룸메이트 구하기 대소동
인오빠의 집에서 신세를 진 바로 다음날부터 오빠는 나를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일단 1년 치 생활비로 약 800만 원 정도는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나는 은행 계좌를 만드는 일이 가장 급선무였다. (나의 계획은 이랬다. 지인이 일하는 시카고 어학원에서 비자를 받고 어학원을 다니다가 휴학을 하고 '하와이'로 가는 것이었다. 왜냐면 하와이에서 나의 지인이 본인이 운영하는 '호스텔'에서 나를 묵게 해 주겠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시카고 어학원에서 일하는 지인과 그런 계획까지 미리 함께 나누고 시카고로 가기로 결정했었다. 1년 치 생활비로 약 800만 원은 너무 적은 돈 같지만 그런 계획이 있었기에 1년 치 생활비를 적게 측정했었다. ) 그때는 몰랐지만 알고 보니 유학생에게 송금은 큰 수수료가 붙지 않기 때문에 한국에서 미국 계좌로 송금을 하면 되는 것이었는데 그런 정보를 몰랐던 나는 약 20시간 되는 비행 동안 몸 구석구석에 현금을 챙겨 오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난 큰 돈을 얼른 안전한 은행에 넣고싶었다.
하지만 미국 기준으로 외국인인 난 통장을 개설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일단 외국인도 계좌를 쉽게 개설 할 수 있는 은행을 찾아 나에 대해 증명할 수 있는 서류들을(여권과 어학 생 비자 등) 챙겨 길을 나섰다. 한국과는 다르게 미국에는 은행의 종류가 다양했다. 나중에 알게 됐는데 어떤 은행은 전부 한국계 직원으로 이루어진 은행도 있었다. 나는 인 오빠의 도움을 받아 미국에서 나름 유명한 은행에서 계좌를 개설할 수 있었다.
'윈디시티'라는 별명과 걸맞게 시카고의 날씨는 5월인데도 바람이 강하게 불었고 스산했다. 인오빠와 나, 그리고 오빠의 갓난아이 딸 모두가 바람을 가로질러 은행 안으로 들어갔다. 은행 문 앞에는 '담배 금지' 표시나 '개 출입 금지' 표시가 아닌 '총기 소지 금지' 스티커가 떡 하니 붙어있었다. 역시... 시카고였다!
인오빠의 동네는 일리노이 시카고 도심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동네였지만 그 동네에는 유독 흑인이 많이 살았다. (원래 시카고 남쪽에만 흑인이 많이 사는 줄 알았는데 시카고 전체에 흑인의 인구가 그렇게 많을줄 몰랐다.) 우리가 찾은 은행의 직원들 역시 거의 흑인이었다. 미국이라고 하면 전부 금발에 파란 눈만 있을 거라는 생각을 가진 '미알못'이던 내게 그런 모습은 굉장히 특별해 보였다. 은행원들은 자유로워 보였다. 한국의 은행원과는 다르게 그들은 유니폼을 입고 있지 않았으며 은행 입구에는 영화에서 자주 보던 덩치 큰 흑인 아저씨가 입구에서 총을 차고 은행을 지키고 있었다. 은행에서는 R&B 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직원들도 고객들도 가끔씩 콧노래로 따라 부르며 농담 따먹기를 하며 껄껄 웃기도 하는 등의 여유를 보였다.
갓난아이와 덩치만 크지 갓난아이나 다름없는 한국인인 나는 인오빠의 보호를 받으며 은행원이 우리를 호명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풍채 좋은 여성이 우리에게 다가와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방으로 안내했다. '어떻게 타자를 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긴 손톱을 가진 그녀는 인오빠를 통해 한국에서 유학생 신분으로 이 곳에 온 나를 소개받았다. 인오빠는 내가 은행 계좌를 개설하고자 은행을 찾았고 본인이 도와준다고 설명을 했다. 그녀는 이해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분위기를 좋게 만들려고 대화를 시작했는데 '북한- 김정은'에 대해 안다며 아이스 브레이킹을 시작했다.
내 계좌를 만들러 간 것이지만 정작 나는 알아듣는 것도 말하는 것도 제대로 못하는 덩치 큰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답답하지만 별 수 없는 나를 위해 오빠가 한국어와 영어를 번갈아 동시통역해주면서 작업을 이어갔다. 계좌를 만들기 위해서는 거주지를 기재해야 했는데 당시 인오빠 집에서 신세 지던 나는 어쩔 수 없이 인오빠네 집 주소를 빌릴 수밖에 없었다. 전화번호도 없었기에 전화번호 또한 인오빠의 번호로 기재했다.
"끄응 끄응"
생각보다 은행 업무가 길어지자 오빠의 딸이 지루했는지 보채기 시작했다.
'제발 나가지 말아 줘요!!!!'
인오빠 없이는 나도 너무 불안한데....
오빠는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달래기 위해 양해를 구하고 잠시 밖으로 나갔다.
......
나와 은행원 단 둘만이 덩그러니 남겨졌다.
한국이었으면 이 은행원이랑 금방 친해질 수 있을 텐데...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내가 너무 바보 같았다.
나는 뻘쭘함을 참지 못하고 용기를 내서 말했다.
"나는 노스 코리아에서 온 게 아니라 사우스 코리아에서 왔습니다."
.....
방 안에서는 정적만이 흘렀다. 은행원은 컴퓨터 문서 작성 집중을 해서 못 들었던 건지 아니면 내 영어가 너무 엉망이라서 개가 짖는 줄 알았던 건지 무반응이었다. 나는 매우 부끄러웠다. 다시는 입을 열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왜 6학년 때 '눈높이 영어'를 제대로 하지 않았을까? 10년도 넘은 일들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얼음 같던 방 안에 겨우 딸을 달랜 인오빠가 한숨을 쉬며 들어왔다. 아이를 재우고 오느라 늦었다고 하였다. 그동안 아무 말도 않고 컴퓨터 업무만 보던 은행원이 인오빠를 보자 급 방긋 웃으며 일을 다 마쳤다며 샬라 샬라 오빠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통장 개설은 인오빠의 도움으로 무사히 마쳤고 가지고 있던 현금은 전부 입금했다. 나는 엄마가 너무 보고 싶었다. 은행에 걸려있는 포스터 속 남성의 모습이 꼭 나와 같아 보였다.
은행에서 나오자마자 인오빠는 나를 휴대폰 매장으로 데리고 갔다. 한 손에는 무거운 아기 바구니를 들고 매장 문을 활짝 연 인오빠는 그곳에서도 역시 동시통역사가 되어 일을 처리해 주느라 바빴다. 이제 휴대폰도 개통했겠다! 중요한 불은 껐다.
중요한 일들을 마칠수록 마음이 가벼워 지기도 하였지만 점점 인오빠에게 미안해졌다. 오빠는 물론이거니와 아이 둘을 보면서도 본인의 일을 하던 워킹맘 인오빠의 부인에게도 너무 미안한 감정이 쌓이고 있었다. 인오빠의 부인은 매일 아이를 재우느라 새벽에 잠들면서도 아이와 함께 새벽에 깼다. 엄청 피곤할 텐데도 출근 전에 아이들 이유식과 밥을 챙기고 집을 나섰다. 그것만으로도 힘들 텐데 그것도 모자라 나의 밥까지 챙겨줬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
시카고에 온 첫 번째 주일, 나는 언니와 두 아이들과 함께 차를 타고 서버브에 위치한 한인교회를 갔다. 목사님이 핏대를 세우시며 말씀을 전하고 계셨지만 내 귓구멍은 막혀 있었다. 오로지 내 머릿속에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휴대폰을 들고 <리브 인 시카고>라는 시카고 교민을 위한 카페에 들어갔다. 예배시간 내내 집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원래는 집을 구할 때까지 인오빠가 본인 집을 제공해 줄 테니 천천히 함께 집을 보러 다니자고 하였는데 더 이상은 민폐를 끼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그 누구도 눈치를 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편하게 해 주려고 온 가족이 노력을 해주었는데 그 모습이 오히려 나를 더 힘들게 만들었다. 미안한 마음에 점점 등이 굽어가고 있었다.
'나는 서른셋이야! 내가 스스로 찾아보는 거야!'
시카고의 집값은 비싸기로 유명하다. 내가 만약 시카고 <밀레니엄파크> 근처에서 혼자 산다는 가정을 해보자면 렌트비로 한 달에 족히 $2000 정도를 내야 한다. 그 외에 '유틸리티 피'라고 하는 '전기세, 물세, 인터넷 비'등등이 더 든다. $2000을 내더라도 방이 없는 스튜디오 형태의 집이거나 운 좋으면 방 하나 딸린 콘도의 월세가 그 정도 가격이다. 만약 $1000불 정도 월세의 방이 나온다면 그것은 방 하나 있는 집에서 거실에 칸막이를 쳐 룸메이트와 함께 사용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내 예산으로는 '도심'에서 떨어진 '시카고'에 '룸메이트' '룸 셰어' 혹 은 '서블렛' 정도를 구 할 수 있었다. '룸메이트' '룸 셰어'는 말 그대로 집 하나를 나눠서 함께 사는 개념이고 '서블렛'은 어떤 사람이 1년 치 월세를 내고 집을 사용하다가 그 집을 비우게 되는 경우 방을 놀리느니 사람을 구해 그 사람에게 월세를 받아 월세를 지급하는 형식인데 이런 매물은 거의 거주자가 여행을 간 경우 짧은 시간 머물 사람을 구하거나 혹은 집주인의 동의가 없이 불법으로 이뤄지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나는 $1000 씩을 내면서 거실에서 살 여유도 생각도 없었다. 방을 구하는 데 있어서 나에게 가장 1순위는 값이 저렴한 곳이었다. 그러면서도 '시카고 도심'과는 멀지 않은 곳을 원했다. 1주에 5일을 가야 할 어학원이 '밀레니엄 파크 '근처에 위치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1달에 월세 $700을 마지노선으로 방을 구하기 시작했다.
'6월 입주 가능. 화장실 1개. 방 2개. 도시에서 30분 거리. 월 $800. 남자 룸메 구함'
광고는 이런 식으로 간단하게 나와있었다. 몇 군데 가격이 맞는 곳을 찾았다. '카카오톡'을 이용하거나 메일을 보내 방이 아직도 있는지, 당장 입주가 가능한지 질문했다. 일단 내가 원하는 지역에서 가격대가 $700인 곳을 찾기는 힘들었고 여자 룸메이트만 받는 곳 또한 전무했다. 결국 내가 원하는 조건에 맞는 곳들 옆에 쓰여있는 메모를 보면 '남, 녀 상관없음'이었다. 낯선 남자와 같이 산다? 물론 외국에서는 남녀 구분 없이 룸메이트로 산다고는 하지만 보수적으로 살아온 나로서는 너무 떨리는 일이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크게 없었다.
'어쩌면 남자 룸메이트 또한 나한테 일체 관심도 없을지도 모르는데 혼자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니야?
아주 좋은 의좋은 의남매가 될 수 도 있지 않겠어? 그리고 여기 미국이잖아! 지금 너무 구시대적 발상 아니야? 혹시 되게 괜찮은 남자라서 또 잘 될 수도 있고.... 흐흐흐 지금 내가 찬물 더운물 가릴 때도 아니잖아!'
스스로를 위안하며 눈 딱 감고! 일단 모조리 연락을 돌려 보았다.
'안녕하세요. 광고 보고 연락드립니다. 아직 방이 있나요?'
카톡을 보낸 곳 중 한 곳에서 연락이 왔다.
'네. 아직 있습니다.'
메모해 둔 번호를 보니 '남자 거주 중. 남, 녀 상관없음'이라고 게시했던 사람이었다.
'지역이 어디죠?'
'스코키입니다.'
'스코키? 무슨 강아지 이름같다.' 스코키가 어딘 줄도 모르면서 일단 직접 가보자는 생각이 들어 구글 지도를 이용해 검색해 보았다. 인오빠네 집 앞에서 전철을 타고 2번 갈아타면 갈 수 있는 곳이었다. '이 정도 쯤이야!' 막무가내 용감함이 단전에서부터 끓어올랐다. 한국에서도 전철 타고 잘 다녔으니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오늘 집 좀 볼 수 있을까요?'
'네! 오세요!'
'몇 시쯤 가면 될까요?'
'아무 때나 오세요!'
너무 깔끔했다! 예배를 마치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바람 좀 쐬겠다고 말하고 집을 나섰다. 내가 집을 보러 간다고 하면 왠지 인오빠가 데려다주겠다고 할 거 같아서 이상한 말로 둘러댄 것이다. 나는 인오빠가 빌려준 CTA (시카고 전철 패스. 한국 처럼 패스를 처음 만들려면 카드를 구입해야하기 때문에 인오빠는 집에 있던 카드를 빌려줬다.)를 챙겨서 집을 나섰다. CTA 패스를 두둑이 충전하고 룸메이트가 될 수도 있을 낯선 남성의 집으로 향했다! '여기는 미국이야! 이제 나는 더 이상 한국에서 살던 개그우먼 신고은이 아니라 한국에서 온 어학생 '난다 신'이라고!'
전철을 기다리며 내가 나에게 말했다.
'난다 신' 이름을 새롭게 만들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거 같았다. '고은'이란 이름을 좋아했지만 그 이름이 너무 고운것 같았다. '곱고 고운 인생' 보다는 더욱 '신나는 인생'을 살아 보고 싶었다. 이왕 미국으로 떠나는 김에 영어 이름으로 '난다 신'을 선택했다. 미국에서는 더욱 신나게, 훨훨 자유롭게 날고 싶다는 뜻을 담아 만든 이름 '난다 신'! (재밌는 사실은 정작 미국 사람 아무도 내 이름 '난다'를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다. 미국 사람들에게 '난' 이란 발음이 생소해서 100이면 100이 나를 '낸다'라고 불렀다. 그래서 결국 부르는 사람을 배려해 '줄리아' 라는 이름을 또 만들게 됐다.)
그래! 누가 뭐라고 하든 나는 '난다 신'! '난다 신'이란 이름답게 신나는 마음을 억지로 단전에서부터 끌어올려 낯선 남자와의 아름다운(?) 동거를 상상하며 스코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