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rtistgon May 22. 2020

드디어 독립! 그리고 멋질 뻔했던 첫출발!

미국에서 룸메이트 구하기와 일 자리 구하기

다음날 오전 9시! 나는 새로운 룸메이트(가 될지도 모를) 여성의 집으로 갔다.

인오빠가 함께 가준다는 걸 괜찮다고 했으나 친절한 오빠는 걱정이 된다며 집 앞까지 함께 가주었다.


"와! 진짜 가깝잖아? 여기 이런데가 있었네?"

주소를 찍고 운전을 하여 찾아간 곳은 인오빠의 집에서 약 5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아파트 입구는 언제나 예뻤다.

아파트 입구는 작은 정원이 있었는데 근사해 보이는 나무 몇 그루가 벽돌색의 건물과 예쁘게 어우러져있었다. 말이 아파트지 미국의 아파트는 우리나라 '이뻔한세상'이나 '부르지오' 처럼 럭셔리하고 쭉쭉 뻗은 고층의 건물이 아니었다. 우리나라 옛날 빌라촌에서 볼 법한 건물을 아파트라고 부르는 모양이었다. 


오늘 보기로 한 집은 3층에 위치했다. 이 아파트의 꼭대기 층이었다. 

'제발 이 집이 괜찮았음 좋겠다.' 

이따 오빠네 집에서 보자며 작별을 고하고 건물 앞에서 벨을 눌러 미래의 룸메이트(가 될지 모를) 여인과 인터폰으로 간단한 통화를 하였다.  

"누구세요?"

"오늘 집 보러 오기로 한 사람이에요."

"들어오세요."

'철컹' 어울리지 않게 보안이 잘 되어있는 집이었다. 

건물은 꽤 오래되어 보였고 엘리베이터는 없었다. 열심히 계단을 올르다 숨이 차오를 때가 되니 꼭대기층이 나왔다. '이 집으로 들어오세요!'라는 싸인이라도 하는듯 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어서 와요!" 

단정한 단발머리에 안경을 쓴 중년의 여성이 나를 반겼다. 다행히 문자에서 남발되었던 '...'에서 느껴졌던 어떤 부정적이거나 우울한 느낌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쪽이에요." 중년의 여성은 별 소개 없이 바로 현관 바로 옆에 있는 방으로 나를 인도했다.


방의 크기는 큰 편도 작은 편도 아닌 적당한 크기였다. 방에는 창문이 하나 나있어 해도 잘 들었는데 그 부분이 맘에 들었다. 그러니까 이 방 한 칸 사용하는데 한 달에 800불을 내야 하는 것이었다. 


"지난번에 살던 사람이 한국에 취직이 됐다고 갑자기 나갔어요. 남자 룸메이트였는데 그 사람 나간 후로 방에 손도 안 댔어요." 바닥은 나무 바닥이었는데 방 안에 가구들은 꽤나 단출했다. 어느 정도 단출했냐면 미국 집임에도 불구하고 침대가 없었다. 작은 책상과 의자, 그리고 깔고 잘 요와 덮고 잘 이불과 베개, 그리고 간단히 옷을 걸 헹거와 신발장, 쓰레기통, 스탠드등과 방 안에 딸린 작은 옷방 정도가 전부인 단출한 방이었다. 약간 어떤 느낌이었냐면 스님이 수행하려고 절간을 찾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래도 이 동네에 이 정도 가격이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년의 여성은 바닥에 깔린 요를 가르키며 침대 대신 본인이 이불을 여러개 깔아 푹신하게 만들었다며 자랑스러워 하였다. 침대가 없는것을 좋게 생각하자면 이 사람 저 사람이 사용한 침대에서 자느니 바닥에서 이불을 깔고 자는 게 위생적으로 나을 수 있지 않겠는가 싶었다. "스탠드도 내가 다 주서 와서 만든 거예요." 중년의 여인은 본인이 자급자족으로 돈을 아껴 방을 꾸린것이 꽤나 자랑스러웠나 보다. 하지만 나로서는 좀 아쉬웠다. 그래도 내 입장에서는 800불을 내야하는데 제대로 구색이 갖춰져 있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방 청소 한 번도 안 한 거예요. 지난번 사람이 얼마나 방을 더럽게 썼던지... 청소 한 번 하면 더 깨끗해질 거예요." 방이 방치되어 있어서 그렇지 깨끗하고 상태 좋은 방이라고 말 하고 싶으셨던 건 알겠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도대체 얼마나 더러운 사람이 살았던 거지? 혹시 빈대라도 나오면 어쩌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가격대비 괜찮은 집이었다.

이 방 한 칸을 사용하는데 내는 비용이 한국 돈으로 약 100만원이었다.

아주머니는 방에 이어 부엌과 화장실, 그리고 세탁기까지 보여주면서 이런 저런 설명을 해주셨다. 부엌에는 냉장고가 하나 있었고 냉장고는 칸을 나눠 사용하면 된다고 하였다. 예전에 시트콤에서 봤는데 '고시원' 생활 하는 사람들 끼리 공용 냉장고를 사용면서 가끔 본인의 반찬을 다른 사람이 먹는 불상사가 일어나 반찬통에 자물쇠를 채우기도 한다는 식의 유머를 봤는데 남일이 아닐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이것이 바로 룸메이트 생활이구나!'싶어져 현타가 왔다. 엄마와 언니에게 빌붙어 살던 때가 어찌나 그립던지...


부엌에 놓여있는 밥솥은 본인것이고 밥솥이 쓰고 싶다면 지난번 남자가 버리고 간 밥솥을 쓰면 된다고 하셨다. 밥솥을 보면서도 얼굴을 찌푸리는 중년여성의 모습에서 '도대체 얼마나 더러운 사람과 사셨던 것인지' 너무도 궁금해졌다. 중년의 부인은 전 룸메이트 이야기를 할 때 마다 소름돋는 표정을 지었는데 아마 상상만 하여도 끔찍한 존재였나보다. 이번에는 부엌에 있는 정수기를 가르키시면서 "이건 정수기!" 난 앞으로 물을 마음껏 마셔도 되겠구나 싶어 잠시 행복했으나! 바로 "이 정수기는 사용하려면 한 달에 10 불씩 내야 해요. 예전에 룸메이트한테 돈 안 받고 같이 사용했는데 얼마나 물을 마셔대는지 정작 돈은 내가 다 내고 물은 제대로 마시지도 못했잖아요" 하셨다. 이 반전 있는 아주머니는 룸메이트를 한 두 번 들이셨던 게 아니었나 보다. 겉모습은 한국 아주머니인데 미국 생활을 오래 하셔서 그런지 대화를 나눌수록 내가 겪어보지 못한 중년여성 캐릭터였다. 미국에서 사는 한국 분들은 아무리 겉모습이 한국인일찌라도 미국에서 오래 살면서 물든 문화 덕에 한국에서 만난 사람들과는 생각하는 것과 삶의 방식이 많이 다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래도 어느정도 마음의 준비를 해둬야 바보 같은 상처를 덜 받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집이 맘에 들었다. 

"방 잘 봤습니다. 근데 혹시... 좀 월세를 낮춰 주실 수 있으실까요?" 

여유가 있어서 원래대로 800불도 내고 정수기도 사용한다고 하면 멋졌겠지만 아낄수 있는 만큼 아껴야 하는 나로서는 또 아쉬운 소리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가격 흥정 정말 못하는데 살아보겠다고 흥정을 하고 있는 내 얼굴은 화끈 화끈 붉어졌다. 애써 웃고 있었지만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그래요... 보니까 나이도 있어 보이는데 혼자 열심히 살아보겠다고 여기까지 온 거 같은데. 사정이 딱해 보인까 750에 해 줄게요. 어때요?" 세상에! 이렇게 쉽게 50불이나 깎아주시다니! 나는 감사하다고 몇 번이고 인사를 드렸다. 당장 이사 들어와도 되냐고 여쭤보니 흠칫 놀라시는 듯 했지만 당장 내일 와도 된다고 하셨다. 그럼 다시 연락을 드리겠다고 인사를 드렸다. 아주머니는 집을 나서는 나를 멈춰 세워 딱하다며 땅콩 두 봉지를 손에 쥐어 주셨다. 막 친절한 한국의 아줌마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적당히 관심을 가져 주시는 모습이 오히려 편했다. 나의 추진력은 무섭게 속도를 냈다! 당장 다음날 아침 이사를 들어갔다.


인오빠의 집에서 가족들에게 내일 당장 집을 나가겠다고하였다. 인오빠 식구들은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라했다. '좀 더 있다가 가도 되는데 왜 이렇게 서둘렀냐'며 혹시 본인들이 불편하게 한 건 아닌지, 아쉬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괜히 나 혼자 주지도 않은 눈치를 보았던 거 같은게 오히려 예의 없었던건 아닌지 미안하였다. 


다음날 아침부터 인오빠는 나의 이사를 도와줬다. 인오빠는 이것저것 주의 할 점을 알려주며 '룸메이트 계약서'를 꼭 받으라며 오랜 유학생활을 통해 몸소 배운 삶의 지혜를 나에게 나눠줬다. 인오빠와 그 가족들의 도움이 내게 너무도 값지고 소중했다. 오빠는 '계약서'는 물론이거니와 그 사람의 신분증 및 그 사람이 집주인이 아니라면 그 사람이 적은 계약서 까지도 요구해야 한다고 하였다. 나는 한국의 정 문화에 익숙해졌기에 중년의 아주머니께 그래도 되는가 싶었지만 나중에 인오빠가 알려준 '서류 작업'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닫게 됐다. (나중에 뉴욕에 거주할 때 서류 때문에 된통 당한 일이 있었다. 나중에 '뉴욕편'에서 나누겠다. 미국에서 집을 구할 때 서류 작업은 굉장히 중요하다!) 인오빠의 가르침 대로 중년 여성 룸메이트에게 이런저런 서류와 자료들을 요구하였지만 '내 프라이버시다'라며 모든 요구에 응하지는 않으셨지만 그래도 나를 지킬 수 있을 서류는 잘 작성해주셨다.


인오빠의 도움으로 엘리베이터 없는 아파트 계단을 무거운 짐을 들고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무사히 이사를 마쳤다. 일단 '더러운 (전)방 주인'의 흔적을 없애기 위하여 창문을 열고 청소를 시작했다. 방은 얼마나 방치되어 있었는지 닦아도 닦아도 까만 먼지가 나왔다. 그 크지도 않은 방을 닦고 또 닦는데 하루의 반나절은 지난 것 같았다. 내가 덮고 자야 할 이불의 상태는 끔찍했다. 나는 전 주인이 혹시 닌자였나 싶었다. 분명 남자 룸메이트였다고 했는데 혹시 생리라도 했는가? 싶게 이불에는 여기저기 피가 묻어 있었다. 아주머니가 일나간 시간이라 혼자 있던 나는 살금살금 테라스에 나가 더러운 이불을 빨랫줄에 널어 먼지를 털고 살균 소독을 시켜보았다. 


누구와 함께 살아본적이 없어서 응당 내가 요구 할 수 있는 것 까지도 스스로 해결하거나 눈치를 보며 가슴 졸이며 요구하곤 했다. 그날도 해가 질 때 쯤 아주머니가 눈치 채지 못하게 몰래 이불을 걷어와 자리에 깔고, 덮고 잠을 청했다. 


다음날 딱딱한 바닥에서 자는 게 불편하기도 하였거니와 정면으로 보이는 창으로 쏟아지는 햇살에 눈이 부시기도 하여 알람도 안 맞췄는데 일찍 잠에서 깼다. 그런데 일어나자마자 온 몸이 가려운거 같았다. '어떡해야 하지?' 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때 내 방 바로 옆 화장실에서 샤워기 소리가 났다. '아주머니께(중년의 여인을 아주머니로 부르게 됐다.) 말씀드려봐야겠어!' 나는 빼꼼히 밖으로 나가 화장실 앞에서 아주머니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 자기 깼네? 잘 잤어?" "안녕히 주무셨어요? 저 아주머니 이불 좀 빨아주실수 있을까요? 몸이 좀 가려워서요." 아주머니는 급 얼굴을 구겨진 신문지 처럼 구기시더니 "그래요." 하셨다. 내 방으로 들어온 아주머니는 양손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 이불을 드시며 "어휴! 나 진짜 너무 더러워서 만지기도 싫어서 몇 달 동안 건들지도 않았는데! 으악!!!" 하셨다. 세상에 내가 저렇게 혐오스러울 정도로 더러운 걸 덮고 잤구나!내 처지가 비관스러웠다. 난 그것도 모르고 저 이불에 내 성스러운 몸을 누여 잔 거네? 문득 '원효대사'의 해골물이 생각났다. 내가 덮은 이불이 벌레보다 더러울 지라도 나의 지난밤은 평온했노라.... 생각하며 '모든 일은 마음먹기 달렸다'며 스스로 위안했다. 


지금 생각해도 내가 대견할 정도로 시카고에 가자마자 난 엄청 바쁘게 움직이고 다녔다. 집을 구하겠다고 여기저기 돌아다닌 것도 대견했지만 일 구해 보겠다고 여기저기 돌아다녔던 막무가내 정신도 정말 대단했던 거 같다. 그런 추진력은 나의 환경이 만들어 준것이다. 나이가 33살이였으며 내가 계획한 1년이란 시간은 생각보다  금방 갈 것이라는 생각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준비는 시카고로 가기 전 한국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한국에서 시카고에 가서 내가 일을 할 수 있는  일은 없을지 열심히 알아보았다. 일단 그 당시에는 '유튜브' 시장이 지금처럼 치열하지 않았기에 '유튜브'로 용돈벌이 정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맘에 '유튜브'채널도 개설하고, 편집 프로그램도 구입하고 또 고프로 카메라 장비 및 랩탑도 비싼 걸로 마련했다. 시카고 어학원에서 일하던 지인도 내 처지를 알고는 시카고의 한 '태권도장'에서 지인이 일손이 필요하다고 하였다며 원하면 연결시켜주겠다고 하였다. 태권도장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뭔지 모르겠어서 스스로 내가 할 수 있을 일을 찾기 시작했다. 33살 이나 먹어서 부모님께 내 버킷리스트를 이루겠다며 무조건 손을 벌릴 수만도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내 살 궁리를 홀로 해보고자 여기저기 찾아보고 여기저기 이력서를 보내 보았다. 내 이력서를 받아 본 곳 중 한 한인방송국에서 내게 관심이 있다는 답이 왔다. 본인이 마침 한국을 가게 되니 직접 만나보는게 좋겠가도 하였다. 대표와 나는 한국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우리는 대표가 묵고있던 여의도에 한 호텔에서 조식 시간에 만나기로 하였다. 나는 단정한 차림으로 대표를 만나러 나섰다. '시카고에 방송국 대표이자 호텔에서 묵는 사람이라면 영화에서 보는 재력가인가보지?' 내게는 미국에 사는 그 흔한 친척이나 가족도 없었기에 미국에서의 한인들의 삶이 어떤지 몰랐다. 내가 주워 들은 이야기는 전부 '미국가서 성공했다'는 소수의 성공신화만이 전부였다. 그래서 나는 미국에서 온 대표는 굉장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다소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식탁에 앉아 신문을 읽으며 커피를 마시는 대표의 뒤에 아우라가 보이는 듯 그가 대단한 사람 처럼 느껴졌다. 대표앞에서 아쉬운 사람은 나였다. 나는 나에 대한 PR을 열심히 하되, 어떤 오해가 생기지 않을 수 있도록 최대한 객관적이고 진솔한 이야기를 나눴다. 대표는 내가 맘에 들었는지 내가 시카고에 오면 함께 할 수 있는 일들이 어떤 어떤 게 있는지를 설명하면서 시카고에 오면 꼭 연락하라는 말을 남기고 헤어졌다. 집에 돌아오는 내내 내 마음은 든든하였다. 무슨 보험을 들은 사람마냥! '역시! 나는 신고은이야!' 자신감 넘치는 발걸음으로 집을 향했다.


'대표님! 저 시카고 왔습니다!'

그로부터 몇개월이 지난 지금 난 시카고에 도착했고 약속한 대로 대표에게 연락했다.

'그래요. 반갑습니다.  저녁 한 번 먹읍시다.'

대표님은 웰컴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하였다. 시내에 있는 어학원 오티날 시내에 나간 김에 대표님과 만나기약속하였다. 아침엔 화창하던 날씨가 약속 시간이 가까워 지자 갑자기 어두워 지더니 예상치 못하게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렸다. 다행이 시카고 날씨가 변덕스럽단 이야기에 늘 스카프를 두르고 다녔는데 그 스카프를 대충 머리에 둘둘 휘 감고 거리를 걸었다. 약속시간은 앞으로 3-4시간 후인데 계속 거리를 거닐수는 없는 악천후였다. 눈 앞에 큰 '스타벅스'가 보였다. 비를 피하기 위하여 '스타벅스'에 들어갔다.

대학가와 역 앞이라 그런지 '스타벅스'엔 사람들이 가득하였다. 그냥 앉아서 시간을 때우기엔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았다. 감기에 걸리지 않기 위해 따뜻한 차를 한 잔 마셔야 겠단 생각이 들어 '라테' 한 잔을 주문했다.

시카고에 오기 전 친구가 준 스카프를 부적 마냥 늘 몸에 두르고 다녔다.

주문을 하기 위하여 줄을 서있는 기분은 마치 사형수가 사형을 기다리는 것 만큼이나 심장을 쫄리게 만들었다. "넥스트!"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머릿속으로 '캔 아이 겟 어 카페 라테 플리즈!' 를 몇 번이고 곱씹어 연습하고 '사이즈'를 물어보면 어떻게 말 할지, '핫'으로 달라고 언제쯤 말할지를 연습하고 있었다. 

"원 카페 라테 플리즈!" 막상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저게 전부였다. 

"왓?"

"원 카페 라테..." 아까 보다 목소리가 작아졌다. 나름 용기를 내서 주문을 한건데... 종업원의 눈에서는 어떤 자비도 볼 수 없었다. '바쁜데 뭐라는거야?' 라는 눈빛을 읽고 당황한 난 메뉴판에 그림을 가르키며 '가족오락관'의 '몸으로 말해요' 마냥 '카페 라테'를 설명 하였고 그제서야 종업원은 알아 들었다. 

어찌나 얼굴이 화끈거리던지! 혹여나 뒤에 줄 서 있는 사람들이 내 거지 같은 영어를 듣고 한심하게 생각하는 건 아닐지싶었다. 날씨도 거지 같고 상황도 기분도 모든게 거지 같았다. 

날씨가 제멋대로인 시카고에선 비가와도 우산을 쓰지 않는 사람이 꽤 많다.

'고은아! 비 오는데 우산도 없이 밖에서 잘 있는 거니?'

울적한 기분으로 어렵사리 주문한 커피 한 모금을 머금었을 때 인오빠의 부인에게서 문자가 왔다. 

'네 언니! 다행히 스카프가 있어서 그거 쓰고 다녔어요. 전 걱정 마세요. 오늘은 대표님이랑 미팅이 있어서 저녁 먹고 갈 거예요.' 비를 맞고 다녀서 처량하고 추워 하나도 괜찮지 않았지만 언니한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 괜찮다고 하였다. 언니는 누굴 만나든지 조심하라고 걱정스레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스타벅스'에 앉아 이사람 저사람 구경하다보니 대표님과 만나기로 한 시간이 가까워졌다. 자리를 일어나 다시 스카프를 머리에 두르고 구글맵을 의지하여 나를 픽업 나오기로 한 약속 장소로 갔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내 앞에 검은색 고급 세단이 멈춰 섰다. "신고은 씨!" 한국에서 봤던 그 대표님이었다! 어찌나 반갑던지! 대표의 차로 달려가니 대표는 젊은 남자와 젊은 여자 직원과 함께 차를 타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사는 곳이 업타운이라고 했죠? 그럼 그쪽에 좋은 곳으로 갑시다!"

낯선 시카고에서 낯선 사람을 기다리던 그날의 창밖

젊은 남자가 운전을 하고 있었고 조수석에는 젊은 여자가, 그리고 뒷자리에는 나와 대표가 앉았다. 젊은 남자와 젊은 여자는 대표를 꽤 깍듯하게 모시는 듯하였다. 어느 정도 달리자 우리 동네가 나왔고 우리는 동네에서 가장 근사해 보이는 스시집으로 향했다. 


스시집은 은은한 조명에 라운지 재즈가 흐르고 있었다. 미국 영황에서 볼 법한 스시집이었는데 실력이 좋은 곳인지 단골손님들이 많아 보였다. 카운터에 서있는 사람에게 4명이 왔다고 말하자 곧이어 위 아래 검은 옷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웨이트리스가 우리를 안 쪽 홀로 안내했다. 으리으리한 스시집을 둘러보며 '그래! 이게 바로 미국이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반갑습니다. 이 쪽은 피디, 이 쪽은 인턴사원이에요."

대표가 두 젊은이를 소개해줬다. 그들은 내 또래로 보였는데 시카고에 온지 7일도 안 된 나는 그들이 너무도 대단해 보였다. 잠시 후 웨이트리스가 메뉴판을 들고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오셨네요!" 한국말로 주문을 받는 웨이트리스를 보자 마음이 놓였고 이 웨이트리스 역시 멋져보였다. 


어두운 실내 조명의 스시집엔 테이블 마다 호롱불 같은 초가 놓여 있었는데 우리는 운치있게 촛불에 의지하여 메뉴판을 보았다. 보아도 뭐가 뭔지 모르는 날 대신해 대표는 비가 오니 일단 김치 라멘을 먹으라고 하더니 그 외에도 꽤 값비싼 메뉴들을 잔뜩 시켜주셨다. 역시! 미국에 사는 한국인은 다 성공하는가보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들로 어느 정도 분위기가 좋아지자 본격적으로 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한인방송국은 시카고 도심에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내가 시카고 도심에 살게 된다면 자신과 일을 하기 힘들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일을 하더라도 돈을 지급할 수는 없고 자동차를 빌려 준다든지 집 제공식으로 보상을 할 예정이었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유학생 비자는 경제 활동을 하는 것이 불법이기도 하였다. 사실 난 시카고에 가기 전까지 그런 사항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대표님은 함께 온 두 젊은이 역시 나처럼 시작했으니 이들과 알고 지내면서 도움을 받으라며 연락처를 교환하게 해 주시며 어떻게 할지 생각해 보라고 하셨다. 

너무도 근사하던 스시 레스토랑에서의 웰컴 저녁 식사

나는 고민이 되었다. 사실 내가 다니게 될 어학원은 본점과 분점 이렇게 두 곳에 어학원이 위치했는데 한 군데는 시카고 도심에 있었고, 한 군데는 대표가 운영하는 한인방송국이 위치한 시카고 서버브 (가정집들이 모여 있는 살기 좋은 변두리라고 이야기 하면 될까?)에 위치했는데 개인적으로 난 시카고 도심에 있는 어학원을 다닐 예정이었다. 취직 하러 시카고에 온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시카고 도시의 삶을 살아 보고 싶었다. 결국 서로의 미스 커뮤니케이션으로 일은 무산됐다. 돌다리까지 두드려 보았다고 생각했는데 일이 이렇게 막혀버리자 앞날이 막막했다. 


'고은 씨 언제든지 도움 필요하면 연락해요. 저 시간 많아요.' 내 연락처를 받아간 남자 피디에게 연락이 왔다.나를 보니 자기가 처음 미국 왔을 때가 생각난다며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하였다. 차가 없는 나를 위해 장을 보러 갈 때 서스름 없이 연락하라고 하였다. 지금 장을 보는게 문제가 아니었다. 당장 어떻게 살지가 막막했던 난 '저기 피디님! 혹시 아르바이트할 곳 없을까요?' 라고 단도직입적으로 질문을 날렸다.

'글쎄... 아! 지난번에 갔던 그 스시집에서 내 친구들이 아르바이트했던 거 같은데! 제가 한 번 아르바이트생 구하는지 물어봐줄게요.' 당시 일이 무산된 나의 이야기를 알았던 피디는 안타까워 하며 일을 알아봐 주겠다고 하였다. 며칠후 피디에게 연락이 왔다. 

"어떡하죠? 거기는 아르바이트생 안 구한다네요. 특히나 유학생 비자는 더더욱 안 받는대요."

"아. 네... 알겠습니다."

도대체 내가 인터넷 카페에서 읽었던 '미국 어학연수 가서 알바로 차 샀다!' '미국 어학연수 가서 알바로 학비 벌었다' 하는 사람들은 어디 있는 건가? 현지에서 알게 됐는데 미국에서 유학생 신분으로 합법적으로 일 할 수 있는 곳은 본인이 다니고 있는 '학교' 내에서 운좋게 일을 하거나, 미국내 친척이나 친한 친구가 일손이 너무 너무 부족해서 도와줄 심산으로 일을 하곤 한것이었다. 나 처럼 지인 하나 없는 사람이 오자마자 아르바이트를 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난 정말 무식했다. 무식했고 대책도 없었다. 어학원은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어학원이 시작되면 하루에 드는 차비만도 10불이 넘을텐데 하루하루 꼬박꼬박 들어갈 이 생활비를 어떻게 감당할수 있을지 막막했다. 그렇다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기엔 시카고에 온 지 7일도 안 된 것이다. 


'난 무식해. 그런까 그냥 무식하게 한 번 부딪혀 보자!' 

난 무식하게 웰컴 식사를 했던 '스시 레스토랑'에 무작정 찾아가 보자고 다짐했다!

'되든 안 되든! 그냥 한 번 가서 부딪혀 보자!!!!'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내일 미친짓을 해보자는 다짐으로 닌자가 덮던 이불을 덮으며 잠을 청하였다. 

피로 물든 닌자의 이불은 그날 밤 무식쟁이의 눈물자국이 더해져 더욱 사연 있는 이불로 완성되어갔다.

책상에는 가족사진이 늘 놓여 있었다. 사진이 내겐 큰 힘을 주었다.





이전 04화 낯선 남자에게서 낯선 냄새가 난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