 23. 2020

내 꿈은 설거지하는 사람 되기!

미국에서 아르바이트 찾기!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결국에는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One must live the way one thinks or end up thinking the way one has lived.

-폴 부르제 / Paul Bourget-

시카고에서 혼자 살면서 먹던 음식은 인스탄트 국 과 과일 정도가 전부였다.

20대에 나는 이 말을 가슴 깊이 새기며 살아왔다. 책을 좋아하던 어떤 남성의 미니홈피 대문에 새겨진 말이었다. 윤도현의 '사랑했나 봐'가 BGM으로 흐르던 미니홈피. 멋들어진 말이 맘에 들어서 외워뒀었다. 


10,20대의 나에겐 꿈이 있었다. 언제라도 머릿속에서 꺼내면 떠오르던 푸르고 환하게 날 비춰줘서 가슴이 뛰게 만들어 주던 그런 꿈 '연기자, 코미디언'. 그때는 그 꿈이 날 살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그 꿈을 위해 '이렇게 살아야지!'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는 그렇게 살자 정말 꿈꾸는 대로 되는 거 같았다. 


나는 22살에 공채 개그맨이 됐다. 당시 평균적으로 개그맨이 되는 나이보다 어린 나이에 개그맨이 되었던 난 동기들보다 나이가 많이 어린 편에 속했었다. 그런 나를 동기 언니 오빠들은 어린 동생 돌봐주듯 보호해주고 (집에 늦게 가고 싶어도 꼭 10시에 보내줬고 술자리에서 술도 못 마시게 막아줬었다.) 덕담도 많이 해줬는데 그때 동기들을 통해 지혜를 배운 게 있었다. 그것은 바로 '어린 나이의 특권' 이란 것이었다. 난 언니 오빠들의 살아온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릴 때 하는 행동과 실수는 나이 들어서 할 때 보다 덜 쪽팔리다!'라는 교훈을 얻었다. 그래서 난 나이가 깡패라는 생각으로 미치광이 또라이 같은 연기를 천연덕스럽게 했었고 그걸 은근히 즐겼다. 머릿속으로 '지금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나이가 들어서는 더 못 살 거야. 그때는 내가 책임져야 할 것들이 주렁주렁 생기게 될 것이고 그때는 어쩔 수 없는 환경들 때문에 그저 내가 사는 모습을 꾸역꾸역 합리화시키며 살게 되겠지?'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 나였다. 


'그래! 부딪혀 보자.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더 부끄러워져서 부딪히지도 못할 거야. 오늘 쪽팔린 게 내일 쪽팔린 거보다 덜 쪽팔려!' 아침에 일어나서 천장을 보며 다짐을 하였다. 오늘 아르바이트를 구하러 가기로 다짐을 하였다. 사실 불가능한 일이란 걸 알았다. 하지만 안 되더라도 그냥 부딪혀 보고 싶었다. 왜냐면 난 그렇게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으니까! 


개그맨 시험을 볼 때도 그랬다. '내가 개그맨이 어떻게 되겠어.' 싶었지만 당시 난 원하던 대학에 줄줄이 떨어져 재수생이란 신분으로 살며 '직업전문학교'라는 곳에서 '미용기술'을 배우고 있었다. 하고 싶어서 배운 것이라기보다는 부모님의 권유가 컸었다. '기술을 배워서 미국으로 가거라!'가 부모님의 마음이었는데 (어쩌면 그것이 부모님의 선견지명이셨다. 미국에서 미용일을 하면 돈을 정말 잘 번다.) 하고 싶은 '연극영화과 진학'에 예상치도 못하게 줄줄이 낙방하게 되자 하고 싶은 게 없어져 '미용기술'을 배웠던 것이다. 


'직업전문학교'를 들어가는 것이 내게는 새로운 목표였지만 막상 합격하여 미용기술을 배우는 과정은 내게 즐겁지 않았다. 일단 함께 공부하는 언니 오빠들 나이도 너무 많았고 나와는 다른 성향의 사람들이 많아 적응하는것도 쉽지 않았다. 게다가  '한강진'역에 위치한 '미용학교'를 가기 위해서 올라탄 지하철 6호선은 '동덕여대'(당시 내가 지원했던 학교 중 하나였다) '서울여대'(예쁜 여학생이 많기로 소문났었다.)  '고려대'(알다시피 공부 잘하는 사람들이 다니는 학교) 등 세련되고 싱그러운 학생들이 지하철에 우글우글했는데 당시난 늘어난 바지에 '미용학교 준비물'인 '민두(머리만 있는 인형)' 와 '가발(실습을 위한)'을 들고 직업전문학교로 등교했는데 매일 매일 스스로가 너무 초라했고 다른 학생들이 부러웠다. 그런 현실이 슬슬 스트레스로 다가오자 나는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는 심정으로 지인들이 평소에 해줬던 말 '넌 참 재밌어! 코미디언 해 봐!'라는 말 하나 붙잡고 개그맨 시험을 보게 되었다. 그렇다! 위기가 기회가 된 것이다. 


태생이 남의 시선과 말에 상당히 영향력을 받는 성격인 난 개그맨 시험을 본다는 사실이 심장이 터질 거 같았다. 그래서 가족에게도 말 하지 않고 몰래 시험을 봤다. 현실을 도피하고 싶다는 생각과 '붙으면 좋은 거고 떨어져 봤자 심사위원과 나 말고는 모르는 일인데 그들은 한 번 보고 말 사람이니 큰 문제 될 것이 없다!'란 생각으로 시험에 응했던 것이다. 


하지만 처음 응시한 것 치고는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나쁘지 않은 경험을 한 후 계속 도전을 하였고 그 후 2년 뒤 KBS 공채 20기 코미디언이 된 것이다. 그 한 번의 도전이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던 것이다. 


'그래! 나는 그런 사람이야!' 나는 그때의 그 용감 무식함을 온몸과 맘에 장착하고는 스시 레스토랑을 찾았다.


스시 레스토랑 앞에는 Hiring이라는 구인광고 종이가 붙어 있었다. 이미 지인을 통해 나는 자격이 안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나는 시치미 뚝 떼고 레스토랑의 굳게 닫힌 묵직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땡땡래댕댕'

고요한 레스토랑 내부에 문에 달린 종이 정적을 깨며 내가 왔다는 사실을 또렷하게 알렸다.  

잠시 후 검은 머리의 여성이 "헬로" 하면서 나왔다. 

나대는 심장을 부여잡고 "저기... 직원 구한다고 붙어있는 거 보고 왔는데요."

여성은 동그레진 눈으로 날 위아래로 훑어 봤다. 어쩌면 지난번에 한인방송국 대표와 왔던것을 기억하시나 싶었다. 

"지난번에 지인이랑 여기서 식사했는데 너무 맛있었어요."

"아. 한국 분이시구나. 그럼 잠깐 여기 앉아서 기다리세요."


난 카운터 맞은편 의자에 앉아 여자를 기다렸다. 여자는 카운터 뒤로 나있는 문으로 들어가더니 잠시 후 '이력서'를 적는 파일을 가지고 내 옆으로 와 앉았다. 여자는 본인을 레스토랑의 매니저라고 소개하였다. 


"일단 여기 빈칸에 간단히 적어주세요."

난 파일을 받아 들고 빈칸을 채워 나가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영문으로 되어 있어서 머리가 아파왔다. 종이에는 그동안 일한 곳에 대하여 적는 칸, 최종 학력에 대하여 적는 칸 등이 있었다. 20대 초반부터 일했던 방송가에서 내게 요구하는 이력서와는 많이 다른 형식인지라 뭐라고 적어야 하는지 난감했다. 이 곳에서 원하는 직원은 서빙 및 안내원인데 그런 것에 내가 청춘을 바친 나의 이력인 '공채 코미디언'이나 '방송 작가'가 지금 여기서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싶었다. 심지어 언어조차도 자유 구사가 안 되는데... 대책 없이 여기 와 앉아있는 내가 좀 한심해 보였다. 본인의 시간을 제공해주고 있는 매니저에게도 슬슬 미안한 맘이 들었다.


"시카고에서 사신지는 얼마나 되셨어요?" 매니저가 물었다.

"일주일 채 안 됐어요."

"네? 한국에서와서요?" 매니저의 목소리에서 당황한 기색이 크게 느껴졌다.

"아. 한국에서 방송 쪽 일하다가 미국에 살아보고 싶어서 어학연수로 며칠 전에 왔어요."

"그럼 어학생이에요?"

"네"

"실례지만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나이가 좀 있어요. 서른셋이요. 더 나이 먹기 전에 미국에서 살아보고 싶어서요. 제 버킷리스트였거든요."

"음..." 매니저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일단 저희 레스토랑은 어학생은 안 받아요. 어학생은 일 하는거 불법이에요."

"아... 혹시 그냥 돈 조금 받고 설거지라도 하면 안 될까요?"

"설거지도 이미 하고 있는 멕시칸이 있어요. 그거 엄청 힘들어서 여자는 구하지도 않아요."

"아 그렇군요..."

"저기요. 제가 남 같지 않아서 하는 말인데요. 서른 넘어서 미국 오면 답 없어요. 그냥 조금 살아보다가 한국으로 최대한 빨리 돌아가세요. 그래야 경력도 단절되지 않아요. 오자마자 이런 이야기 해서 미안한데 너무 애매한 나이에 왔어요."

"아... 그렇군요..." 기운이 빠졌다. 며칠 살아봐도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은 게 더 비극적이었다. 

"저도 미국에 좀 늦은 나이에 왔어요. 그래서 더 자신 있게 말해줄 수 있어요."

"그럼 저... 매니저님은 미국 오신 거 후회하세요?"

"뭐 딱 그런건 아닌데 그래도 (이력서를 보더니) 난다? 난다 씨는 한국에서 방송 일하고 그랬으면 나쁘지 않았을거 같은데 여기서 고생하기에는 너무 아깝잖아요."

다 맞는 말이었다.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생각나지않았다. 집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말씀 감사해요. 저 이 근처 살거든요. 다음에 밥 먹으러 올게요."

"그래요. 그래도 혹시 제가 도움이라도 드릴 수 있을지 모르니까 위에 전화번호 적어 두고 가보세요."


받은 지 얼마 안 돼 외우지 못하는 내 전화번호. 나 조차도 생소한 내 번호를 휴대폰 메모장에서 뒤적뒤적 거리며 찾아 이력서 여백의 공간에 꾹꾹 눌러 적었다. '혹시'라는 마법이 일어나길 바라면서! 건강하고 잘 됐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는 매니저와 인사를 나누고 터덜터덜 집으로 향했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결국에는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그 말이 나를 여기까지 끌고 왔다. 그러나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었다. 뼈가 부서질 만큼 큰 고통과 노력이 따라야 한다. 이 곳에서는 그것의 몇 백배, 몇 천배는 더 힘든 일이 될 것이란 직감이 들었다. 만약 지금 당장 지하철 표를 끊어 가족이 함께 살고 있는 집으로 갈 수 있다면 당장 그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다. 상황이 생각처럼 굴러가지 않아 불길한 예감이 든다며 당장 짐을 싸서 한국으로 돌아가기엔 당장 1년치 어학비를 내 놓은 어학원은 시작도 안 했다. 난 살아야 했다. 일단 할 수 있는데 까지 다 해봐야 했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결국에는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사는 대로 생각하는 것' 즉, 현 상황을 스스로 인정하고 받아드리는 것이 어쩌면 먼저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는 대로 생각하는 것'에 어느정도 인정과 적응을 한 후 다음 단계로 '생각하는 대로 살기'를 하는것이 지금 나에게는 맞는 순서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비록 '무조건 설거지 하는 사람이 되겠어!' 라는 생각으로 계속 달려갈 수 있겠지만 '내가 온 곳은 내 생각과 다른 곳이야' 라는 생각을 장착 한 후 한 숨 고르는게 나을것 같았다. 


그날 난 물에 흠뻑 젖은 오징어처럼 축축 쳐져있었다. 그런데 희한하게 저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이상한 기운이 스믈스믈 솟아올라왔다. 하루하루 강해지는 거 같은 스스로에게 희열이 느껴졌다. 


그래서 다음 관문은 뭐가 될까?

마음이 답답할때 잠시 쉬어가곤 했던 집 앞 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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