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미키17> 봉준호 1.0의 끝, 그리고 2.0의 시작

영화와 예술가의 리듬과 변주

by 무비뱅커 Mar 01. 2025
아래로

   <미키17>은 익스펜더블(죽으면 복제되는 노동자)인 미키가 반복적으로 죽고 되살아나는 과정을 통해, 2054년 가까운 미래에 동시대 인간들이 마주할 법한 이야기를 그린다. 제목의 숫자가 의미하듯, 미키의 죽음과 재생이 17번(정확히는 18번) 반복된다는 SF적 설정은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을 불러일으키며, 여러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미키17>은 그런 장르적 모티브를 넘어, 분명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영화다. 익숙한 요소들 속에서 낯선 방식을 끌어와, 뒤섞이는 메시지의 파동과 충돌 속에서 튕겨 나오는 파편들이 독자적인 리듬과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영화에서 반복되는 것은 미키(로버트 패틴슨)의 죽음과 휴먼 프린팅뿐만이 아니다. 영화는‘공평’이라는 개념을 끊임없이 소환하며, 이를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한다. 독재자 마샬(마크 러팔로)은 미키18에게 당한 공격으로 생긴 상처를 ‘공평’이라는 명분 아래 되돌려준다. 하지만 이는 정의로운 균형이 아니라, 권력자의 보복 논리를 정당화하는 방식에 가깝다.  또한, 클리퍼(외계 행성 원주민)는 자신의 자식이 인간에게 희생당한 만큼, 인간도 한 명 희생되어야 평화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공평’은 윤리적 정의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거래의 조건으로 사용된다. 마샬의 죽음으로 두 종족 간의 평화협상이 체결되지만, 이는 진정한 공평함이라기보다, 단지 힘의 균형이 맞춰진 결과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엔딩에서 미키17은 클리퍼에게 그들의 전투력에 관한 진실을 공정하게 전달해달라고 질문한다. 이는 영화가 공평함을 단순한 보복이나 균등한 분배가 아닌, 진실과 이해를 향한 과정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지는 순간이다.

    결국, 영화 속 ‘공평’은 반복되지만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 단순한 균등 분배나 보복의 도구가 아니라, 진실과 이해를 위한 과정으로 확장된다. 마샬과 클리퍼가 내세운 공평은 권력 유지와 생존을 위한 조건으로 작동했지만, 마지막에 미키17과 클리퍼가 주고받은 질문과 답변은 영화가 공평의 본질을 재정의하는 순간이다. 이는 공평이 단순한 피해의 대칭적 보상이 아니라, 서로가 동등한 입장에서 진실을 공유하고 이해를 도모하는 과정이 되어야 함을 시사한다.


   영화 속 카메라의 움직임 역시 독특하다 못해 기묘 하다. 영화 초반 설정 쇼트에서 카메라는 우주선 외부를 비추며 빠르게 수직 상승한다. 그러나 프레임 속에 거꾸로 뒤집힌 미키의 모습이 들어오자, 카메라는 회전하며 제자리를 찾는다. 상승하는 듯 보였던 카메라가 사실은 추락하고 있었다는 반전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이는 관객에게 공간적 혼란을 유발하며, 끊임없이 추락하는 미키들이 마주할 비정상적인 세계관을 암시하는 장치로 작용한다.

   다음 시퀀스에서는 노동 중이던 미키의 손목이 순식간에 잘려 회전하며 추락한다. 빠른 운동 에너지로 움직이던 카메라는 슬로 모션으로 전환되며,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무심하게 차 마시며 대화하는 사람들을 포착한다. 이 장면에서 카메라 속도 변화는 노동의 계급적 대비, 복제 인간의 소모품화, 그리고 영화의 건조하고 쓸쓸한 분위기를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즉, 이러한 카메라의 움직임은 봉준호 감독 특유의 냉소적이고 비판적인 시선이 강하게 드러나는 순간이라 할 수 있다.


   영화의 마지막 리듬은 인간들이 자신의 안녕과 이익을 위해 미키들을 반복적으로 희생시키는 한편, 그들이 혐오하는 클리퍼는 단 하나의 베이비 클리퍼를 살리기 위해 종족 전체가 움직이는 극명한 대비로 형성된다. 이 대조적인 비대칭 구조는 “누가 더 인간적인가?”라는 영화의 핵심 질문을 관객에게 던진다. 이런 점에서 나샤가 마샬에게 “쟤들이 원주민이고, 우리가 외계인이야!”라고 말하는 장면은 더욱 특별하게 다가온다. 이 장면은 인류(특히 백인)가 자행한 식민지 개척의 야만성과 불법적 행위를 비판하는 시각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흑인 배우가 연기하는 이 일갈은 역사적 맥락과 맞물려 더욱 설득력 있는 감정으로 스며든다.


   이렇게 <미키17>은 사건의 반복과 카메라와 시간의 강약 조정, 이미지의 대비를 통해 서사의 결을 뒤흔들고, 익숙한 틀 속에서 낯선 감각을 만들어내며, 영화의 고유한 감도를 형성한다. 이것이야말로 봉준호의 힘이며, 원작 소설과 차별화된 ‘영화적인’ 감각이 아닐까. 사실 나는 원작 소설도, <기생충>을 비롯한 봉준호 감독의 영화들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미키17>이 이야깃거리가 넘쳐흐르는 작품이라는 점이다. 곱씹어 볼수록 새로운 것이 보이는 재미를 선사하는 영화다.


   또한 <미키17>은‘봉준호’라는 거장의 새로운 전환점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지금까지 그의 영화가 귀결하는 총집합체라 할 수 있다. <미키17>안에는 <플란다스의 개>(2000)의 무기력, <살인의 추억>(2003)의 집착과 절망, <괴물>(2006)의 신식민주의와 상실, <마더>(2009)의 광기와 희생, <설국열차>(2013)의 계급과 분노, <옥자>(2017)의 윤리와 연민, <기생충>(2019)의 불균형과 허탈감이 모두 담겨있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영화 세계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해피 엔딩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미키들이 반복적으로 재생되듯, 그의 여덟 편의 장편 영화들이 집약된 <미키17>은 ‘봉준호 1.0’의 마무리이자, 새로운 ‘봉준호 2.0’의 서막을 알리는 작품으로 기억될지도 모른다.

작가의 이전글 <브루탈리스트> : 영화는 어떻게 조형되는가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