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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tistgon May 15. 2020

새까만 시카고의 밤은 곧 나의 미래

한 밤에 온 메시지! 내가 보고 싶다는 남자와 절망적인 나

비행기를 기다리던 인천공항에서

"오늘 믹스커피 한 모금을 마셨는데 천국의 맛을 본 기분이었어."

29살의 나이로 천국으로 이사 간 나의 친구가 했던 말이다.

게르만족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난 방송에 예쁘게 나오기 위해 끊임없이 다이어트를 해야만 했다.

그러나 스트레스를 받을수록 나는 단 게 자꾸 당겼고 앉은자리에서 초콜릿 한 판 먹는 것은 우스운 일이었다. 어느 날 그날도 어김없이 초콜릿에 빵에 케이크 등 달고 단 음식을 게눈 감추듯 헤치워 버린것이다!

평소 내 이야기에 귀를 잘 기울여주던 친구에게 "다이어트해야 하는데 오늘 단거 엄청 먹었어. 진짜 난 살 가치도 없다!"라고 말해버린 것이다. 내 이야기를 들은 친구가 웃으면서 말했다. "오늘 믹스커피 한 모금을 마셨는데 천국의 맛을 본 기분이었어. 그래서 난 네가 부러워!"였다. 병원에서 단것은 암에 좋지 못하니 절대로 먹지 말라고 했는데 그날따라 친구가 인스턴트 커피가 너무 먹고 싶은 나머지 딱 한 입을 먹었던 것이다. 그 맛이 그토록 달콤해 천국과 같았다고 하였다. 멍청이... 나는 내가 극도로 한심했다.


친구는 투병 끝에 천국으로 이사를 갔고 그 사건은 내 인생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너무도 완벽하던 친구였고 너무도 천사 같은 친구였기에 친구를 떠나보내는 게 쉽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어쩌면 나보다 이 세상에 더욱 필요한 가치 있는 존재 같은데 이럴 수도 있구나! 생각했다.

내가 사는 세상이 결코 유한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도 강렬하게 체험한 것이었다.


비행기에 앉아서 멀뚱이 천장을 쳐다보는데 친구의 목소리가 들리는것 같았다. 그런 저런 일들이 퍼즐처럼 맞춰져 나를 여기 앉혀 놓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낯선 비행기 안에 앉기까지 인생이 참 복잡하게 흘러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선택이 옳은 선택인지에 대해 스스로에게 참 많은 질문을 해댔고 그에 대한 답을 확실히 얻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0부터 시작해야 하는 낯선 환경에 스스로를 내던지는 일이 현실이 되자 스스로가 참 무책임하고도 무식하단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 살면 얼마나 편한데! 이게 뭐하는 짓이람!


무식하고 무능했던 나는 끓는 열정과 젊음을 무기 삼아 샌프란시스코를 경유해 시카고로 향하는 중이다.

경유는 물론이거니와 혼자서 외항사를 이용해 본 적도 없는 나인데 이게 뭐하는 짓인지 현타가 왔다.

비행기 창문만 열린다면 뛰쳐 내리고 싶었다.


절망에 가득차 있었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기내식이 나왔다. 나는 경건한 맘으로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했다. '하나님. 너무 떨립니다. 인간 천사를 보내주세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분이시군요!"


천사가 나타난 걸까? 눈을 떠 소리가 들리는 옆을 쳐다보았다. 옆을 보니 한국분이 앉아계시는게 아닌가?

'죽으란 법은 없구나. 아니, 정말로 어쩌면 이 미국행은 나에게 운명일지도 몰라!'라는 생각이 들며 입가에 살짝 미소가 번졌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분이시군요!" 나를 보고 생긋 웃는 그 인간 천사는 중년의 한국 여성분이셨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긴장이 눈 녹듯 사라졌다.

"네. 하. 제가 방금 인간 천사를 보내달라고 기도를 했는데 신기하네요."


우리는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신분세탁이 꿈이었던 나는 나를 그저 '방송가에서 일하던 사람' 정도로 소개하였고 중년 여성은 본인을 소개하길 젊은 시절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를 하다 지금의 백인 남편을 만나 알콩달콩 살고 있는 사람이라 했다. 부모님께서 몸이 많이 편찮으셔서 오랜만에 찾아뵙고 돌아가는 길이라고 하는데 부모님 이야기가 나오자 눈물이 찔끔 났다. 부모님과 헤어진지 약 서너 시간 만에 나는 부모님이 보고 싶어 견딜 수 없게 되었다. 터지려는 눈물샘을 억지로 부여잡으며 중년 여성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고 시간이 어느정도 지났을까 비행기 조명은 어두워졌다. 우리는 공식적인 휴식시간을 받아들이고 서로 휴식시간을 갖기 시작했다. 나도 마음이 좀 놓였는지 이제는 좀 쉬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내 앞에 앉아있던 남성이 고개를 슬쩍 돌리며 "한국분이셨군요?" 라며 말을 걸기 시작했다. 그는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고했다. 대화하는 소리를 듣고 내가 한국인인 줄 알았다며 심심하셨는지 몸을 완전히 틀어 본격적으로 본인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셨다. 본인은 선교사이며 남미로 가는 중이라고 하셨다. 아재개그 남발로 시작된 대화의 소재가 떨어져 가자 본인의 휴대폰 까지 총동원해 그 안에 있는 사진을 첫 장부터 마지막 장 까지 탈탈 털어 전부 보여주었다. 혹여나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을까봐 넘치는 친절함으로 사진과 관련된 부연설명을 해주셨다. 자신의 딸이 예쁘지 않냐며 딸 자랑도 실컷 하시다가 또 다시 자신의 무용담을 들려주셨다. 이야기만 듣고 있자니 <성공시대>에 남미에서 성공한 한국인편에 나오셔도 될 분 처럼 느껴졌다.


선교사님께서 보여주신 사진 중 한 장이 큰 위로가 됐었다.

나는 무척 피곤했지만 몸까지 뒤로 돌리고 신나게 이야기하시는 중년 남자의 흥분감을 망치고 싶진 않았다. '이 사람 언제 또 만나겠는가?' 어찌보면 굉장히 소중하고 특별한 인연인데.... 지금의 순간을 소중히 여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내 전공을 살려 보자고 다짐하였다. 적당한 타이밍 마다 리액션을 넣어주며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나의 리액션이 흥을 준 것인지 휴대폰에 사진을 다 훑어보자 이번엔 본인이 최근에 산 가방까지 보여주며 가방에 있는 이런저런 기능들 자랑을 하였다. 나는 문득 동대문시장 길목에서 '장미칼'을 파는 '장미칼 장수'가 떠올랐다.

'이렇게 장사하시면 금방 장미칼 회사 하나 차리시겠는데?'

한참 신나서 떠들던 중년 남성은 내게 이것도 인연이라며 '카카오톡' 아이디를 물어봤다.

미국행에서 만난 이 인연이 참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어 흔쾌히 아이디를 교환했다.


긴 비행 끝에 <샌 프란시스코 공항>에 도착했다.  


"어이고! 이를 어쩌나! 비행기 시간이 얼마 안 남았네요! 아무래도 놓치겠어요!"


중년 남성이 얼굴이 파리해져 외쳤다. 나는 오지랖이 발동해 중년 남성과 대화도 섞어보지 않은 내 옆에 앉은 중년 여성에게 "저기 저분이 남미에서 선교사님을 하신다고 하는데요 지금 비행기를 놓칠 거 같다고 하는데 어쩌죠?" 라며 도움을 요청했다. 긴 비행 때문에 피곤했을 것이고, 앞으로의 비행도 피곤할 예정인 중년 여성은 곤경에 처한 선교사님을 위해  공항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며 공항 직원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해 줬고 덕분에 중년 남성은 다음 비행기를 이용하게 되었다. 우리는 비행 후 피로감을 느끼기도 전에 중년 남성과 함께 공항을 가로질러 달렸고 결국 일이 잘 해결되자 서로 웃으며 그제서야 한 숨을 돌렸다. 우리 셋은 목적지가 전부 달랐기에 이제 그만 작별을 해야 했다.


"고은이 음료 하나 마셔. 내가 사줄게."

중년 여성은 나의 미국에서의 첫출발을 축복하는 의미에서 음료수를 사주겠다며 공항 내 매점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나는 너무 죄송하여 고사하고 있었는데 그때 중년 남성이 "아이고. 그럼 잘 마시겠습니다!"라며 고급 음료를 하나 집어 들었다. 순간 난처해진 나와는 다르게 중년 여성은 "그래요." 라며 음료를 사주셨다.


우리는 중년 여성이 사준 음료를 마시고자 잠시 의자에 앉아 숨을 돌렸다. 갈증을 해소하며 서로의 앞날을 축복하는 담소를 나눴다. 그때 중년 남성이 중년 여성에게 "집사님은 교파가 어디십니까?"라고 물었다.

"저는 집사가 아닙니다." "그럼 권사님이세요?" 중년 남성이 다시 질문하자 중년 여성은 "저는 그런 교파가 아닙니다. 저는 <제7일 안식교 성도>입니다."라고 답했다. 갑자기 중년 남성의 얼굴은 굳어졌고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우리의 정적을 곧이어 중년 남성의 비행기가 떠날 것이라는 안내방송이 깨 주었다.

"자! 그럼 다들 건강하십시오!" 중년 남성은 서둘러 자리를 일어났다. 중년 남성은 잠시 나를 부르더니 나에게 앞으로 미국에서 잘 살기를 바란다며 선물로 양말을 한 켤레 쥐어주었다. 그리고는 진지한 눈빛으로

"저분은 우리와 교파가 다른 분이니 조심하세요." 라며 마지막 인사를 건내고 떠났다.


출발부터, 살면서 내가 접하지 못한 새로운 일들이 난무했고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33년 동안 한국 기독교 장로교에 몸을 담고 살던 나는 <제7일 안식교> 사람을 만나 이렇게 긴 이야기를 나눠 볼 기회가 없었다. 그들은 나와 많이 다른 사람일 거란 생각으로 살아왔는데 그런 스스로에게 실망을 했다고나 할까? 하나님께 '제발 인간 천사를 보내주세요'라고 기도를 했고 그녀가 그런 나에게는 인가 천사와 같았다. 오히려 같은 교파의 선교사님의 태도가 무례해 보였으며 그 둘의 행동중 누구의 행동이 더 예수님을 닮았는가 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그동안 내가 세상에 대하여 참 많이 안다고 생각했는데 아닐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기 시작했다. 앞으로 살게 될 미국에서 내가 쌓아온 고정관념들이 와르르 무너져 내릴 수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아찔했다.


둘만 남겨진 중년 여성과 나 역시 서로의 비행기가 왔다는 안내방송을 듣고는 연락처 교환과 함께 작별 인사를 나눴다. 나는 드디어 <시카고 오헤어> 공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싣었다.


비행기에 들어서자마자 이곳이 현실인지 드라마 속 인지 헷갈렸다. 미드에서 보던 광경이 펼쳐졌기때문이다. 비행기 내에 90%가 백인 또는 흑인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거대한 몸집에 정장을 갖춰입고 비즈니스석에 앉은 사람들의 모습에서 ‘장사 한 두 번 하나?'싶은 비행의 관록이 느껴졌다. 그런 환경에 덩그러니 놓인 것이 긴장 됐지만 묘한 설렘도 느껴졌다.


비행기를 많이 타본 적이 없던 나는 당연히 '창가'자리에 앉았다.


‘비행기 값이 얼만데! 창에서 바라보는 하늘의 모습을 포기할 수는 없지!’


기체가 작기도 했지만 내 옆에 덩치가 큰 외국인이 앉았기 때문에 난 자의반 타의반으로 망부석이 돼 비행 내내 눈도 살짝 붙이지 못한 채 창밖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하늘을 몇 시간이나 응시했을까? 기내에선 드디어 <시카고 오헤어> 공항에 곧 도착한다는 방송이 들려왔다. '오헤어? 메두사의 머리카락인가?' 시카고에 대한 애정이 1도 없던 나로서는 모든 것이 낯설고 무서웠다.


비행기는 서서히 고도를 낮추기 시작했고 비행기 창문을 통해 하나둘씩 건물의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솔직히! 창공에서 바라본 시카고의 모습은 굉장히 고급졌다!



시카고는 바람이 많이 불기로 유명해서 '윈디시티'라는 별명도 있지만 '건축의 도시' '마천루'라는 별명도 있다.  1871년 시카고에 대형 화제가 났는데 그때 시카고의 나무로 지어진 건축물들이 거의 붕괴되었고 재건 사업을 시작한 시카고는 1885년 세계 최초 철근으로 된 고층빌딩을 세우기 시작하면서 길쭉하고 웅장한 건축물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건축의 도시>라는 별명은 그때 얻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어느 정도 가다가 한 번씩 구름을 뚫고 삐쭉하게 솟은 멋들어진 건물들이 시카고를 강인하고 화려하면서도 세련된 이미지로 만들어줬다.

존핸콕 타워


2017년 5월 23일. 드디어 나는 시카고 '오헤어 공항'에 도착했다. 인천 공항에서 산 유심칩을 휴대폰에 끼워 넣고는 나를 마중 나올 나의 오래된 지인, 앞으로 빈대를 붙게 될 인오빠의 전화를 기다렸다.


"고은아! 여기야!"

인오빠였다. 나를 보고 반갑게 손을 흔드는 인오빠는 못 본 사이에 미국 사람처럼 변해있었다.

분홍색 바지에 중절모를 쓰고 슬리퍼를 신고 있던 인오빠는 나를 굉장히 반갑게 맞아주었다. 나는 반 웃음(웃는 건지 우는 건지)을 지으며 "오빠!" 하며 반가움과 미안함이 공존하는 애매한 목소리로 애써 밝게 인사를 건넸다. 이런 상황이 너무 민망하고 미안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한국에서 인오빠와 통화를 하면서 전화를 끊고 운 적이 많았다. 첫째로는 미안해 서고, 둘째로는 자존심이 상해서였다. 살면서 남에게 부탁을 해본 적 거의 없던 나였는데 내가 살아야 하니까 이렇게 빈대를 붙게 되는구나 싶었다.


3살 된 딸과 갓 태어난 딸이 있는 한 가정의 가장인 오빠이자 심지어 부인되는 언니는 나와 일면식도 없는데, 말 같이 커다란 처자가 갑자기 10년 만에 연락해서 신세 좀 지겠다고 하니... 오빠의 입장이 얼마나 난감했을지 알았으나 물가 비싼 시카고에서 호텔 생활을 하겠다는 나를 오빠도 모른 척할 수 없었던지 자신의 집을 흔쾌히 허락해 준것이다.


인오빠는 서둘러 나의 이민가방 한 개와 대형 트렁크 가방 한 개를 양손에 들고 옮겨주었다. 인터넷을 뒤져가며 무엇이 꼭 필요한지를 파악해 추리고 추려 1년짜리 짐, 이민가방 한 개, 대형 트렁크 가방 한 개 그리고 배낭을 만들었다.중심을 까딱 잘못 잡으면 뒤로 넘어갈 정도의 무게의 배낭을 메고 인오빠를 졸졸 따라갔다. 지금 생각하면 한인 마트에서 다 살 수 있는 것들이라 그렇게 바리바리 싸가지 않아도 됐지만 미국에 대하여 잘 모랐고 금전적인 여유도 없던 상황이었기에 1개의 가방을 '김'과 '즉석 북엇국 블록'으로 가득 채웠고 다른 가방 한 개에는 간단한 옷가지들로 채워갔었다.


무거운 가방을 질질 끌고 인오빠의 차가 세워져 있는 주차장에 도착했다.

'시카고는 도대체 어떤 곳일까?' 차에 올라타니 그제서야 태어나서 처음 볼 , 내가 살게 될 시카고가 기대됐다.


‘곧 내 눈 앞에 펼쳐지는 곳이 바로 시카고다! <시카고 불스>, 뮤지컬 <시카고>, 맛있는 <시카고 피자> 미국에서 3번째로 큰 도시! 시카고!!!!!!’


드디어 차가 미끄러지듯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내 눈 앞에 펼쳐진 시카고의 첫인상은!!!


까맣고도 새까맸다.

이 곳이 시카고 Loop이다. 멋들어진 건물과 노란 불빛의 조화는 솔직히 예쁘다.

"시카고 오니까 어때?"

인오빠가 물어봤다.

"아.. 아직 잘 모르겠어요."

오빠는 기름을 좀 넣어야 한다며 주유소를 향했다.

'음. 미국 영화에서 보던 주유소네. 하와이에서도 주유소를 많이 봤지. 하와이는 야자수도 있는데...’

하와이가 그리웠다. 다음 행선지로 오빠는 '시카고 loop-중심가'로 향했다. '콩 조형물'로 유명한 '밀레니엄파크'가 있는 곳! 그러나 그곳도 11시가 넘은 시간이라 그런지 새까맸다. 나는 점점 푸르고 푸르던 '하와이'가 그리워졌다.

낮에 가면 이렇게 멋진 '구름문'이 있는 <밀레니엄 파크>
시카고 시민들의 얼굴로 만들어진 분수

드디어 인오빠의 집으로 도착했고 오빠의 동네는 더 새까맣고 인적이 드물었다.

인오빠네 동네 번화가

밤이라 그런 것도 있지만 내가 상상한 미국의 모습은 이게 아니었다. 인오빠 아파트는 계단을 이용해서 올라가야 했는데 인오빠는 무거운 내 가방을 혼자 낑낑 들어주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3살 된 귀여운 꼬마 아가씨가 나를 보고 자겠다며 눈을 반짝이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 보는 꼬마와 앞으로 신세를 지게 될 인오빠의 부인되시는 언니께도 인사를 드리고 밤이 늦었으니 내일 더 이야기를 하자며 각자의 방으로 헤어졌다. 나도 앞으로 지내게 될 방으로 안내를 받았다.


시카고의 밤은 까맣고 추웠다. 더욱 마음도 추웠던 것은 오빠으 딸을 보니 나와 함께 살던 조카가 생각이 났다. 나는 남몰래 훌쩍였다. 나를 걱정할 가족들에게도 잘 도착했다는 전화를 드렸다. 엄마와 나는 서로 아무렇지 않은 척 통화를 하며 눈물을 참고 있었지만 엄마가 졌다. 잘 도착해서 다행이라고 말씀하시던 엄마의 목소리에서 떨림이 느껴졌다. 난 아무렇지 않은 척 "엄마 울어?"라고 여쭤보자 엄마는 모르겠다며 눈물이 난다고 우셨다.

"울지 마!"라고 엄마를 말리는 나 역시도 눈물이 났다. 우리는 서로 참고 있던 눈물을 터뜨려 버렸다.

나를 위해 마련해 줬던 방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자리에 누웠지만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침대 옆으로 난 창을 통해 밖을 구경했다. 새까만 밤이었고 노란 가로등이 비추는 건물들엔 그라피티가 난무했으며  전철이 다니는 철로가 하늘 위로 솟아 있었다.

찍어둔 사진을 보니 기분이 별로 안 좋았던거 같다.


'카톡'

갑자기 '카톡'이 울렸다! '이 새벽에 누구지?' 비행기에서 만났던 중년의 남성이었다.


'저는 비행기를 또 놓쳐서 공항 근처 호텔에 있어요.'

'고생이 많으시네요. 피곤하시겠어요.'

'고은 씨 보고 싶네요. 고은 씨 보면 피곤이 풀릴 거 같은데'

......


내가 지금 제대로 본 것이 맞는가? 내 눈을 의심했다.


'고은 씨 만나면 괜찮아질 거 같아요.'


최악이었다. 이것이 설령 ㅋㅋㅋ가 음소거된 장난이라 할지라도 지금은 그럴 타이밍이 아닌 것이다.

나는 너무 외로웠고 시카고는 너무나 새까맸으며 내 미래도 너무 까맣고 까맸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눈물을 흘리며 '내가 선택한 길에 대하여 어떤 책임을 져야 할까'를 생각했다.

그리고는 '앞으로 닥쳐올 일들을 지혜롭게 분간해야겠다. 내가 나를 지켜야겠어!'라고 마음을 다지며 스르르 잠이 들어 버렸다. 눈을 떴을 때 서울 우리 집에서 잠이 깨길 바라며 말이다.

어두운 시카고의 밤이 꼭 내 미래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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