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rtistgon May 13. 2020

서른셋! 신고은은 미국으로 떠났다.

한국에서 잘 나가던 그녀는 어쩌다 미국으로 가게 되었는가?

개그우먼 신고은을 알릴수 있었던 <개그콘서트-문화살롱> 과 <빅마마 이혜정 선생님을 패러디한 시절>
사랑하는 동료들도 있고 팬도 있던 시절

사람들에게 나라는 사람에 대해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면  KBS 공채 20기 출신 개그우먼이란 것이다. 이것은 나의 인생에 있어서 지울 수 없는 것이다. 요즘같이 스스로를 노출하는 게 흠이 아닌 시대에는 어쩌면 참 좋은 무기일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그렇지만은 않았다.


20살부터 개그우먼이란 꿈을 꿔왔던 나는 정말 끝내주는 20대를 보낸 것은 맞다.

열정적이었다. 모든 면에서! 바쁘게 사는 것이 싫기도 하였지만 즐기고 있기도 하였다.

고독을 즐겼고 외로움을 자처하며 살면서 그것들로부터 나오는 에너지를 모아 칼을 갈았다.

하지만 세상에는 나보다 더 절실한 사람들도 많았고 그렇게 하지 않아도 원래 타고난 사람도 많았다.

그래서 화가 나는 날도 많았는데 그 화도 나에게 결국 어떤 동기가 되었던 뜨거웠던 20대를 보냈었다.

탤런트와 작가까지 섭렵했던 시절

늘 열정적이고 뜨겁던 나는 항상 나를 찾고 싶었다. 나를 찾으면 내 안에 작은 구멍이 채워질 거 같았다.

그런 갈증들로 탤런트와 작가까지도 도전했었다. 그런 내가 나는 스스로 너무 간지 나고 멋졌다. 한 번은 예술을 사랑하는 열정 가득한 분들과 연극을 한적도 있었다. 그들은 연극과 오페라에 인생을 건 실력파 예술가들이었는데 우리는 몇 달을 함께 치열하게 준비해 '셰익스피어-멕베스'란 작품을 각색하여 무대 위에 올리기도 하였다. 정극에 도전한다는 것이 개그우먼에게는 어쩐지 좀 웃긴 일이 되었지만 그래도 그 순간들이 너무도 벅차고 스스로에게 대견했다. 그 공연에 기라성 같은 연예인 동료들이 직접 응원을 와줬던 기억도 난다. 그렇게 나는 내 멋에 취해 살던 사람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난 남 부러울 것이 없었다.


그러던 내가 서른셋에 돌연 미국으로 가겠다고 폭탄선언을 하였다.


29살 처음 미국이란 나라로 여행을 갔을 때 그곳에서 처음 만나는 자유를 누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곳은 전 세계 사람들이 돈 쓰려고 작정하고 찾는 곳 '하와이'였다.


웃기는 이야기지만 하와이가 좋았던 점 중 하나는 '마음껏 벗고 다녀도 된다'는 것이었다.

방송일을 하기에 내 몸은 언제나 컸다. 언제나 다이어트 압박에 시달리며 살던 나로서 민소매에 수영복을 마음껏 입을 수 있는 미국의 하와이가 너무 맘에 들었다.  나는 자유를 사랑하고! 이런 자유가 있다면 더 큰 사람이 될 수 있을 거 같고!!! 미국은 자유의 나라고!!!!! 나는 슬슬 미국에 젖어 버렸다. 심지어 한국에서 흔히 겪지 못했던 콩닥이는 경험을 했는데, 혼자 Bar에 앉아 칵테일을 마시고 있는 내게 멋들어진 동양계 캐나다 남성이 다가와 칵테일을 사주며 아름답다고 찬양을 하기도 하고, 조깅을 하는 나를 보고 달리던 차를 세워 같이 시간을 보낼 수 있겠냐며 새 하얀 치아를 보이며 미소 짓는 백인도 만나기도 하고! 그 순간 나는 알았다.

내가 살아야 할 곳은 바로 이곳이란 것을! ('뷰티풀' 뭐 이런 간단한 단어였기 때문에 알아들을 수 있었으며 나중에서야 저들의 행동이 그다지 좋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나는 결심했다!

'죽기 전에 하와이에서 꼭 살아볼 거야!'


그로부터 4년 뒤! 난 '애매하게' 나의 버킷리스트를 달성하게 됐다. 우여곡절 끝에 미국행 비행기를 탄 것이다.

태어나서 처음 긴 시간 부모님과 떨어지게 되어 매우 슬펐다.
경유라는 것이 뭔줄도 모른채 무작정 저렴한 표를 구매해 비행기를 탔던 나, 그 곳에서 만난 한국 분들! 그리고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시카고의 밤 하늘

나의 목표는 '하와이'로 '어학연수'1년 다녀오는 것이었으나 그 당시 상담을 하러 갔던 어학원들에서 들었던 답은 매한가지 "고은 씨 근 4년 동안 하와이를 1년에 한 번 이상은 다녀와서 이민국에서 비자를 안 내줄 거예요. 아직 미혼에 나이도 서른이 넘었고, 하와이로 공부하러 간다는 사실이 이민국에 오해할 소지를 다분히 안겨주는 거예요. 아마 결혼하려고 들어간다고 생각할 거예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다. 나는 절대로! 미국에 결혼하러 가는 것도 아니고! 딱 1년! 내 돈 주고 내가 좀 미국에서 살아보겠다는 건데 왜 말린담?

(그런데 결국 미국에서 결혼을 하긴 했다...)


당시 나로서는 당장 결혼을 할 맘도 없었고, 지금이 아니면 절대로 미국에서 살아보지 못할 거 같았으며, 미국에서 살아보지도 못하고 결혼하고 애 낳고 한국에서 쭉 산다면 관 뚜껑 닫힐 때 너무 억울할 거 같았기에 내 1년을 오롯이 나를 위해 투자해 보고 싶었다. 개그우먼 신고은이 아니라 어학연수생 신고은으로 딱 1년만 살아보고 싶었다. 그래서 나에게 들어오는 모든 일들을 칼같이 거절했는데... 이민국에서 비자를 안 줄 거라는 소식은 나를 너무 부끄럽고 화나게 만들었다. 이제 와서 거절했던 일들을 주워올 수도 없는 모양인데 어쩌나!


그때 10년 전에 연락이 끊겼던 한 지인의 소식을 페이스북에서 접했다. 본인이 '시카고 어학원'과 연관된 일을 하고 있으니 관심 있으면 연락을 하라는 게시물이었다. 그 당시에 난 이것이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황금 열쇠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래서 '혹시 모르지'란 맘으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분께 연락을 하였고 너무 감사하게(?) 어학 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당시 트럼프 정권 초기였는데 트럼프는 그때부터 외국인 비자발급에 있어서 굉장히 엄격했었다. 그런 상황에서 서른 넘은 내가 시카고 어학원으로 비자를 받게 된 것이다. 전공 공부를 하러 가는 것도 아니고 '어학원'으로 가는 건데 말이다. 나중에 일리노이주의 한 대학교에서 입학관리 일을 하시는 분께서 내게 "고은 씨가 이민국 문 닫고 오신 거예요. 천운이 따랐네요."라고 할 정도로 그 당시 비자를 받기는 하늘에 별따기였다고 한다.


비자를 발급받긴 하였지만 '시카고'가 어딘지, 어떤 곳인지도 모르는 나로서는 '시카고'에 대한 정보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뜨는 것은 '미국 내 총기 사망 사건이 가장 많은 곳'이었다. 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가야 하긴 하니 수소문 끝에 예전에 알던 오빠가 '시카고'에서 가정을 이루고 산다는 사실을 접했고 태어나서 해본 적 없는 염치없는 빈대 붙기가 시작됐다. 일단 오빠네서 며칠간 묵으면서 앞으로 지낼 곳을 찾기로 하였다. 오빠는 당시 태어난 지 몇 달 안 되는 딸과, 세 살 된 딸 둘을 키우고 있었고 오빠의 부인은 나라는 사람을 만난 적도 없었는데 흔쾌히 신세 지겠다는 나를 받아줬고 심지어 공항까지도 나와준다고 하였다. 그다음으로 한 일이 귓동냥으로 들었던 '유학 가서 알바로 차도 사고 집세도 냈다'는 이야기를 떠올리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는지 찾아보는 일이었다. 시카고 내에 한인방송국과 신문사에 내 이력서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때 까지만 해도 유학생이 돈을 버는 것이 불법인 줄 몰랐다. 그저 20살부터 쭉 돈을 벌어오던 나로서 스스로 경제력을 갖추고 싶은 맘이 컸기에 그런 일을 시도했던 것이다.


영어가 서툴렀지만 번역기를 돌려가며 비행기 티켓도 구매했다. 당시 내가 이용한 비행기는 '유나이티드 에어라인'이었다. 나는 영어를 싫어했고 영어의 필요성도 모르고 살던 사람인지라 '하이!' '헬로!' '땡큐!' 정도와 '비틀스-예스터데이' 가사 일부 정도 외우는 게 내가 아는 영어의 전부였는데 그런 내가 가장 저렴하다는 이유로 '유나이티드 에어라인'을 타게 됐다. 심지어 그 당시 '유나이티드 에어라인'에서 승객 폭행 사건이 있어서 불매운동도 일어나던 시절이었는데도 돈을 아끼기 위하여 나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출국 당일이 되었다. 부모님께서 나를 공항까지 데려다주셨다. 우리는 서로 차 안에서 아무 말도 못 했다. 셋 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다. 누구 한 명이라도 울기 시작하면 대성통곡 각이었다. 달리는 차의 창문 밖을 바라보니 갑자기 막막하기 시작했다. '시차가 10시간 넘는 곳으로 떠난다니... 평생을 함께 하였던 가족과 떨어져 아무도 없는 곳에서 언어도 안 통하는 곳에서 살아야 한다니. 내가 이 무슨 미친 짓인가? 만약에 혹시 라도 나이 드신 부모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열 시간 넘는 그 길을 어떻게 달려가야 한다는 말인가.

생각해보면 너무도 행복하고 즐거웠던 우리 집이었는데 내가 왜 미국을 가는 거지?!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 같은 우리 집을 나 두고...'. 갑자기 너무 후회가 됐다. 심지어 하와이로 가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이 모든 것은 사실 '하와이에서 1년 살아보기'에서 시작된 것인데! 하와이에 지인들에게도 이미 '하와이로 어학연수를 가겠다'며 지인 집에 짐도 두고 오고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호스텔 사장님께도 곧 가서 일을 도와드리겠다고 호언장담을 하였는데... 갑자기 왠 시카고란 말인가... 총기 살인 사건이 그렇게 많다는데... 총에 맞으면 어떡한단 말인가... 모든 것이 잘못된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점 너무도 슬퍼져서 그냥 차를 돌려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졌다. 그러나 그러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는 상태로 겁먹은 강아지처럼 나는 미국, 시카고로 향하게 됐다.


비행기를 타면서 '혹시 나보고 내리라고 하면 어떡하지? 뭐라고 말해야 하지?' 심장이 두근거렸다.

승무원들은 전부 미드에서 볼 법한 금발의 쭉쭉빵빵 언니들이었다. 나만 빼고 승객들 모두 영어 구사가 완벽해 보였다. 나는 점점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그럼 너무 바보 같아 보일 거 같아서 더욱 당당한 척했다. 나름대로 시크한 표정을 지으며 도도한 척을 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사시나무 떨듯 덜덜 떨고 있었다.

그렇게 비행기에서 뛰쳐 내리고 싶어 창밖을 쳐다보는 순간! 이런!!! 옆을 보니 한국분이 앉아계시는 게 아닌가? '죽으란 법은 없구나. 아니, 정말로 어쩌면 이 미국행은 나에게 운명일지도 몰라!'라는 생각이 들며 입가에 살짝 미소가 번졌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