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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양이야기 May 06. 2024

삶의 한가운데를 찾는데 걸린 10년

<삶의 한가운데>를 읽고

슈타인의 모습으로 니나처럼 살고 싶었던


 루이제 린저 저자 자신을 니나에 투영시켰다고 이전에 읽었다면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어쩌면 슈타인의 모습이 저자 자신의 모습에 더 가깝지만 니나처럼 살려고 노력했던 것이 아닐까 혹은 그것을 동경했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2012년에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땐 니나에 감정이입을 하면서 그녀의 삶과 나의 삶을 견주어봤다. 왜냐하면 그녀가 생각하는 많은 문장이 내가 생각하는 것과 겹치는 부분이 상당히 많았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루이제 린저의 나치 부역자 이슈에 대해 알고 읽어보니 자신을 변호하려고 슈타인의 나치당 입당을 이야기 안에 배치했다는 느낌이 들어서였을까. 저자가 니나처럼 보였겠지만 슈타인에 가까울 수 있다는 생각이 이번에 처음으로 들었다.


등장인물에 이입했던 지점들


 아래는 니나가 했던 이야기들인데 공감하고 나 또한 자주 쓰는 표현들이 있어 적어봤다.


우울은 인식의 시초일 뿐이야. p.65

의욕이 없어지면 늙기 시작하는 거야. p.69

너는 네 안에 있는 자아들 중의 하나에다 너를 고정시키지 않았잖아. 너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어. p.78

커다란 충격이 우리를 전진하게 하는 거야. 작은 충격은 우리를 점차 진창 속으로 몰아넣지만, 그건 아프지 않지. pp.131-132

정작 인생에는 한 가지 계산서도 없고 아무런 결말도 없는데 말이야....  생은 계속 흘러가는 거야. p.149

모든 것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데도 그것을 간단하게 만들려는 게 나는 싫어. p.151

단지 그렇게 할 만한 가치가 없기 때문이야. 악은 비생산적이야. p.153

의식에서는 항상 다음과 같은 말이 맴도는 거야. 네가 하는 일은 충분하지 못해, 너는 해야만 하는 일을 이루지 못하고 죽을 거야. 그리고 또 이룬 것에 대한 불만도 있어. p.207

그녀의 동물적인 온기는 정신적 냉기에 의해 가려져 있었다. p.223

처음으로 나는 슬픔도 재산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p.233

나는 겁쟁이가 되고 싶지 않았으니까. 나는 무슨 일이든 견뎌나가기로 했으니까. p.263


 지금도 니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슈타인 또한 나이기도 하다. 2012년 이후 더 많은 문장이 나를 나타내게 된 이유는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불행한 운명과 마주했을 때 니나는 이 운명 또한 의미 있는 것, 도전해 볼만한 것이었다(p.92)고 표현하는 부분 또한 지금의 내가 마주해 온 순간들을 떠올리게 한다. 게다가 고난과 역경이 나를 죽이지 않는다면 강해질 것이라는 니체의 말이 생각난다. 내가 의도적으로 선택한 고난도 있지만 자연재해처럼 나에게 다가온 역경도 있었다. 그 와중에 나는 슈타인처럼 점점 더 굳건하게 그것을 믿는 것을 자신의 목표로 삼았던(p.69) 것 같다.


 마지막 1947년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10년 전에는 나 자신을 지금만큼 알기 못했기 때문에 나의 강렬한 감정의 폭발이 니나를 향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없었다. 니나를 얻기 위한 투쟁은 한 특별한 여성을 얻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특수한 방향으로 나 자신의 본질을 인식하고 발전시키려는 투쟁뿐이었다.'(p.339) 결국 니나는 매개체였을 뿐이고 슈타인 자신을 향한 감정이었던 것이다. 니나를 사랑하는 남자로서의 정체성이 슈타인의 마음에 들었고 그것을 믿는 것을 자신의 목표로 삼았다는 초반의 고백과 연결된다.


10년이라는 시간


2012년에 처음 이 책을 읽었고 2022년 두 번째로 2024년 지금 세 번째로 읽게 됐다. 무려 12년이 지났다. 지난 10년이라는 세월이 걸려 두 자아가 모두 나라는 단순한 인식으로 정착했다고(p.116) 슈타인은 말한다. 아마 12년이라는 시간에 걸쳐 니나와 니나의 언니라는 두 자아가 모두 나라는 인식을 해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니나로 살았던 시간은 짧지만 강렬했고 그 시기가 있었기에 니나가 풍부한 표정을 가진 것처럼 나도 어느 정도 생기 있는 표정을 가질 수 있게 됐다. (물론 그 둘 말고도 다양한 자아가 있다)


 '삶의 한가운데에 내가 위치해 있어야 삶을 진정으로 살아가고 있다'라고 말한다고 느껴진다. 니나는 삶의 한가운데 자신이 있지만 끊임없이 밖을 향해 나아가며 삶을 진정으로 살아내고 있었다. 반대로 슈타인은 삶의 한가운데 자신이 있지만 그것을 모른 채 니나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내면에 집중했다. 1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삶의 한가운데 자신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작가는 윤리적이어야 하는가


 2012년에는 루이제 린저가 나치 부역자라는 사실을 몰랐다. 2022년에는 그 사실을 알고 이 책을 다시 읽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물론 윤리적으로 올바른 사람이라면 더 좋겠지만 윤리적으로 올바를 수 있는 것도 사회적인 상황에 따라 선택권 자체가 없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부분과 전체>를 쓴 하이젠베르크는 독일 물리학자로 나치의 핵무기 제작을 지원했던 사람이다. 남성지식인도 극단적인 상황에 몰려 선택을 강요받는 상황에서 루이제 린저는 사회적 약자였던 여성이었으니 나치 부역자로 생명을 연장할 수밖에 없었을 수 있다. 그래서 더욱더 슈타인이 사실은 루이제 린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이유다. 슈타인도 나치당에 입당했으며 그로 인해 주변 사람들을 지킬 수 있었다고 이 책에서 이야기한다.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을 대변하는 소설을 썼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 당시를 살지 않았던 내가 윤리적이지 않은 작가이기 때문에 이 책을 거부한다고 이야기하긴 힘들다. 물론 그 사실을 알고 나서 이 책이 소설 그대로 읽히지 않았다. 그렇지만 모든 것이 자신의 상황과 알고 있는 배경지식을 기반으로 해석이 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루이제 린저가 나치 부역자임이 논쟁이어도 이 책이 계속 읽힐 수 있는 이유는 사실은 니나와 같은 감정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고 그에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지금도 우리는 나치가 집권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 않지만 매번 사상을 검증받게 되는 투표나 일상에서 어떤 현상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 확대해석일 수 있지만 루이제 린저와 비슷한 선택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의미다. 지금 우리의 판단과 선택은 미래에 평가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지금 알지 못할 뿐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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